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6 <-- 횃불 성채 -->
“이 물건은 여기에 놓는 게 아니잖아! 대체 누구야!”
〈횃불 성채〉의 외성벽 안쪽에 있는 〈외성지역〉. 그곳에서 서쪽 외곽에는 창고와 상회들로 가득했다. 그중 독을 뿜어내는 반질반질한 용비늘을 가진 황소의 모습이 그려진 〈고르곤 상회〉의 건물 앞에는 노발대발하는 수염을 잔뜩 기른 뚱뚱한 중년인이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척 보아도 다혈질로 보였다.
〈상인 베베닉〉은 직원을 나무랐다. 양피지를 흔들어대었다.
“기사의 검이랑 용병의 검이랑 구분 하나 못해? 대체 뭘 한 거야! 똑바로 하는 게 뭐야!”
직원은 고개를 숙인 채 사과하기 바빴지만 결국 뺨을 한 대 맞았다. 씩씩 거리는 베베닉이 양피지를 던져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은 양피지를 줍고, 서둘러 기사의 검을 챙겼다.
걸어가면서 그 장면을 본 드낙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말 그대로 보스(Boss)가 따로 없었다. 리더(leader)는 아니었다.
“설마 저곳은 아니겠죠?”
드낙의 말에 융과 메르인이 속으로 웃었다. 〈망한 기사 가문〉의 자식답게 명예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기사의 힘은 정말로 대단하다. 그래서 모두가 그들을 존중한다. 대부분의 기사는 사사건건 정직하기에 매번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너무 티가 나는데.’
‘한 소리 해줘야 하나?’
폭행은 어느 곳에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부모의 폭행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프랑스는 지금조차도 좋은 훈육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마저도 이러한데 판타지 세상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당장 횃불 성채를 걷다 보면 길에서 벌거벗긴 채 벌을 서는 아이를 종종 본 드낙이었다. 그것에 남녀의 구분 따위 없어서 충격을 먹었었다. 소녀의 나신을 보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듯이 고개를 돌려야 했다.
미친 세상이었다. 〈어린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세상이었다. 사랑받는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른의 결함품이라고 여겨졌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뺨이 달아오른 직원이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는 입술이 터져있었다. 살이 찐 돼지로 보이지만 체중은 그 자체로 흉기였다. 〈상인 베베닉〉의 뺨 한 대는 생각보다 매웠다.
“베베닉을 만나러 왔습니다. 저는 〈머리통 용병단〉의 용병대장 융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직원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베베닉이었기에 오늘은 그 어떤 때보다 눈치를 보고 열심히 해야 했다.
바로 들어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상회는 2층 구조로 되어있었다. 1층은 창고로 쓰고 있었고, 카운터도 보였다. 2층에는 문이 다닥다닥 박혀있었고, 문짝의 형태가 제법 고급스러운 곳이 있었는데 베베닉의 집무실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직원이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몸을 돌려 문을 잡았다. 융이 가장 먼저 들어갔고 그다음에 메르인 마지막이 드낙이었다. 갈색 늑대 도노도 꼬리를 살랑거리며 들어갔다. 방의 모서리 부분에 자리를 잡고 배를 깔았다.
힐끔.
직원은 도노를 자꾸만 쳐다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시선을 자주 확인하는 개와는 다르게 늑대는 그런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쩍.
하품 한 번 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고양이처럼 귀는 쫑긋 세워져있었다.
“하하하! 융 용병대장 아닌가! 오랜만이군!”
“하하하.”
베베닉은 격하게 융을 껴안으면서 어깨를 팡팡 쳤다. 드낙은 가까이서 보니 베베닉이 단순한 뚱돼지가 아니라 〈근육 돼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길래 급하신 분이 날 찾아왔나?”
“급한 일에만 제가 찾아옵니까? 저번에도···”
베베닉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아래로 슥슥 내리며 진정하라고 말했다. 그런 말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척 봐도 몇몇 단원이 안 보이잖나.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융은 그간의 일을 말해주었다.
“재난(災難)이었군.”
케르욘이나 되는 사내를 날려버린다는 것까지 말해주었기에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재난이었다. 오크 대전사 혹은 그 밑에서 놀아야 할 오크와 마주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제대로 된 곰가죽이야. 〈내성〉 쪽에 사는 박제상한테 팔았으면 하는데. 한 번 보겠어?”
베베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외출 준비를 했다. 옷걸이에 있는 혁대에는 무기가 달려있었다. 드낙이 그곳을 바라보자 메르인이 툭하고 치며 말했다.
“그는 은퇴 용병이야.”
용병으로 살면서 자신에게 상재(商材)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직업을 바꾼 경우였다.
곰가죽은 메르인의 집에 있었다. 그것도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겨두었다. 곰가죽을 거실에서 펼쳐놓고, 베베닉이 안으로 들어갔다. 수행원 하나 없는 베베닉은 상인 답지 않았다. 인건비는 아침에 보았던 직원 하나뿐이었다.
“좋은데.”
척 봐도 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잘 관리를 했다. 바람구멍 하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뒷다리에 바람구멍을 두 개 찾아냈다.
“늑대가 문 겁니다. 여기 이 녀석이죠.”
“정말인가? 곰 덩치가 어마어마했을 텐데···”
드낙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모습에 베베닉이 고개를 흔들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신입인가?”
“아니, 내 제안을 거부한 당찬 사내지. 이름은 드낙이라고, 〈검은 산골 마을〉에서 〈깊은 숲 사냥꾼〉이라 불리던 자인데, 이제 용병 일을 시작해.”
베베닉이 가죽을 살피다가 드낙에게 악수를 청했다. 드낙은 냉큼 악수했다.
“반갑네. 물건이 있으면 날 찾아와. 정직하게 해주지.”
“감사합니다.”
상인은 다시 곰가죽에 관심을 돌렸다. 아주 세세하게 확인했다.
“크기가 아주 커. 바깥쪽이라서 아쉽지만 그래도 뒷발 밑이라 크게 하자도 아니야. 거기에 늑대가 물었으니 희소성도 있고, 이야깃거리도 생겨서 되려 좋지.”
융과 거래를 제법 했는지 베베닉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정직하게 좋은 점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것은 아주 큰 재산이었다. 드낙은 베베닉에 대해서 호감을 조금 가지게 되었다. 모닥불이 지펴지고 휴식할 때나 식사를 할 때마다 용병들은 상인들의 개짓거리를 욕 했기 때문이다.
‘이 용병단과 연을 놓지 않았으면 온갖 통수를 당하고 다리를 놓았겠지.’
신입만큼 등쳐먹기 좋은 것도 없었다. 드낙이 아무리 눈치가 좋고 사회생활을 했다고 해도 그런 불합리를 강제하는 상황에 자주 놓일 수 있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자신이 가진 것을 적은 값에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베테랑을 통해서 줄이 놓아진다면 그런 〈신입 생활〉을 미리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나 줄 수 있지?”
“금화 한 닢. 겨울에 잡은 놈이라서 그런지 대단해. 안에 장대를 놓아서 일으켜 세운다면 어떤 귀족이든지 감탄하고 말 거야.”
‘금화!’
곰가죽은 그대로 〈고르곤 상회〉로 옮겨졌다. 당연히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 짐수레에 담기고 천막이 씌워졌다.
1층 창고에서 조금 기다렸을까, 아주 작은 가죽 주머니를 베베닉이 던져주었다. 융이 단번에 낚아챘다. 꺼내자마자 제법 두툼한 굵기의 금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500원짜리보다 훨씬 크네.’
금화를 처음 보는 드낙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융은 그 모습에 웃으면서 금화를 건네주었다.
“한 번 만져보세요. 처음 보시죠?”
“예? 예.”
금을 만지작거렸다. 굵기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드낙은 마치 겁을 먹은 사람처럼 금방 금화를 돌려주었다. 메르인이 실실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영락없는 산골 청년이었다. 현대인으로 살면서 골드바도 직접 보지 못한 박호훈이었다.
‘괜히 가슴이 콩닥거리네.’
동화가 천 원이고, 동화 천 닢이 은화 1닢이었다. 또한 평균 백만 원짜리가 은화 1닢이었고, 은화 100닢이 금화 1닢이었다. 1억원짜리 동전이었다. 굉장히 보기 힘든 화폐였다. 아니, 평범한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기득권층과 함께하는 사람들만이 만져볼 수 있는 것이었다. 〈내성의 시민〉들이 가진 금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윗물과 아랫물이 크게 달랐다.
이미 대금을 〈검은 산골 마을〉에서 받았던 드낙은 되려 아쉬웠다. 자신이 베베닉과 연줄이 있었다면 은화가 아니라 금화가 손에 들어왔을 것이다.
동화는 생활에서 자주 썼기에 값이 낮은 게 특징이었다. 마법 아티팩트의 거래 때문인지 금화의 가치가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다. 금과 은의 유통을 기득권이 강하게 움켜잡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식사라도 함께 하겠나? 이른 점심이 되겠지만.”
“미안하지만, 이 친구의 용병패를 만들어줘야 해서.”
“애 돌보기도 아니고. 크흐흐!”
베베닉이 웃었다. 융과 다음을 기약했다.
점심을 먹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외청(外廳)〉으로 향했다. 그곳은 외성지역에 있는 관청이었다. 등급이 낮은 내무를 보는 곳이었고, 용병패에 대한 것을 발급하는 곳이기도 했다. 의뢰는 받지 않는다.
“은화 1닢입니다.”
“예?”
한산한 곳에서 드낙이 크게 되물었다. 마주한 문관(文官)은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드낙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
"따질 거면 내성에 계신 내정관님에게 말하시오.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뭔가를 마시면서 다른 업무를 보기까지 했다. 응대가 엉망이었다. 드낙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칼밥 먹으러 온 놈에게 겁먹을 문관이 아니었다.
드낙이 머리를 긁적이며 융에게 다가갔다.
“은화가 없습니다. 제법 큰 돈은 마을로 보내서요. 빌려줄 수 없습니까?”
“허···”
융은 한숨쉬며 고개를 저었다. 대신 메르인이 은화를 튕겼다.
“우리 집 알지? 거기 문틈에 언제든지 밀어 넣어.”
“감사합니다.”
드낙은 고개를 크게 숙였다. 아주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휴대폰도 없는 이 세상에서 돈을 빌려주는 것은 큰 의미였다.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드낙은 꼭 갚을 생각을 했다.
“여기 있습니다.”
“······”
은화를 챙긴 문관은 거침없이 일어나서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패를 하나 들고 왔다. 그곳에 드낙의 이름과 출신 마을을 적었다. 그리고 건네주었다. 드낙은 용병패를 확인했다. 이미 반쯤 완성된 용병패는 이름과 출신 마을만 적으면 끝인듯했다.
‘엉성하네.’
〈배급처 : 횃불성채 외청〉이라고 쓰여 있는 게 유일한 것이었다. 그 외에는 목패에 불과했다. 이게 은화 1닢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게 용병패 맞습니까? 누구나 위조가 가능할 것 같은데.”
그 말에 융이 웃었다.
“마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제법 간단한 것이라서 평범한 사람들은 모르죠.”
“평범할 땐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러다가 크게 곤욕을 치를 거야.”
드낙은 외청을 둘러보았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많은 인구가 있음에도 이렇게 한적하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이렇게 조용한가요?”
“그때그때 다릅니다. 보통 초가을에 가장 바쁩니다.”
융은 많은 곳을 보여주고, 소개해주었다. 드낙을 언젠가 만난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저녁에는 〈피가득 술집〉에서 술 한 잔을 하게 되었다. 오늘로써 드낙과 헤어지기 때문이다. 지나가며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이곳이 용병들이 의뢰를 받는 곳입니다. 제법 크고, 용병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었죠. 〈횃불 성채〉의 영향력에 있는 지역은 대부분 이곳으로 의뢰가 흘러들어옵니다.”
1층은 매우 혼잡했다. 테이블이 많았고, 올라가는 계단의 벽에 온갖 의뢰가 붙여져 있었다. 글을 몰라도 알 수 있게 그림이나 표식 혹은 지도가 그려져 있기도 했다. 마을 이름을 들으면 유추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글을 배운 드낙은 조금 아쉬웠다. 자신의 재능이 희소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서빙은 대부분 젊은 여자들이었다. 성희롱은 기본이었지만 주는 돈이 많아서 경쟁률이 높은 곳이 바로 〈피가득 술집〉의 종업원이었다.
“저기 서있는 사람은 뭐죠?”
드낙이 손으로 가리키자 〈정보꾼 메르인〉이 그 손을 잡아서 내렸다.
“술집에 고용된 용병들이야. 상당히 잘 나가던 놈들이라서 잘못하면 싸움이 벌어지니 조심하라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안주는 다양한 형태의 고기였다. 하지만 그냥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풍토답게 손이 많이 가지는 않았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융은 몸을 일으켰다.
“따라오시죠.”
술잔을 든 채로 융은 곳곳의 테이블에 끼어들었다. 많은 이들이 융을 알고 있었다.
“아직도 머리통이 붙어있군!”
농담을 던지며 친분을 과시하거나.
“한 달전인가? 널 잡겠다고 주정을 부리는 놈이 있었는데. 조심하라고.”
제법 좋은 정보를 주기도 했다. 그저 술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얻었다. 드낙은 고개는 숙이지 않고, 악수만 나누었다.
“제법 큰 마을이었지. 5천 명이 넘게 살던 곳이었는데. 조사단이 파견되었다고 하던데.”
“조사단? 아니야. 기사단이 갔어.”
〈경비대장 세베긴〉에게서 들었던 〈피난민〉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큰 사건인 듯했다. 누구누구 용병이 고용되었다고도 말하였다.
최근 이슈를 들은 융이 드낙에게 말했다.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말해야 할 정도로 시끄러운 곳이었다.
“처음에는 음식이나 술을 대주면 좋아할 거요!”
드낙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다음은 홀로 있거나 2명이 있는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머리통 용병단〉은 숫자가 급감했기 때문이었다. 융이 가장 원하는 것은 떡대가 있는 용병이었다.
“혼자인가?”
“누구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듯한데.”
“〈해변 항구〉.”
말 수가 적은 바닷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드낙은 흥미진진하게 스카웃 장면을 보았다. 팔씨름을 하고, 대거를 꺼내서 놀리는 것만 보고 융은 그에게 스카웃 제안을 했다.
“좋지. 〈머리통 용병단〉은 들어본 적이 있어. 큰 수완을 가졌다던데.”
‘간단해 보이지만···’
드낙은 그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병의 스카웃은 말 그대로 〈첫인상〉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난감했다. 어려 보이는 얼굴 때문이었다.
용병대장은 대부분 중견 용병이 다수였다. 융만 해도 나이가 34세였다.
‘계획을 바꿔야 하나?’
얼굴에 수염이 적게나는 집안 내력도 한몫했다. 수염을 기른다면 나이는 들어 보이겠지만 간신배처럼 보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