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 <-- 찾아다니는 용병단 -->
검은 연기가 드낙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검은 문〉은 세 개나 존재했다. 이 중에서 드낙은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검은 문보다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이게···’
연기로 가득했던 바닥은 전과 다르게 무언가가 추가되어있었다. 검은색의 반투명한 육각형의 유리바닥이 선명하게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꿀꺽.
무릎을 꿇고 유리바닥 안에 있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손으로 연기를 휘저어서 몇 번이고 쫓아내서야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람의 팔이잖아?’
〈알 수 없는 오른팔〉은 기포를 조금씩 내뿜으면서 가라앉아있었다. 드낙은 주먹으로 유리바닥을 쳐보았지만 둔탁하고 아주 단단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도통 알 수가 없네.’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을 가까이 대자 오른팔에서 검은 기류가 아지랑이처럼 얇게 피어 올라서 드낙의 위로 솟아올라왔다.
‘헉.’
검은 연기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오싹해졌다. 오한이 팔뚝으로 들러붙어서 소름이 좍하고 손끝에서부터 시작되어 척추를 타고 머리까지 뻗쳤다. 기겁한 드낙이 뒤로 물러섰다.
그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한 채 굳어있었다.
애써 〈알 수 없는 오른팔〉을 외면하고, 검은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을 보고 다시 주저앉았다.
‘뭐야, 대체? 여긴.’
결코 평범한 곳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공포를 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덜렁 오른팔만 있다니? 기괴했다.
‘전생자라고 변명하기에는 좀 아니다.’
머리카락을 헝클고 벅벅 긁었다. 두피가 까지고, 손톱에 피가 들러붙었다. 알싸한 고통이 주는 쾌감과 상처가 만들어내는 가려움은 계속해서 긁게 만들었다. 피와 손톱에 의해서 긁혀진 피부가 손톱 안으로 스며들었다.
드낙은 눈두덩을 비비고 몸을 일으켰다.
‘내 목표만 생각하자.’
강해진다면 나쁠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이 검은 꿈은 자신에게 좋은 능력만을 주었다. 걱정은 해야 했지만 힘을 거부할 결단은 내릴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의 절대적인 격차를 벌이게 해주는 능력은 그 어떤 것보다 행복한 마약이었다.
검은 문이 쩍하고 열렸다. 토사물처럼 대량으로 쏟아지는 검은 연기에 드낙이 몸을 맡겼다. 환상이 그를 덮쳤다.
‘피끓음.’
‘야만인의 혼혈.’
자신의 체중보다도 큰 것을 들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힘줄.
보다 발달된 신체능력.
〈야만인의 피웅덩이〉가 첫 번째 선택지였다.
드낙이 눈을 떴다. 온몸에서 열이 끓어올랐고, 양볼이 뜨끈해져있었다. 환상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흥분한 몸은 금방이라도 들썩거리면서 뛰어갈 정도로 달아올라있었다.
‘곰같이 생긴 놈이 괜히 그런 몸을 지닌 게 아니구나.’
〈손없는 센다빌〉의 비밀을 엿볼 수 있었다.
‘야만인의 피가 있었던 것이군.’
힘줄 자체가 평범한 사람과 달랐고, 보다 싸움에 적합한 육체가 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 결코 좋지 않다.’
무언가를 죽였을 때, 침착해지고 시간이 느려지는 〈킬 더 배틀〉의 능력을 지닌 드낙이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는데, 야만인의 피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면 흥분에 절어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없었다.
피에 절어서 자신의 앞에 찔러들어오는 창도 구분 못하고 사람을 도살하는 괴물이 될 것이다.
‘보류.’
신체적인 스펙에서 우위를 점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전투 스타일과 맞지 않는 〈흥분제〉는 기피할 수밖에 없었고, 거부감이 들었다.
다음 검은 문으로 향했다. 검은 연기가 드낙을 감싸고, 환상이 그를 찾아왔다.
수많은 인간의 죽음.
베어 죽고, 찔러 죽고, 잘려나간 머리를 잡은 채 킬킬거리는 악당의 모습.
피 묻은 다양한 무기가 검은 연기로 휘둘러지고, 기이한 궤도를 보이기도 했다. 반월 형태의 투척 도끼 또한 위협적이었다.
인간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경험을 제공하며, 다양한 무기에 대한 경험을 내어주는 환상임을 알 수 있었다.
〈센다빌의 백병전술〉은 다양한 무기 사용법과 많은 인간을 상대한 경험을 주는 능력이었다. 이것은 특히나 정보가 제한되고, 찾기가 힘들 정도로 적은 이 세상의 세계관 특징상 최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락손 같은 사람은 만나기 힘들어.’
그는 별종이었다. 12개에 달하는 검술 비전을 알고 있는 것부터가 기괴한 인물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에 반해서 센다빌의 백병전술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실전에서 얻은 피 묻은 과실이었다.
락손이 기술을 가르쳐준다면, 이 능력은 실전을 가르쳐주는 셈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일그러진 세탄의 업(業)〉이라는 보잘 것 없는 능력이었다. 악의적인 꾀를 주는 대신에 불에 대한 공포를 주는 드낙이 선택할 리 없는 것을 주는 것이었다.
현대인의 윤리관이 어느 정도 잡혀있는 드낙에게 있어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고,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능력이었다.
탐욕적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사상을 접한 현대인은 모순되는 존재였다. 극한의 선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보았고, 극한의 악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눈에 담았다. 간접 체험에 불과하지만 그것조차도 못하는 것이 이곳의 사람들인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판단에 있어서 막대한 간접 체험을 보유하고 있었다.
악의적인 꾀를 스스로 멀리할 줄 알았고, 황소조차 밀어낼 힘도 단점이 있다면 거부할 줄 알았다.
‘이번에 얻을 건 〈센다빌의 백병전술〉 뿐이군.’
한 번도 손에 잡아보지 않은 다양한 무기들을 앞으로 베테랑 용병마냥 놀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인간 도살자〉마냥 무자비하게 쳐죽일 터였다.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드낙은 결코 〈애송이〉마냥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은 언젠가 올 수밖에 없고, 자주 볼 것이다.’
아까운 은화를 락손에게 매달 상납하며 사람 죽이는 기술을 배웠을 때부터 매번 지겨운 일상에서 각오했던 드낙이었다.
〈센다빌의 백병전술〉은 큰 도움이 되었는데, 온갖 무기를 직접 사용하기 위해서 구매하는 것도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고, 그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것을 해결해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이 되는 능력이었다.
‘단점도 없고.’
드낙은 그렇게 검은 꿈에서 깨어났다. 〈알 수 없는 오른팔〉에대한 의문점은 그대로였다.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마적 습격〉 이후로 1년 반이 더 지났다.
드낙은 〈깊은 숲 사냥꾼〉으로 완전히 자리매김을 했고, 숲과 산의 초입에는 함정을 두어서 수입은 배가 되었다. 사냥꾼 게릭은 마을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게릭을 나무라지 않았고, 비판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게릭에 대한 행방을 물었지만 드낙은 모르쇠로 답하였다. 그의 집에 있는 마적들의 시체와 피는 게릭을 배신자보다는 용감한 사내로 기억하게 해주었다.
‘마적 두 명이나 죽었으니 1인분은 하고 갔다.’
도망간다면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는데 굳이 집에서 매복을 한 것이 마을에 대한 자신만의 배려였고, 양보였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개새끼.’
물론 이해한다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센다빌의 거대한 신체에서 나오는 힘과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은 지금도 때때로 몸의 컨디션이 나쁘면 악몽으로 나타날 정도였다. 놈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의 힘. 숨이 막혀서 온몸에 식은땀이 가득한 채 깨어날 때면 자연스레 게릭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새벽 수련을 시작했다. 몸을 움직여서 땀을 조금 빼고, 락손의 검술 비전을 연습한 뒤에는 자신만의 비전도 구상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실효성은 없을지언정 의외성은 있는 드낙의 비전은 락손의 검술 비전을 비튼 것이었다.
“많이 먹어라.”
〈까마귀 카이야(Kaiya)〉와 〈갈색늑대 도노(Dono)〉에게 밥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이야 녀석. 이젠 곡물가루도 안 먹고.’
카이야는 밀을 빻은 곡물 가루를 먹지 않게 되었다. 야생이 있던 놈이 햇수를 더할수록 기고만장해져서는 아예 상전처럼 먹을 것도 가리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말린 옥수수와 육포를 먹기 시작했다.
고기 소비가 자연스레 늘었다. 늑대 도노도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은 피맛이 나야지 맛나게 먹었다. 다행인 점은 편식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과일도 때때로 즐겼다. 카이야가 과일 먹는 모습에 혹한 듯했다.
드낙이 깊은 숲으로 향했다.
“깊은 숲으로 가는 거야? 드낙!”
마적 습격 이후로 더욱 증축된 목책 위에는 망루가 있었는데, 앞과 옆을 향하여 그럴싸한 석궁이 장전된 채 6개가 망루에 부착되어있었다.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는 빈니의 모습에 드낙 또한 손을 흔들어주었다.
“오늘도 〈망루잡이〉를 하는 거야?”
“망할 놈들,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건지. 청년회 들고 나서 돈 나가는 일이 많아졌어!”
농사와 닭을 키우는 빈니의 가족은 자식이 많아서 돈이 적었다. 그 때문에 마을의 공통된 일에 투입되는 빈도가 많았다. 드낙이 락손에게 줄 수업료를 위해서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일을 한 것처럼 빈니도 다르지 않았다.
“최근에 하나 더 낳았다며?”
“말도 마. 돌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찌나 먹어대는지! 하하하!”
드낙은 몇 마디 더 주고받으면서 마을을 나섰다. 숲으로 들어서는 드낙의 눈에 저 먼 길에서 오고 있는 보부상 그룹을 볼 수 있었다.
‘자주 오는군.’
〈검은 산골 마을〉에 오는 상인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화폐 자체가 적어서 현물거래가 주류를 이루었기에 이득을 보기가 힘들었다. 시세가 정해진 화폐와는 다르게 현물은 서로 간 생각하는 금액이 달랐고, 상인은 그 물품을 들고 다른 곳에 가도 또 다르게 가격이 책정되니 곤란한 것이다.
드낙은 거침없이 숲 안으로 들어갔다.
〈보부상 요베〉는 최근 상단을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 거창한 꿈이라고 하기에는 그 꿈의 내용이 보잘 것 없었다.
‘상인이 다니지 않는 마을에서 이득을 창출하는 것.’
하이에나처럼 다른 상인이 똥가루를 주워 먹는 곳으로 생각하는 소규모의 마을과 산골 마을을 대상으로 하는 〈산골 상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뜻에 발 하나 들이민 것이 4명이나 되었다.
대부분 보잘 것 없거나, 상인으로 활동하지 않은 이들이 많았고 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드디어 도착했네. 생각보다 길이 험해.”
“여기는 큰 돈벌이가 안 될 것 같은데.”
너도나도 길이 험하다고 투정을 부렸다.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냈다. 푼돈 버는 보부상에게 험한 산길은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요베가 그 말에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여기 누구라도 한 번이라도 이 마을에 온 적이 있나? 응?”
“그거야···”
“뭔가 대단한 거라도 있어?”
그가 혀를 찼다.
“아무도 안 와서 값어치 있는 게 팔리지는 않지. 하지만 그래도 시세보다 싸게 뭔가를 구할 수가 있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밖으로 나가지 않거든.”
마을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보부상이오?!"
“그렇소!”
“보부상이 무슨 무기를 그렇게 차고 있소?”
“강도를 보호해줄 용병 하나 굴리기 힘든데, 자기 몸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여기 이 짐을 보게! 보부상이라니까!”
대장간을 보유한 검은 산골 마을의 석궁은 규격에는 맞지 않고 조잡했지만 그래도 쓸모는 확실했다.
제대로 된 검문 없이 안으로 들어온 보부상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형편없는 곳이었다. 〈횃불 성채〉의 삼엄한 검문과는 차원이 달랐다. 처참할 지경이었다.
“멍청한 놈들이군.”
“그래도 다른 산골 마을보다는 낫네. 석궁이 여러 개잖아. 기본적인 생각은 있는 놈들이야.”
“이쪽이야!”
요베가 앞서나갔다. 그는 능숙하게 마을 사람과 인사를 나누면서 아주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순식간에 최근에 안 쓰이는 빈집이 어딘지 알아냈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난 혼자 집 쓰겠어.”
“맘대로 해. 짐 풀고 바로 오고.”
혼자 빈집을 따로 잡겠다는 말에 요베가 짧게 대답했다. 척 보아도 과거사가 복잡해 보이는 사내는 얼굴 상(相) 자체가 험악하고 비틀려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세제본〉, 〈험상궂은 세제본〉이었다.
세제본은 빈집 중에서도 한참을 둘러본 다음에 창문 하나 없는 빈집을 선택했다. 크기는 다른 집과 비슷했지만 창문이 하나 없었다. 그에게는 가장 좋은 집이었다. 안에 들어가서 꼼꼼하게 집을 살폈다.
‘가구 하나 없다니.’
누더기를 짜집은 천을 꺼냈다. 곱게 접어서 둘둘 마른 것이라 펴면 상당한 양이었다. 그것을 깔고, 가방에서 필요한 것을 꺼낸 다음에 바닥을 잡아뜯어서 가방을 숨겼다. 가슴 안쪽에 옷에 특수하게 가죽 고정대를 놓은 곳을 더듬었다.
단검을 단단히 고정대에 고쳐매고, 밖으로 향했다.
“벌써 밥 먹으려고? 아직 점심때도 아닌데.”
세제본이 안으로 들어오며 화덕 자리에 불을 붙인 곳에 앉으며 말했다.
“언제 밥 먹을지 몰라. 지금 먹고 서둘러 움직여야 해. 팔 건 팔고, 해가 질 무렵에는 〈큰 건〉도 하나 있다고.”
“〈큰 건〉? 이런 산골 마을에 뭐 큰 게 판다고···”
그가 궁시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