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9 <-- 세파리아스 불파겐 -->
접전이 벌어졌다. 드낙은 자신의 비전을 보다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서 빈틈을 만들려고 했고, 세파리아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싸움에서 드낙이 한 수 접어줘야 했다.
‘빌어먹을. 아무리 기사라 하지만!’
실금을 치듯이 투구의 눈구멍을 살짝 긁고 지나갔다. 다행이라면 눈까지는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리치가 짧았다.
그것은 드낙의 회피가 잘 되어서가 아니었다.
세파리어스 자신이 스스로의 간합을 착각하고 있어서였다. 근육과 살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라 뼈로만 되어있었기에 생전의 간합은 소용이 없었다. 그것보다 줄어들어있었다.
[운이 좋군.]
검술의 영역에서 세파리아스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드낙이 확실하게 깨달은 공방이기도 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드낙이 결국 꼿꼿이 균형을 잡고 틈 하나 없는 세파리아스에게 비전을 사용했다.
기사 〈세드릭 제라드(Cedric Gerald)〉가 모함당해 죽은 세파리아스 불파겐을 위해 벽화에 있었던 〈위엔 피에드(Wie ein Pferd, 가벼운 말처럼)〉의 어레인지 〈스트룸 라우치(Sturm rausch, 폭풍 돌진)〉가 드낙의 몸을 통해서 토해졌다.
타다닷!
경쾌한 발놀림. 마치 복서의 움직임을 연상시키게 했지만 그것보다 더욱 폭발적이었다. 방어구와 무기 그리고 방어구의 무게 때문이었다. 체중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경쾌함을 위해서는 더 큰 힘을 내야 했다.
그것은 말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황소의 뒷다리가 내는 것처럼. 폭발적인 근육은 로켓엔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매우 작은 보폭으로 연달아서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착실하게 이동하면서 균형에 대한 힘을 크게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달린다는 것은 곧 균형이 쉽게 무너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위엔 피에드는 4발로 달리는 것처럼 경쾌한 발놀림을 통해서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앞뒤로 좌우로 사용할 수 있었다.
“흡!”
좌에서 우로 순식간에 움직이는 움직임 속에서도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정확하게 상단으로 올린 롱소드를 통해서 자신의 비전을 사용했다.
〈할스 아우스푸렁(Hals Ausfuhrung, 목 처형)〉.
롱소드가 정확하게 원형 방패를 내려쳤다. 좌우로 급격하게 움직이는 그 순간 속에서 이루어진 기술의 정수였다. 말도 안 되는 명중률. 마치 옆으로 휙 지나가는 테니스볼을 나무 막대기 하나로 내려쳐서 떨구는 수준이었다.
기술의 정수.
텅!
그럼에도 드낙이 우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사용한 할스 아우스푸렁, 목처형의 비전 자체가 가지는 맹점이 나타났다.
롱소드는 중세시대에 체인메일을 〈찢어발기는〉 수준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가장 대중적인 무기였다. 대중적이라 함은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롱소드를 사용했다는 뜻이었다.
목 처형은 그런 롱소드의 파괴력을 통한 비전이었다. 상대의 방패를 내려치고, 가드를 강제로 뜯어버려 그다음에 목을 취하는 단순 무식한 내려치기였다. 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 좌우로 폭발적으로 움직이는 상대의 원형 방패를 타격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완만한 곡선을 이르고 있는 원형 방패는 아무리 강하게 내려쳐도 빗겨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 타격음이 크게 들린 것만으로도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하압!”
‘힘이 적다! 지금이 기회다!’
그러나 그의 몸은 오직 뼈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강한 힘을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드낙이 그대로 방패로 세파리어스의 상체를 거세게 후려쳤다. 갈비뼈가 부서지며 흩날리는 와중에도 세파리어스의 하체는 〈습관〉대로 움직였다.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 높이를 낮추었다. 키가 큰 사람보다 작은 사람이 흔들거림에 더욱 수월하게 버티는 것과 같았다. 접혀진 무릎 속에서도 반격을 도모했다. 골반이 휘어지며 상대적으로 숏소드의 반대편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긋!
드낙의 숏소드가 그대로 목의 옆을 긁으면서 지나갔다.
‘상체를 후려쳤는데도 무너지지가 않다니!’
롱소드가 드낙의 어깻죽지로 찔러졌다. 맞는다면 그대로 원형 방패를 떨굴 것이다. 하지만 세파리어스의 회심의 반격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덜그락!
갈색 늑대 도노가 단번에 척추를 물었다. 안쪽의 어금니까지 잔뜩 들어가게 해서 물었다. 그대로 세파리어스가 휘청거렸다. 앞에서는 드낙이 힘을 주고 있었고, 옆에서 도노가 들이닥치면서 몸의 균형이 완전히 비틀렸다.
샥!
어깨 가죽 갑옷이 격하게 찢어지며 피가 튀었다. 드낙은 양손의 무기와 방패를 버린 채 그대로 손으로 우악스럽게 세파리아스의 머리와 부서진 갈비뼈 안쪽의 척추를 잡고 바닥에 넘어졌다.
퍽! 퍽! 퍽!
박치기를 해대었다. 투구가 크게 흔들리며 시야를 확인할 수 없었다. 롱소드가 드낙을 쳤지만 형편없는 파괴력이었다. 주먹을 쥔 세파리어스의 왼손이 아래턱을 쳐도 소용없었다. 생각보다 팔 힘이 대단하지 않았다.
버틸만했다.
“우아아아아!!!”
그 사이에 늑대 도노는 팔의 관절을 고개를 털어서 뜯어내고, 다른 곳으로 휘릭하고 드낙의 머리 위를 타고 넘어가서 남은 팔 또한 뜯겨냈다.
“헉! 헉! 크윽!”
두개골과 부딪치는 감각이 크게 사라지자 드낙이 그제서야 물러났다. 투구를 고쳐잡았다. 개박살이 난 두개골이 보였다.
꼴깍.
침을 삼키고 어깨를 확인했다. 가죽으로 보호되는 부분이었음에도 피가 샘솟고 있었다.
‘젠장할.’
어깨를 잡은 채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언데드 기사는 서서히 무너지더니 뼈가 모두 가루로 변했다. 소복한 가루는 아래에서 흐르는 바람에 의해서 사라져갔다. 남은 것은 롱소드 한 자루와 헤진 기사복이 전부였다.
드낙은 가장 먼저 응급치료를 했다. 물이 든 가죽 주머니로 꼼꼼하게 피를 씻어내고, 약초를 발라 상처 구멍을 막았다. 실과 바늘을 이용해서 꿰매었다.
“아흐윽.”
미치도록 통증이 심했다. 자신이 직접 자신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만큼 아픈 것이 없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치료했다면 이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늘로 상처 부위를 찌를 때마다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팅팅 부운 봉합된 곳에 술을 조금 뿌렸다.
“으흐으!!으으윽!!”
눈을 질끈 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다음에 약초 다진 것을 뿌렸다. 마비가 되는 것이었기에 수십 초 내에 드낙이 평온을 되찾았다. 붕대로 꽁꽁 감았다. 이빨로 물어서 별 짓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능숙했다. 혼자서 제법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검은 산골 마을〉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는 곳이라서 〈붕대 감는 연습〉까지 재밌었다.
‘약간 상황극도 좀 넣고.’
그때는 그랬었다. 상처를 치료하고, 롱소드와 기사복을 챙겼다. 제법 좋은 품질은 아니었지만 드낙에게는 꼭 필요했다. 누군가가 비전에 대해서 묻는다면 증거품이 될 수 있었다. 롱소드는 성능만으로도 능히 드낙의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보여준 〈엘라스티쉬 제스트렁(Elastisch Zerstorung, 탄력적인 파괴)〉은 오직 이 롱소드를 통해서만 쓸 수 있어 보였다. 그만큼 큰 특징을 지닌 검이었다.
‘명검인가? 그럴지도.’
주변에 자욱하게 끼어있던 검은 연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드낙은 묘지를 조금 더 면밀하게 조사했지만 무엇 하나 나오지 않았다.
금반지와 은장신구 10개. 한 방에 은화 130닢의 가치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락손은 왜 세파리아스의 관을 열지 않은 것일까.’
비전에 눈이 크게 뜨여서 문양의 문을 벽인 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비전을 가르쳐 줄 때마다 혼자 생각해낸 〈설정〉들을 말해주며 얼마나 좋아했을까.
‘개새끼.’
욕을 강하게 한 드낙이 락손의 비전서를 〈기사의 묘〉 밖에서 그대로 장작을 모아서 불태웠다. 속았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락손이 진실을 이야기했다면···
드낙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여지를 주려는 약한 자신을 더욱 깊은 곳으로 내몰았다.
롱소드는 검집이 없었기에 여분의 옷으로 둘둘 말아야 했다. 검문은 어렵지 않았다. 용병패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검 손잡이의 가드 부분에 문양이 있었지만 평범한 롱소드와 다를 바가 없어서 병사는 책을 잡지 않았다.
애초에 완벽할 것 같았던 검문이라도 오는 사람이 많아서 큰 것만 보는 습관이 생기는 것이 〈횃불 성채〉의 검문이었다. 특히 드낙은 〈머리통 용병단〉 융과 연관이 있어서 기억하는 병사도 있었다.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드낙이었기에 기억하기가 수월한 것도 있었다.
저녁 전에 돌아온 드낙은 두 사람을 기다리며 〈외성지역〉의 외곽에 있는 메르인의 집에 딸린 작은 마당에서 단련했다. 상처를 입은 팔은 제외하고 다른 몸만 운동했다.
“오늘은 일찍 도착했네.”
메르인이 피곤한 표정으로 먹을 것을 든 채로 말했다. 드낙은 자연스럽게 메르인의 짐을 들어주었다. 엄마의 파워가 강했던 집안에서 누나만 2명이었던 박호훈이었다. 여성을 배려하는 것이 정신에 배어있었다.
“어, 고마워.”
“별말씀을.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누가 들어오나 봐?”
“한두 명이 제법 관심을 가지더라고. 올지는 모르지. 〈현상금 사냥꾼〉은 위험하다고 여겨져서. 자신 있는 놈도 꺼려 하거든.”
메르인은 또 하나의 정보를 드낙에게 주었다. 그렇기에 드낙은 융이 자신을 영입하려고 제안을 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경험이 적어도 제법 평균 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드낙이었다. 스스로 겸손함도 있고, 사회성도 좋아서 분란이 적다.
용병대장에게 있어서 드낙은 무리 없이 등용시키기에 좋은 용병이었다.
술까지 가져온 것을 보니 영입하려는 용병에게 술 마시자고 말한 듯했다. 하지만 〈현상금 사냥꾼〉이 가지는 압박감이 상당했는지 융이 오고 나서 저녁 준비가 다 되었음에도 오는 이 하나 없었다.
“원래 이렇게 영입이 힘드나요?”
융은 고개를 으쓱했다.
“그때, 그때마다 다 다릅니다. 그냥 저희 용병단에 오시죠. 한두 번으로 용병단의 생리를 알기란 힘든 것 아닙니까?”
드낙이 피식 웃었다. 오늘의 식사 또한 빚이었다.
“내일은 〈애송이〉라도 넣어서 뭐라도 할 겁니다.”
“꼭 그러길 바래.”
융이 술잔을 들어 올리자 다른 두 사람도 들어 올렸다.
“드낙의 성공적인 성공을 위해.”
드낙이 냉큼 일어났다.
“용병단의 빠른 영입을 위해.”
웃음소리가 집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절대로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았다. 현상금 사냥꾼의 비애였다. 드낙 또한 적당히 술을 즐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융의 제안은 고맙지만, 그의 밑에서 활동하고 싶지는 않아.’
그의 성향, 행동을 봤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잠에 빠져든 드낙은 〈검은 꿈〉을 꾸었다.
바닥에 잠겨진 오른팔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만 나와있었다. 검은 문은 많지 않았다. 아니, 오직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크크. 드디어 왔군. 기다리다 지치겠다.]
“〈세파리아스 불파겐(Sepharias Bulpagen)〉···”
검은 문의 앞. 검은 연기가 풀풀 빠져나오는 곳에서 우뚝 서있는 기사가 보였다. 그것은 〈기사의 묘〉에서 봤던 해골 기사가 아니었다. 생생하게 생기가 감도는 구릿빛 피부를 하고 있었고, 붉은 피처럼 색채가 짙은 적발(赤髮)이 어깨까지 내려와있었다.
에메랄드색 눈동자는 구릿빛 피부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색이라서 인위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다부진 체격. 가슴과 다리에 있는 두꺼운 중갑과는 별개로 양팔은 가죽 보호구였다. 목의 흉갑으로부터 내려오는 〈불파겐 가문의 문장〉이 굵은 울에 그려져서 쭉 내려가서 흔들렸다.
“어떻게?”
[그것은 말해줄 수 없다. 내 힘을 원한다면 너에게 주마. 하지만 대신해줄 것이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본론을 들어가는 기사를 보며 드낙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검은 문을 통해서 능력을 얻어야하는데 이번에는 달랐기 때문이다.
‘골치아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