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5 <-- 기다림 -->
식당의 이름은 〈높은 식당〉이라고 했다. 낮게 사는 사람들에게 높은 곳의 맛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들어간 식당 이름이었다.
“반갑소. 이스핀이 정신 차렸다고 했을 때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개새끼도 때때로 옳은 말을 할 때가 있는 법이지. 파하하!!”
손목부터 팔뚝까지 심한 칼빵이 나있는 주인은 자신을 〈두툼살 벤〉이라고 드낙에게 소개하며 이스핀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전부터 그를 봐주었다고 했다. 이스핀의 은사님이라고 봐도 무방해 보였다.
이스핀은 드낙을 벤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이끈 것이다. 표현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드낙과 도렌에게 소개해 준 것이다.
그것은 남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행위였다.
“오늘은 제법 좋은 놈이 들어왔소. 멧돼지 고기지. 고기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싸면서 질 좋은 것을 구하려고 매일 새벽부터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것이 내 취미라서 말이오.”
야채(이 세계 특유의 향이 짙은)로 숙성시켜서 비린내가 나지 않는 숙성 고기가 구워져서 올라왔다. 고기에는 잘게 잘게 자른 촘촘한 야채가 들러붙어 있었다. 하지만 결코 과하지 않았다. 딱 비린내만 잡아주었다.
“여기에 있는 마른 야채를 뿌리면 좀 더 향이 납니다.”
이스핀은 갖가지 것들을 알려주었다. 독특한 식당이었다. 하지만 왠지 익숙했다. 짜장면 집에서 고춧가루를 뿌리는 기분이었다.
드낙은 추가로 소금만 뿌렸다. 간수가 아주 잘 되어서 쓴맛이 느껴지지 않는 몇 년이나 묵은 소금이라 마음에 들었다.
고기를 썰기도 전에 맥주부터 한 잔 채웠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상투적인 말이 오고 갔다. 도렌은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한 입 먹고 고기를 입에 넣었다.
“술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왜 그렇게 안 마십니까?”
드낙의 말에 도렌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돈을 많이 들고 있어서···”
이스핀이 그 속 좁은 소심함에 킬킬거렸다. 실전을 겪으면서 단번에 전투력이 크게 껑충 뛴 것과는 다르게 평소 행실은 애송이 그 자체였다.
“적당히 마시면 되는 것을···”
드낙은 그렇게 한 소리만 했다. 알아서 할 일이었고, 자신의 생각을 한 번 말하고 더 쪼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용병단은 많이 바뀌게 될 겁니다. 뒤풀이 겸 그 방향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예. 하십시오.”
이스핀이 조금 긴장한 채 술잔을 놓았다. 술맛이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웃고 즐기기보다 향후 미래에 대한 계획을 말하는데 술이 당길 리가 없었다.
“전문적인 용병단을 꾸리려고 합니다. 정확히는 집도 용병단 소유로 하나 가지고, 함께 생활하며 병사들처럼 수련도 하고, 그렇게 전문적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용병단을 할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용병단에 소속한 사람들은 〈또 하나의 가족〉이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또 하나의 가족···”
듣자마자 확 다가오는 말이었다.
"그러려면 돈이 제법 들어가지 않습니까?”
“평범한 규모의 집으로는 감당이 안 될 테니, 못해도 20명은 거주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합니다. 최소로 생각했을 때입니다.”
“20명···”
도렌의 우려스러운 모습에 드낙이 빙긋 웃으며 손을 올리며 말했다.
“당장은 아닙니다. 차근차근 인원수를 늘려나갈 겁니다. 한 번에 최대 5명씩 영입할 겁니다. 아니면 아예 안 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했다. 드낙의 〈계단식 성장〉은 용병단의 몸집을 불리는데 시간적 여유를 집어넣어 그 반동을 줄이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한 번 실패하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치안이 안 좋은 곳에 해놓으면 빈집털이를 당할 것이니··· 못해도 은화 20닢은 주고 외청에서 집을 구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말한 이스핀은 입맛을 다셨다. 찜찜한 기분이 그에게 스며들었는데, 그것은 돈에 관한 생각이 확 가슴으로 들어와서였다.
“용병단 인원이 늘어나면 그 준비에 대해서도 돈이 들어갑니다. ··· 그래서 말인데, 이번 의뢰금의 일부를 〈공금〉 형식으로 다시 거둬들이고 싶습니다.”
‘이런 젠장.’
이스핀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반면 도렌은 무덤덤했다. 자존감이 그리 높지 않은 도렌에게 있어서 이번 일로 얻은 돈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을 계속 가지게 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회에서 매번 양보하는 이들처럼 자신의 이득임에도 스스로 지키지 않는 그런 부류가 도렌이었다.
그걸 모를 이스핀이 아니었다. 그와 의뢰를 한 것은 한 개뿐이었지만 1달이 넘게 지냈다. 모르면 지금의 이스핀은 그때의 이스핀을 죽이고 이스핀이 된 도플갱어가 되어야 했다.
“얼마를 생각하십니까?”
“저까지 합쳐서 은화 30닢을 〈용병단 공금〉으로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금에서 쓰이는 돈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공지를 하겠습니다. 잔액까지 전부요.”
1명씩 은화 10닢을 주면 되었다. 말이 은화 10닢이지 천만 원이었다. 그럼에도 도렌은 거침없이 꺼내서 주었다. 이스핀은 그 모습에 허탈하게 한 번 웃었다. 하지만 드낙이 공금에서 쓰이는 돈을 잔액까지 항상 공개하겠다고 했기에 별 수 없었다.
드낙에 대한 믿음 또한 크게 한몫했다. 줬다 뺏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주기도 전에 이렇게 말해도 거기서 거기였다. 드낙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면 어느 상황이라도 불만을 가질 것이고, 만족하고 있다면 어느 상황에서든 좋게 볼 것이다.
적어도 그는 돈을 먼저 약속한 대로 주고, 말을 건넸다.
‘안일했다. 용병단을 이끄는데 내 돈만 쓸 뻔했어.’
후회는 늦었지만 되돌리는 것은 가능했다. 그간 드낙이 보여준 신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스핀과 도렌의 실질 수입은 은화 10닢에 동화 550닢이 되었고, 그건 드낙도 마찬가지였다. 〈용병 공금〉은 오로지 용병단을 운용하는데 쓰일 것이다.
“공금을 모으는 방식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자신의 돈이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이스핀은 그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듣고 싶어 했다.
“이번 일처럼 의뢰비의 절반을 공금으로 넣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용병단에 쓸 일이 있을 때마다 걷을 것이고, 잔액만 보관할 것입니다. 의뢰마다 의무적으로 공금을 걷지는 않을 것입니다.”
X같은 대학에서 수천억을 그저 모아놓기만 하고 쓰지 않는 것에 공분했던 드낙이었다. 그런 짓을 똑같이 하고 싶지 않았다.
정의로운 말을 그대로 이행하겠다는 드낙의 강렬한 기운에 이스핀이 뭘 할 껀덕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은화를 꺼내서 드낙에게 건네주었다. 물론 그래도 드낙은 사람이었다.
‘사람은 간사하지.’
“집 사러 갈 때, 저와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렴요. 여기 생태를 가장 잘 아는 것이 이스핀인데. 제가 혼자 가면 저 1층 집을 은화 30닢에 살지도 모릅니다.”
드낙이 농담을 던졌다.
“그때는 단장이고 뭐고···”
이스핀이 포크로 목을 긋자 드낙이 쾌활하게 웃었다. 서로 맥주잔을 부딪치고 술을 마셨다. 도렌은 이번에도 한 모금만 마셨다. 이스핀은 제법 들이켰다.
“이번 일을 하면서 마음에 안 들거나 바꿨으면 좋겠다 싶은 게 있었습니까? 있다면 지금 말하세요. 오늘 아니면 안 듣습니다.”
모두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피가득 술집〉에서 들었던 용병 생활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힘든 점도 없었다.
“아. 있다면 짐수레를 끄는 놈을 좀 바꿨으면 합니다.”
〈만물 잡화점〉의 〈잡화상 소레〉 여주인에게 반납했던 늙은 당나귀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것을 끄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지만 귀찮았다.
“그럼 그것도 공금을 통해서 바꾸겠습니다.”
“좋죠.”
드낙은 고기를 집으면서 걸리적거리는 〈트롤의 망토〉를 뒤로 넘겼다.
“뭐, 다른 질문 없으십니까?”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존댓말로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규모도 커질 텐데···”
“서로 말을 놓자는 뜻입니까?”
이미 이스핀과 도렌은 말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드낙과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단장님만 말을 놓으라는 소리지요. 다른 용병들이 보면 똥폼 잡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드낙의 눈이 도렌으로 옮겨졌다.
“전 상관없습니다.”
드낙은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좋다.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네.”
“역시 단장님.”
“그래도 나이가 많은 용병이 오면 대우도 해줘야 하니 무조건적으로 반말을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예. 알겠습니다.”
〈단장에 대한 위엄을 걱정〉하는 이스핀의 질문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는 앞으로의 용병영입, 규모에 대해서 궁금했는데 공금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들었기에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었다.
‘출세에 대해서는 드낙 단장님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저··· 단장님. 그럼 앞으로 용병 의뢰는 어떤 식으로 하실 겁니까? 전처럼 용병들이 집어서 가져오실 겁니까?”
“아니. 내가 정한다. 그때는 정말 절박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소문이 퍼진다면 〈추적 용병단〉에 오고 싶어 하는 용병들이 제법 있을 거다. 8명이든 10명이든 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의뢰 가져오면 가려내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
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스핀은 말하지 않은 자신들의 향후 위치에 대해서 물었다.
“저희들은 이대로 계속 단원으로 활동하게 됩니까?”
이스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여간 눈치라곤 요만큼도 없는 놈이었다. 많은 사람을 거치지 못해서 그렇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답답했다.
“생각 중에 있다.”
드낙은 확답은 주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스핀과 도렌의 나이 때문이고, 그들은 다른 평범한 용병만큼 실력이 좋아졌지만 영입될 용병의 수준이 어떨지 모르기 때문이다.
“저희들은 갈 곳이 있는데, 단장님은 어찌하실 겁니까?”
“여관이라도 하나 잡을 생각이다.”
메르인의 집에서 자신의 물건들을 되찾아서 여관을 잡아놓고 집을 구매할 생각이었다. 그 말에 도렌이 제안을 해왔다.
“그럼 저희 집에서 지내시겠습니까? 제 방에서 함께 주무시죠. 괜히 여관 가서 돈 쓰지 마시고요.”
“가족들이 많을 텐데···”
드낙의 말에 도렌이 손사래를 쳤다.
“단장님을 어떻게 내쫓겠습니까?”
그 말에도 드낙은 고개를 저었다. 무려 8남매가 있는 곳이었다. 얼마나 복작복작 거릴지 벌써부터 머리가 띵했다. 그 거절에 도렌이 제법 실망한 모습에 드낙이 웃었다.
“언제 한 번 가서 저녁 식사라도 함께 할게.”
“정말입니까?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집을 구하면 바빠질 것 아닙니까?”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것 없었다. 조용히 있는 이스핀에게 드낙이 말했다.
“너도 와라.”
“예? 저는 시끄러운 건 별로라.”
내빼는 이스핀이었지만 그리 강하게 내빼지 않았다. 척 봐도 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드낙이 한 번 더 말하자 이스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은 자신한테 맡기라고 말했다. 단번에 말하는 것을 보니 그 본심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드낙은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다음에 메르인의 집으로 향했다. 메르인의 집은 텅텅 비어있었기에 재회를 할 수는 없었다. 약속된 곳에 있는 열쇠로 문을 열고 자신의 짐을 챙겼다.
여관방을 잡고 그대로 드낙이 몸을 누웠다.
‘미끼는 걸었다.’
보통 미끼가 아니다. 이제는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