0123 <-- 끝이 나고 -->
산길을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느긋하게 걸었다. 밝은 갈색의 오래된 지팡이를 짚었는데, 땅을 찍은 곳에는 검은 진액이 남았고, 검붉은 불길을 토해내더니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불이었고, 다른 잎에 붙어도 잎을 태우지 않았다.
기이한 검붉은 불길을 족적(足跡)처럼 남기는 흑마법사는 단단히 은폐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풍성하게 자란 나무와 수풀 때문에 알지 못한다면 발견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입구를 가로막은 넝쿨을 지팡이로 치워버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치워진 넝쿨이 살아움직이듯이 다시 입구를 은폐했다.
“〈브림스톤 플레임(Brimstone Flame, 유황 불꽃)〉.”
그 주변으로 유황색의 불꽃이 여러개 나타나서 주변을 밝혔다. 기괴하게도 분명 빛이 가득한 밖에서는 밝은 갈색의 지팡이였던 것이 어둠 속에서는 흉악한 검은색의 뱀이 되었다. 그 뱀은 주체를 못 하는지 입에 보라색의 독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샤아아···
듣기만 해도 쭈뼛 서는 뱀소리를 내며 〈악마 아카타베루의 사도 블랙 스네이크〉의 화신이 그의 팔에 들러붙었다. 진짜 사도 블랙 스네이크는 아니었고, 그것의 모습을 빌린 화신에 불과했지만 다른 흑마법사는 허락받지 못한 힘이었다.
로브를 벗은 〈악마 숭배자 타탄훔〉은 모든 것을 악마 아카타베루에게 바친 흑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아카타베루의 총애를 받는 자였다.
간악한 흑마법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각진 사각 턱을 하며 신뢰 있어 보이고, 남자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동굴은 기괴할 정도로 검은색이었다. 직선의 길을 쭉 걸어나가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고, 수많은 통로로 향하는 문이 있었다. 넓은 공간의 중심에 있는 원탁에 앉았다.
오늘은 메디오 지방에서 암약(暗躍)하고 있는 흑마법사들의 회동이 있는 날이었다.
가장 처음으로 도착한 〈악마 숭배자 타탄훔〉은 혀를 찼다. 이 던전의 주인공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5인의 흑마법사 중에서 변변찮은 특출남이 없어 그저 〈흑마법사 게페락스〉라 불리는 놈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찮은 재능을 가진 놈이, 꼴에 흑마법사라고.’
〈키메라의 알파던〉
〈던전마스터 골굼〉
〈흉화의 산베로스〉
〈악마 숭배자 타탄훔〉
시간이 흐르고 4명의 흑마법사가 모였다. 제법 큰 지방인 메디오 지방은 〈남부 왕국〉의 북부 지방을 크게 아우르는 곳이었다. 넓은 영토에 비해서 인간이 뻗은 곳은 적었기에 흑마법사가 숨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했다.
원탁의 중심에는 악마 아카타베루의 동상이 놓여있었다. 악마가 아기를 뜯어먹고 있는 동상이었다.
“주인공 노릇이라도 할 생각인가? 던전의 주인인 게페락스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것이지?”
여러 갈래의 문은 열릴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쳐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아예 관심이 없다는 것이 맞았다. 4명의 흑마법사들은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사에 대한 소문은 모두 들었나?”
“듣고 말고. 크흐흐.”
흉측한 얼굴의 〈흉화(凶禍)의 산베로스〉가 저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크고 작은 가죽 배낭을 잔뜩 들고 다니는 흑마법사였다. 앉아있는 그 주위로 가죽 배낭만 7개였다.
〈기사에 대한 소문〉은 그만큼 흑마법사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버팔로 나이트(Buffalo Knight)〉! 이 얼마나 명예로운 이름인가? 마법으로 버무려진 전신갑주 하나 없이 황소를 산 채로 들어 올린다는 무적의 장사(壯士)로 소문이 자자하던 기사가 함정에 걸려들다니.”
크크크.
음흉한 웃음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버팔로 나이트, 〈아크온 몽펠리에(Arcon Montpellier)〉는 사경을 헤매긴 했어도 홀로 트롤을 잡은 적이 있었다.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자였다.
어렸을 때 웃통을 벗은 채로 수도에서 황소를 들어 대로를 활보하기도 했다. 자신을 낮게 보는 소문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한 기행이었다. 기사 서임을 받기 전 14살의 나이에 그런 힘을 과시한 자였다. 오죽하면 〈하프 베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 힘 때문에 북부 메디오 지방의 가문이면서도 남부 왕국의 북부가 아니라 수도 지방에서 활동이 강제될 정도였기에 그가 함정에 걸린 것은 그야말로 흑마법사들에게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인간 사회에서, 남부 왕국에서 명성 있는 기사 중의 기사였다.
“게페렉스의 제자 중 하나가 죽고, 하나가 〈변종 키메라〉가 되었지만 만약 정말로 버팔로 나이트가 죽었다면, 계획을 그대로 진행시켜도 괜찮은 것 아니겠소?”
〈던전마스터 골굼〉이 썩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지금처럼 운이 따라준 적이 없으니. 못해도 이번 겨울에 거사(巨事)를 치르면 될 것 같소.”
〈흑마법사 게페락스〉가 없음에도 중대 사안을 결정하기도 했다.
싱글벙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은 통로 중 한 곳의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흑마법사 게페락스〉의 등장으로 잠시 멈추었다.
“왜 이렇게 늦었는가? 해가 중천을 지난 지가 오래인데···”
“동굴 안에서 해가 중천에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농담이라면 썩 재밌는 농담이군.”
한 소리를 내뱉은 〈악마 숭배자 타탄훔〉이 게페락스의 비아냥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크게 요동치는 감정에 블랙 스네이크가 입을 쩍 벌리며 소리를 냈다. 빳빳이 세운 뱀은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보였다.
게페렉스는 웃음을 유지하며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면면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웃음기가 만연한 것을 보니, 나 없이 축배를 빼어 드셨나 보군.”
“버팔로 나이트가 죽었으니, 축배를 들어도 괜찮지.”
그 말에 게페락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계획은 실패했소. 예상보다 아크온 몽펠리에의 무력이 실로 대단하였고, 변종 키메라와 일각수가 된 〈붉은털의 곰〉을 격살하였소.”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원탁을 주먹으로 내려치고, 〈악마 숭배자 타탄훔〉은 벌떡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제국 기사〉조차도 하지 못할 일이다! 북부의 명가 불파겐이 살아돌아온 것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업적이다!!”
악마의 힘으로 수명에서 벗어난 흑마법사들이었다. 수백 년 전에 멸문당해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진 불파겐 가문을 언급했다. 남부 왕국의 유일한 오우거 슬레이어를 배출하던 불파겐 가문은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존재들에게 공포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멸문에 뒤엉킨 업(業)은 칠흑보다 어둡고, 심해보다 깊으며 그 어떤 실타래보다 어지럽게 엉켜있었으며 전쟁터의 진창보다 질척거렸다.
“내 말은 거짓이 아니오. 일찍이 〈기사 살해〉를 계획했을 때부터 예정된 〈일백야수〉는 〈곰〉으로 정했고 그 곰에 〈기생 촉수〉를 심도록 키메라를 제공한 것이 저기 있는 〈키메라의 알파던〉 아니오?”
“합공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1시간의 여유가 있었을 뿐, 합공은 이루어졌소.”
그 말에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리가 띵했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홀로 던전을 박살 낸 이후로 오랜만에 이런 기분을 맛보는군.”
〈던전마스터 골굼〉이 고개를 푹 숙였다. 거대한 절망감이 수백 년 묵은 썩은 마음속에 들어갔다. 기분이 절로 안 좋아졌다.
“잠깐. 말이 이상하지 않은가? 일백야수와 싸웠는데, 일각수를 격살했다니?”
잠자코 있던 〈키메라의 알파던〉이 제지를 했다. 말이 안 맞았기 때문이었다. 변종 키메라와 일백야수로 합공을 하고 결과는 일각수 격살?
“합공 뒤 일백야수는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생충의 경험으로는 막대한 포식을 경험했고, 일각수가 되었다.”
“소형 몬스터 부락이라도 먹은 건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악마 숭배자 타탄훔〉은 그 결과를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변종 키메라〉만해도 기사 하나를 감당 가능한데, 합공까지 막아내고 하루 뒤에 추적해서 일각수마저 죽인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정 의심스러우면 위치를 알려주겠다. 지금 가면 시체는 볼 수 있겠지. 버팔로 나이트가 보이면 안부도 전해주신다면 좋겠군. 클클.”
게페락스의 말에 부들부들 떨던 타탄훔이 의자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화를 식히려는지 아예 팔짱을 끼고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악마 아카타베루〉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 힘들어진 그였다.
“··· 그래도 정말로 믿기 힘들군.”
모두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버팔로 나이트라도 2일간 그렇게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침묵은 계속되었다. 게페락스는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명백한 사실을 전달하고 그들이 받아들이기를 기다렸다.
“다른 변수는 정말로 없었나?”
〈악마 숭배자 타탄훔〉의 말에 게페락스가 비웃음을 날렸다.
“기사 두 명이 고작 일백야수 하나를 잡는다고 움직였을 거라고? 남부 왕국은 결코 그럴 여유가 없다.”
“······”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코 버팔로 나이트의 실력이 좋다는 것이 아니었다. 컨디션이 아무리 좋아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키메라의 알파던〉이 무엇보다 잘 알았다. 〈1제자 포낙서스〉를 〈변종 키메라〉로 진행시키는데 지식을 게페락스에게 제법 준 알파던이었다.
“명성있는 기사도 능히 잡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변종 키메라 포낙서스〉다. 전신갑주의 마력을 소모하기 위한 수많은 촉수. 기사에게 타격이 가능하도록 흑마법을 사용하는 머리. 그리고 끝없는 재생력까지.”
거기에 일백야수까지 끼어들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력이 있어서 돌파할 상황이 아니었다.
“행운이 그에게 다가갔고, 불행이 우리에게 찾아왔군.”
그게 〈키메라의 알파던〉이 내린 판단이었다.
“그놈의 운.”
순식간에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흑마법사 게페락스〉가 손뼉을 치며 주제를 바꾸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되고 말았소. 제법 공을 들였던 〈기사 살해〉가 실패로 돌아간 이상 모든 계획을 접고, 다시 깊은 곳으로 사라져야 하오.”
하지만 그 말에 대답하는 흑마법사 하나 없었다. 반응이 미지근하자 게페락스가 화를 냈다.
“이 상황에서 계속 하자는 것이오?”
“그래도 〈횃불 성채〉에서의 모든 것을 지우기에는 투자한 것이 얼마인데···”
게페락스가 혀를 찼다.
“기회와 운은 언젠가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기 마련이오. 운이 떠났고, 계획의 두 개가 모두 엎어졌소. 나는 내 하수인 두 명을 모두 잃었고.”
게페락스는 잔뜩 화를 내는 표정을 지은 채 계속 말했다.
“이런 운이 따라주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 모든 증거를 지우고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일을 진행시킨다면, 어떻게든 고꾸라질 것이오. 들킨다면, 신전에서 〈성전대(聖戰隊)〉가 깃발을 들어 올릴 명분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소. 진정 그것을 원하시오?”
최소 100명에서 최대 1500명으로 구성되는 성전대는 그 군사력 때문에 어디서든 깃발을 일으키기 힘들었다. 귀족이든 왕족이든 남부 왕국이든 제국이든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명분을 주게 만드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특히나 〈횃불 성채〉에 공을 들이고 있던 〈악마 숭배자 타탄훔〉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마어마한 공을 들여 만든 탑을 스스로 지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큰 고통이었다.
‘이렇게까지 운이 안 따라주다니! 이렇게 빌어먹을 경우가 다 있다니?!’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아크온 몽펠리에가 용병단을 고용하고, 민병을 징집해도 내장을 처참하게 가를 정도의 강력한 전력이 준비된 덫이었다.
게페락스는 그들을 다독였다. 가장 나이가 어렸기에 후일을 도모하는데 오히려 여유로운 면이 있었다.
“〈왕국 야영지〉에서부터 삐끗거렸던 거사이니, 어차피 이렇게 된 것이 되려 잘 된 것일 수도 있소. 뻥뻥 구멍이 뚫린 배를 타고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급하게 노를 저으면 결국 침몰되는 법이지.”
그 말에 원탁을 주먹으로 친 〈악마 숭배자 타탄훔〉이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흑마법사들의 회동은 그렇게 안 좋게 끝이 났다. 모든 것이 지워지고, 흔적 하나 없게 만든 뒤에 다시 어둠 속으로, 세월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