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0 <-- 세파리아스 불파겐 -->
〈세파리아스 불파겐(Sepharias Bulpagen)〉를 보며 드낙이 이죽거렸다. 그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검은 문〉은 항상 보상을 약속했고, 그는 그것을 받아왔다. 이번 같은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검은 꿈과 드낙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가문의 복수라도 할까요? 후손 찾아서 돌봐달라는지 그런 겁니까?”
세파리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런 머저리가 아니야. 가문의 명운(命運)은 후대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 그리고 내 후손들의 밥을 내가 왜 챙겨줘야 하나?”
그는 똑 부러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드낙은 그것이 의외였다.
“보통 자신 때문에 무너진 가문이라면 더욱 책임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죽은 자가 나타나서 도와주라고 해서 왔다고 말한다면 자신감에 큰 상처를 입겠지. 자신들을 믿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존심 높은 기사답게 생각마저도 기괴했다. 드낙이라면 당장 조상님이 나타나서 흙수저로 사는 것이 힘들어 보인다며 로또 번호를 알려준다면? 어이구나, 좋다고 로또를 구매할 것이다.
‘기사를 처음 봐도 어떤 놈들인지 단번에 와닿는군.’
자존심. 명예. 심하게 말하면 가오를 잡는데 목숨을 허비하는 것들로 보였다. 하지만 결코 멍청하지 않다는 것이 중요했다.
“근데 왜 반말을 하십니까?”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쿨하게 대답했다.
“나는 모함당해 죽으면서도 백작위를 빼앗기지 않았다. 너의 계급은 무엇이냐.”
“······ 그게 중요합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훈작이라도 된다면 대우를 해주지.”
철저한 계급 사회. 기득권층이었다. 드낙은 반박하지 못했다. 뒷머리를 긁을 뿐이었다. 민주주의? 비웃음을 살 것이다.
“저도 반말해도 됩니까?”
“안 된다. 너는 평민이지 않느냐.”
“싫은데. 어차피 죽은 몸 아니냐? 무슨 계급이 중요하냐.”
드낙은 몇 마디를 섞었다. 노발대발하는 세파리아스는 제법 볼만했다. 결국 제풀에 지친 것은 드낙이었다. 현대인은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은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다.
그 습관은 이번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웅다웅 거리는 것을 손으로 들어 중지시켰다.
“좋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오우거 사냥(Oger Jagd, 오거 야크트)〉이라고 불리는 비전이 있다.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일인 전승의 비전이다. 그것을 불파겐 가문의 생존자에게 전해주었으면 한다.”
“왜 전해주지 못했죠?”
“누구나 탐했기 때문이지. 나와 가문 사람들은 독대를 할 수 없었다. 모든 이들이 오거 야크트를 원했다. 그것은 영주도 마찬가지였지. 어차피 죽을 가문이라면, 그 비전을 얻는 것이 이득이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드낙이 그 단호함에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백작 가문의 일인전승의 비전. 그것을 알려주지 않고 죽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어떤 감정의 동요 하나 없었다.
“그 결정을 지금도 후회 안 합니까?”
“기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항상 피를 묻히고 다니기 때문이지. 단호함은 자신을 잡아먹을 때도 있지만 적어도 거침없는 삶을 약속해주지.”
“어떤 비전입니까?”
“말 그대로, 인간이 오우거를 죽이기 위한 검술 비전이다. 몇몇 가문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하지 않지.”
“불파겐 가문의 오우거 사냥은 완전합니까?”
“완벽하기까지 하지.”
웃음소리가 세파리아스에게서 흘러나왔다. 되려 드낙도 기분이 좋아졌다.
“당연히 저에게 가르쳐주셔야 하는 것을 아시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손가락을 올려 조건을 가졌다.
“다른 이에게 전수하지 말 것.”
“예.”
그 정도는 지킬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간단하게 말할 것이 아니다. 오거 야크트는 누구나 탐내는 비전이다. 사용한다면, 위험에 빠질 수 있지.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제법 어려울 것이다.”
드낙은 그 말에도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남자 세파리아스의 단호함을 직접 마주하고 순식간에 쿨내나는 마초남이 되어있었다. 심적으로 세파리아스의 언행에 감화가 된 것이다. 그만큼 그의 언행이 매력적이었다.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생존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르지. 애초에 나는 갑자기 눈을 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지.”
드낙이 당연히 화를 냈다.
“아니,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언제 생존자를 찾습니까? 못 찾을 확률이 더 높지 않습니까.”
“아마 〈남국령(南國領)〉을 벗어나 중앙제국에 있을 것이다. 기사 가문의 하나겠지. 불파겐이라는 이름을 쓸지는 모르지만, 붉은 머리카락에 녹색 에메랄드의 기사를 찾아라.”
‘이런 씨.’
정보화 시대에 살았던 드낙에게는 미친 소리로 들렸다. 까마득한 세월이 걸릴지도 몰랐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간다? 드낙의 〈풍족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기사가문이 아닐 수 있었고, 기사가 아닐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가 존재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세파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그래서 나도 걱정이었지. 고민을 해보니 답이 보였다. 〈영혼의 계약〉을 한다면 너도 좋고, 나도 좋을 것이다.”
“그게 뭡니까?”
드낙은 불길함마저 느꼈다. 마치 십년지기가 술자리에서 보증서가 든 것처럼 보이는 황토색 종이 서류철을 꺼낸 것 같은.
“이 공간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서로에 대한 약속이지.”
“어기면?”
“좋은 꼴은 못 보겠지.”
세파리아스가 대꾸했다. 그도 잘 몰랐다. 그저 표면적으로만 알뿐이었다. 마치 현대인이 스마트폰의 구조를 모르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같았다.
드낙은 미심쩍었다.
“내가 그걸 왜 해야 합니까? 애초에 중앙 제국까지 제가 가기도 싫은데.”
“너에게 미리 대가를 주는 것이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받을 수 있지.”
“그것은 정확히 어떤 겁니까?”
세파리아스는 조금 생각했다.
“골격이 조금 커질 수 있겠지. 너와 나는 제법 차이가 나니까. 머리 두 개쯤 나던가.”
“머리 하나쯤이라고 하시죠. 제가 그렇게 키가 작은 것도 아닌데.”
“아니야. 머리 두 개쯤 차이가 났어.”
세파리아스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힘도 보통 인간보다 조금 강해지겠지.”
“어느 정도로요?”
“밀 한 포대는 더 짊어질 수 있겠지.”
그 외에도 많은 것을 세파리아스의 퀘스트를 받으면 얻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드낙에게 흡수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죠?”
“말해줄 수 없고, 나도 잘은 모른다니까. 그런 건 마법사나 사제에게 가서 따져라. 나는 기사다.”
드낙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얻을 것과 잃을 것을 정리했다.
‘잃을 것.’
그것은 시간이다. 많은 시간을 버릴 것이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이들이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에서 죽기 때문이다. 외지인에 대한 경계는 물론이고, 배고픈 마을은 강도로 변할 것이다.
용병단을 창설해서 가도 똑같았다. 결국에는 수많은 문젯거리가 나타날 것이다. 또한 똑같이 시간을 허비할 것이다.
‘오래 살지도 못하는데.’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에서 마이너스 요소가 큰 것이 이번 불파겐 가문의 퀘스트였다.
‘얻는 것.’
당연히 육체적인 성장이었다. 세파리아스의 골격을 닮아간다는 말을 직접 그가했기 때문에 크게 저울질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골격이 크다는 것은 더 많은 체중을 가진다는 뜻이고, 더 큰 힘을 뜻했다.
‘그의 기술.’
선명한 궤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밀도가 높은 검의 정확도. 수십만 번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얻은 기술의 정수. 투구의 눈구멍을 정확하게 찌를 정도였다. 물론 그 정도까지는 얻지 못할 것이다.
언데드가 된 세파리아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완벽한 기술〉의 습득이 아니었다. 그것을 그에게 옮겨가면서도 흩어지는 것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저 알뿐이다. 이 공간에 들어섰을 때부터 알게 된 것이다.”
드낙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비전은 오우거 사냥을 가르쳐주는 게 전부입니까?”
그가 손가락을 올렸다.
“골격을 포기하면 비전을 하나 더 알려줄 수 있다.”
“괜찮습니다.”
〈기사의 골격〉 〈보다 정밀한 검술〉 〈오거 야크트(Oger Jagd, 오우거 사냥)〉.
이렇게 세 가지가 세파리아스가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퀘스트를 받으면 바로 얻는 것이죠?”
“그래.”
드낙은 심호흡을 했다.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매력적이었지만, 먼저 계획부터 세워봤다.
‘만약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불파겐 가문의 생존자를 찾을 것인가.’
그것부터 그려놓고 판단을 해야 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용병?’
미친 소리도 정도가 있었다. 중앙제국으로 향할 용병단을 꾸렸다면 이미 드낙은 한몫을 단단히 잡았을 것이다. 용병들의 충성도가 매우 높을 것이 분명했다.
‘그냥 제국으로 가서 시작할까?’
여행 가다가 죽을지도 몰랐다.
‘내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가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포기?’
그건 아니었다. 세파리아스가 바로 보상을 주는 형식으로 3가지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내서 찾으면 되는거 아니냐?’
가장 합리적인 것은 실력 있는 심부름꾼을 〈중앙 제국〉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아니라도 오년, 십년을 들어서 차근차근 과정도를 올려 안전한 방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년도 생각하지 못하는 이곳의 사람과는 다르게 드낙은 계획적으로 십년을 내다볼 수 있었다.
“하겠습니다.”
“좋군.”
세파리아스가 서있는 곳의 뒤에 있는 검은 문이 쩍 열리면서 검은 연기를 토해내서 모든 것을 뒤덮었다. 드낙은 몸의 관절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버둥거리며 일어났다.
“으그극.”
뼈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프다고 생각한 순간 현상은 사라졌다.
지끈.
그다음에는 머릿속에 오거 야크트의 모습과 동작, 과정이 모두 들어왔다.
‘엄청난 비전이군. 오우거를 잡는 검술서라.’
대단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위협을 견뎠는지 절로 감탄이 나왔다. 드낙은 몸이 달아올라서 해가 뜨자마자 마당에서 검을 휘둘렀다.
‘정밀도.’
자신이 원하는 곳에 그 어떤 체형으로도 도달하는 롱소드를 보며 가슴이 쿵쿵 뛰었다. 순식간에 한 단계 높이 올라섰다. 매일 최소한의 단련이라도 하는 드낙이었기에 확실하게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아쉽다.’
하지만 드낙은 이내 롱소드로 고개를 돌렸다. 길이가 1.3m인 롱소드는 한손으로 운용이 가능했지만 사실상 양손 무기나 다름없었다. 〈원형 방패〉와 궁합이 좋지 않았다.
‘들고 다니긴 하겠지만, 상대가 원거리가 있다면 자주는 못 쓰겠군.’
아침을 먹고 메르인과 융은 흩어졌다. 그들은 드낙을 영입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드낙에게 잘해주고 있었다. 먹는 것에도 돈을 안 내는 이유였다. 드낙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용병단〉을 꾸리려고 하고 있었다.
오늘은 〈애송이〉를 품에 넣더라도 뭐라도 할 생각을 가졌다.
본래는 〈검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야 했지만, 마음이 바뀐지 오래였다. 욕심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