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8 <-- 강도들의 VIP -->
저벅. 저벅.
병사가 안내를 했고, 드낙이 뒤를 따랐다. 뒤통수로 환희에 찬 술자리에서의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거기서 벗어나기도 전에 이미 술이 깬 드낙은 굳은 얼굴로 병사의 뒤를 따라갔다.
‘뭐지?’
온갖 생각을 다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군막의 천이 병사의 팔에 의해서 올라가자 사라졌다. 생각 많은 표정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생각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렸을 뿐이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드디어 왔군. 자리에 앉게.”
드낙이 자리에 앉았다. 게실리안 지휘관은 테이블 중앙에 술잔을 놓았다. 그리고 술을 천천히 따르자 드낙이 술잔을 손으로 잡았다.
쪼르륵.
이상하리만치 적게 술을 따르는 모습에 드낙이 긴장했다. 무언가 의도를 품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게실리안 지휘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어디 가문인가?”
드낙이 어깨를 들썩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은 화살처럼 심장에 있는 〈양심〉을 쿡하고 찔렀다. 이미 자신이 어떻게 기사의 비전을 배웠는지 그 모든 〈거짓〉이 찔린 것 같아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어깨의 들썩임은 게실리안 지휘관에게 확신을 주었다. 보통 기사와 인연이 없는 용병들은 〈영문모를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드낙은 그야말로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발뺌을 빼자 게실리안 지휘관이 드낙의 손을 잡아서 엄지와 검지 사이, 정확히는 검지의 옆부분에 있는 굳은살을 드낙에게 보여주었다.
“굳은살이 기사다운 굳은살이라고 말씀하고 싶습니까?”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드낙과는 다르게 게실리안 지휘관은 킬킬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드낙이 스스로 정답을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사의 비전은 기술이 대단하지. 하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수련양이 필요한 법이네. 재능이 뛰어난 자라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비전을 연마하다 보면 생기는 법이지.”
“······!”
“그것을 〈특징적인 굳은살〉이라고 말하네. 대부분의 기사 가문이 알고 있는 것인데, 모르는 것을 보니 사정이 있어 보이는군.”
‘맙소사.’
드낙은 끔찍한 사실을 마주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기사의 비전〉을 연마했다고 알고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드낙의 얼굴이 흙빛이 되자 게실리안 지휘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있는 이야기지.’
몰락한 가문, 조용히 살다가 비전에 대한 것을 알고 연마를 하고 세상으로 뛰쳐나온 젊은 기사. 힘을 가졌지만 지켜주는 세력이 없어서 이용만 당하다가 피를 뿜으며 객지에서 죽어버리는 자유 기사들.
수많은 미담을 만들어내는 자유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곳곳에서 다양하게 접할 수 있지만 그들의 끝은 누구의 입을 통해서도 말해지지 않는다.
게실리안 지휘관 또한 그런 기사들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용하지 않는 놈이 없었다. 그만큼 자유기사는 등쳐먹기에 좋은 자들이었다.
‘〈토벌전〉에 기사가 한 명 더 선다면···’
그것도 출세욕이 강한 기사다. 수십 닢의 금화를 통해서 온갖 마법 물품을 둘둘만 기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당백은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 어디 가문인가?”
드낙이 말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
“···망한 가문입니다.”
그 말에 게실리안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가문이 내세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정도로 똑 부러지다니, 되려 호감이 생겼다. 또한 드낙이 강도 31명을 포획해서 온 것도 그 신뢰를 뒷받침했다.
이미 검증된 무력만큼 써먹기 쉬운 것이 없었다.
웬 듣도 보지도 못한 동네 빵집보다는 그래도 프랜차이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 드낙 강도 31〉은 〈베스킨 라빈스 31〉이나 다름없었다. 믿음이 갔다.
“절 부른 이유가 정확히 뭡니까?”
이곳에 오래 있고 싶어 하지 않은지 드낙이 바로 본론을 물었다.
“출세를 위해서 나왔다면,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어떤가?”
게실리안 지휘관은 본론을 꺼냈다. 아주 매력적인 말이었다. 〈남부 왕국〉의 몇몇 가만히 있어도 공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다. 비록 기사 하나 데리고 오지 않았지만 〈파이룬 가문〉은 제법 걸출한 집안이었다.
‘귀족의 신하가 될 수 있는 기회!’
드낙이 동요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층민은 동화를 가지고 놀며 은화를 꿈꾸지만 귀족은 금화를 굴린다. 시세가 일정하다고 쳤을 때 동화 십만 개가 금화 한 닢이었다. 물론 동화 십만 개를 가져간다고 해도 금화와 바꿀 상인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만큼 귀족은 강력하다. 그리고 귀족보다 강한 것이 〈귀족 가문〉이었다. 그 울타리 안에 단번에 뛰어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드낙에게 찾아온 것이다.
‘아쉽다. 나는 그곳으로 향할 수 없다.’
이 가문, 저 가문. 뒤섞인 비전을 가졌기 때문에 기사들과 귀족들과 함께하면 함께할수록 밑천이 드러나며 의심이 꽃피워질 것이다. 작은 의심도 아니게 될 것이기에 출세길이 막히거나 되려 큰 화를 입을 수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드낙의 미묘한 표정은 보통 사람이라면 읽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귀족이자 야망을 가진 게실리안 지휘관은 그것을 읽어냈다.
사람을 다루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던 게실리안 파이룬이었다. 불과 27세에 지휘관이 된 자였다.
‘사정이 제법 깊나 보군. 아쉽다.’
그 또한 아쉬움을 느꼈다. 우물이 깊을수록 물은 맑고 시원하기 마련이다. 드낙이 가진 밑천이 더욱더 깊어 보였다. 드낙은 우물쭈물했다. 귀족의 말을 거절하기에도 뭣했고, 그렇다고 의견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민낯이 드러난다.
“하하. 이거 보면 볼수록 제법이군. 자네에게 권유한 것은 내가 잊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드낙이 목례를 하자 게실리안의 기분이 좋아졌다. 제법 〈충성〉을 아는 자였다. 드낙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 해도 까이고, 저 말해도 까이는 개 같은 군대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실언을 했을 것이다.
때로는 그저 입을 다문 채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점수를 딸 수 있고,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선임의 분노와 장난, 화풀이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그에 맞춰주는 것도 빠르게 그 기분을 해소시켜주는 것도 하나의 생존법이었다.
언제나 을(乙)이었던 현대 사회의 고된 삶이 이곳에서는 큰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계획하고 있는 〈토벌전〉에 한 번만 참가해주길 바란다.”
부탁조였지만 실상은 타협이나 다름없었다. 거절하면 게실리안 지휘관은 억지로라도 역정을 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비합리적이었으나 게실리안은 한 번을 물러섰다. 이제는 드낙이 물러서야 할 때였다.
“당연히 도와드리겠습니다.”
냉큼 받아들었다. 개처럼 꼬리를 살랑거릴 정도였다. 드낙은 게실리안 지휘관과 적당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만족하는 것이 자신의 안전과 함께 얻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더 가까이 가다간 화상을 입을 것이다.’
“좋군. 아주 좋아.”
그가 근엄하게 말하며 〈토벌전〉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해주었다. 이미 드낙도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드낙은 매우 신중하게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그대는 〈추적 용병단〉의 이름으로 이번 토벌전에 동원될 것이네.”
드낙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아까와는 대조적인 몸짓이었다. 그 모습에 게실리안 지휘관은 자신의 의중을 단번에 읽어낸 드낙의 수준에 놀라워했다.
‘제법이구나.’
자신이 공을 크게 세워도 그것은 용병단의 이름으로 여겨져서 낮게 고쳐질 것이며, 게실리안 지휘관의 공이 될 것임을 돌려 말한 것을 단번에 알아들은 것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몸으로 하는 언어에 약하다는 점이었다.
‘열다섯임을 고려했을 때 대단한 재목인 것 같은데.’
“결혼은 했나?”
“예? 결혼··· 말씀이십니까?”
“비록 가문의 5녀지만 제법 똘똘한 여동생이 있네. 수도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
드낙은 아주 크게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여자를 경험하지 못한 이로 보게 만들었고, 게실리안 지휘관의 광대뼈가 크게 튀어나오며 입을 히죽거렸다.
“열다섯이면 결혼도 할 나이인데. 아직도···”
“제가 뜻이 있어서 그전까지는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럼 별 수 없지만.”
그는 빠르게 단념했다. 이미 놓아준 새였고, 그냥 해 본 소리였다.
“언젠가 갈 곳 없으면 우리 가문으로 오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드낙의 말에 게실리안이 한 번 더 말했다.
“빈말이 아니네. 아무튼 이번 토벌전에서도 큰일을 해주었으면 하는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드낙은 이미 게실리안의 가신처럼 굴었다.
“〈토벌전〉의 의뢰비는 은화 1닢으로 하겠네.”
일반적인 의뢰비였다. 그것으로 게실리안 지휘관과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족쇄가 차여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드낙은 나오자마자 가죽 장갑을 꺼내서 손을 가렸다. 앞으로 밖에서 함부로 손을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빌어먹을. 〈특징적인 굳은살〉이라니? 굳은살로 기사를 구분하는 게 말이 돼?’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그 구분법은 아무나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렇기에 알아차리기도 힘들었었다. 이제야 깨닫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드낙은 〈전쟁상인 판파넬〉과의 일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용병 단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토벌전에 뛰어들었을 때, 적당히 다른 말을 섞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게실리안 지휘관의 부름을 받았으니 변명거리로 충분했다.
다음 날에 군막에서 깨어난 이스핀과 도렌은 인상을 가득 찡그렸다. 드낙이 냉수를 퍼놓은 것을 두 사람이 나누어서 마셨다.
“끄으···”
숙취가 끔찍했다. 아침 식사도 하지 못한 채 과일을 먹는 것으로 배를 적당히 채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도렌은 그것도 못해서 안에 것을 게워냈다.
점심때가 지나서야 〈추적 용병단〉은 작전 회의를 할 수 있었다.
“어제 게실리안 지휘관이 나에게 의뢰를 줬습니다. 제법 위험한 임무인데, 상대가 귀족이라서 거절하지도 못했습니다.”
귀족을 운운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이스핀과 도렌은 인상을 찌푸려도 감히! 귀족을 뒷담하지 못했다. 괜히 물만 마셨다.
“제법 큰 〈토벌전〉입니다. 산채를 토벌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갔었던 〈남부 황금 평야〉의 길목에 있는 모종의 상단을 토벌하는 것입니다.”
“상단이요?”
도렌의 반문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도들의 약탈품을 사들이는 놈들이 있다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의 임무는 뭡니까?”
그 말에 드낙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놈들을 찾아내는 일이죠. 싸우는 것은 병사들이 할 것입니다.”
추적하고 기습하는 것에 제법 익숙해진 용병 단원들이었다. 고작 두 명뿐이지만 든든했다.
〈토벌전〉의 시작은 앞으로 3일이 남았다. 그 사이에 드낙은 두 사람을 단련시키며 하루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