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 <-- 늙은이를 위한 마적 -->
마적들은 새벽녘이 오기 전을 노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감이 넘치는 이들이었고, 평화로운 산골 마을의 〈청년회〉 따위가 자신들을 막을 수 없음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두구두, 두그두!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나른한 점심시간의 노곤한 귀를 울렸다. 청년회 소속에서 약초나 버섯을 산언덕에서 양식하며 먹고사는 멕파스가 귀를 후벼파며 다가오는 먼지 구름을 바라보았다.
“왜? 빨리 패 돌려.”
테이블에 앉아서 자신의 패를 주의 깊게 보고 있는 톰이 그를 재촉했다.
마을 입구에는 문지기 노릇을 방만하게 한 티가 역력했다. 술통부터 시작해서 테이블에 의자 여분 그리고 다양한 먹을거리와 놀 거리가 한쪽에 가득했다.
“소리 안 들려? 저거 보라고.”
먼지와 함께 약하게 웅웅 진동하는 소리는 말발굽 소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경험 있는 이들이나 멀리서 들리고, 다수가 만들어내는 말소리를 알뿐이지, 대부분은 1기~3기 정도의 말발굽 소리만 명확하게 기억할 뿐이고, 멀리서 들리는 소리는 구분조차 못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에는 밭일 같은 노역에 동원되는 말이 대부분이었기에 피곤에 지친 말들은 대단하게 달리지 못해서 소리 자체도 조금 달랐다. 경쾌한 준마의 질주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위험한 것 아···”
후우웅!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크게 헝클며 바람소리를 귀가 들었을 때, 그 바람 소리에 뒤섞인 화살의 소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컥!”
“윽!”
고블린 때 이후로 울타리 대신에 목책이 들어섰는데, 목책의 벽에 부딪치고, 한 명은 그대로 의자에서 쓰러졌다. 장력이 대단한 장궁이 사용되었기에 마치 기습적으로 후려맞은 것처럼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저, 적이다!! 적이다!!!”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주변은 조용했다. 마적 두 명은 순식간에 다가오면서 화살을 한 발씩 더 쏘았고, 가슴과 옆구리에 맞은 두 사람이 고통의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끔찍한 비명소리에도 도와주러 달려오는 이가 없었고, 대신에 여인 한 명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뒤돌아서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마적은 두 장정을 죽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을을 손쉽게 점령하기 힘든 방법임을 잘 알았다.
‘사람 죽일 때는 때가 있는 법이지.’
“이봐, 친구. 죽고 싶지 않다면 양손을 들어 올려.”
섬뜩할 정도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빼어든 숏소드를 보고 두 사람은 그대로 입을 덜덜 떨면서 양팔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묶어내고, 일으켜 세웠다.
“죽을 정도는 아니야. 옆구리에 박힌 건 좀 위험할지 모르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일이 끝나기 전에 응급처치를 받게 해주지.”
옆구리에 화살이 틀어박힌 톰은 목책에 기대게 되었고, 멕파스만 선채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마적들이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성공적이었다.
“잘 했다!”
손 없는 센다빌이 무식하게 큰 할버드를 한 손으로 쥔 채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손이 없는 오른손의 팔뚝에는 원형방패가 단단히 묶여져 있었다. 그의 왼손은 핏줄로 가득했다. 얼마나 그가 잃어버린 무력에 대한 갈망이 심했는지 알 수 있었고,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했음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한 번 무너진 악명은 회복하기 힘든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겨우 마적 두목이나 하고 있었다.
“앞으로 가라!”
“윽!”
멕파스가 벌벌 떨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마을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마적들 중에 절반이 말에서 내려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흐아아악!”
침대 밑에 숨어있던 여자가 끌려 나왔고, 함께 안고 있던 아기가 빠져나오면서 침대에 부딪쳐서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죽고 싶지 않으면 일어서. 아기는 바구니에 담아두고 와.”
“예? 하지만···”
시미터가 쓱 하고 목을 겨누자 우뚝 선 여자가 눈을 질끔 감고 뜨더니 손을 덜덜 떨면서 자신의 아기를 바구니에 담고 산적을 따라갔다. 당연히 밧줄에 손이 묶였다.
여자들과 걸을 수 있는 애까지 모조리 인질로 삼았다.
“점심시간이 난 가장 편하더라.”
일하러 밖에 나간 남자들 때문에 마을 안에는 장정이 절반밖에 없었고 그들이 농기구나 도끼 혹은 방패를 든 채 나타나도 인질로 삼아진 마을 사람들을 보자마자 그대로 무기와 방패를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50명의 인질을 마을 광장에 놓아두고, 마적 다섯을 이끌고 센다빌과 세탄은 락손의 대저택으로 쳐들어갔다.
“누구···컥!”
멍청하게 일을 보다가 걷는 소리에 얼굴을 든 농노 말스의 머리에 그대로 한손 도끼가 박혔다. 단번에 도끼가 빠져나가자 피가 분수처럼 터지더니 콸콸 소리를 내며 그대로 뇌수가 바닥을 적시며 말스의 머리부터 땅에 처박혔다.
인질을 삼을 여유 따위 이곳에 없었다. 그대로 문을 뻥 차고 들어가자 차를 마시며 책을 읽던 락손과 마적 하나가 눈이 마주쳤다.
“흐흐, 영감. 그대로 가만히 있···”
말을 마치지 못하고 락손이 찻잔을 던졌다. 뜨거운 것이 들어있었기에 마적이 그대로 앞으로 상체를 숙여서 피했지만 이어지는 락손의 앞발차기에 그대로 턱이 올려쳐졌다. 오른손을 발로 밟으면서 들고 있는 의자를 뒤에 놈에게 던졌다.
콰드득!
무기가 의자를 박살을 냈다. 3m나 되는 거구인 〈손없는 센다빌〉의 할버드가 앞으로 쑥하고 찔러들어갔기 때문에 의자의 파편이 락손을 후려쳤지만 끄떡도 하지 않은 채 락손은 피 묻은 도끼를 집어 들어서 척추를 꼿꼿이 세워서 도끼를 겨누었다.
휘두르기 좋게 팔을 안쪽으로 쫙 당겨있는 자세.
도끼의 파괴력은 〈휘두른 거리〉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미친 영감. 그렇게 늙어도 팔팔하구만.”
“네가 누구를 앞에 두고 있는지 한참을 모르는구나.”
“락손,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쌍도끼 센다빌〉이다.”
락손은 코웃음을 쳤다.
“그게 누군데?”
말을 끝내자마자 센다빌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리치가 긴 할버드가 지붕을 꽈드드득 부수면서 내려쳐졌다. 천장을 부수면서 가는 할버드 따위를 못 피할 락손이 아니었다. 오른쪽으로 회피하면서 오른발로 테이블을 엎은 다음에 왼발로 차서 센다빌에게 밀었다.
콰득!
방패로 그것을 후려쳐서 막자마자 락손이 달려들었다. 할버드는 바닥을 찍었고, 원형방패는 테이블을 후려친 상태.
“큭!”
단번에 오른 팔뚝에 도끼가 틀어박혔다. 하지만 락손 또한 성하지는 못했다. 거대한 덩치의 뒤에 숨어있던 〈일그러진 세탄〉의 장창이 쑥하고 들이밀어져서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카학.”
"밟아! 새끼들아! 뭘 뒤에 멀뚱멀뚱 있어!”
“예!”
세탄의 외침에 마적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일직선으로 달려온 마적의 골통이 락손이 쥔 테이블의 부러진 다리에 그대로 뚫렸다.
“꺽.”
크게 소리 하나 지르지 못하고 마적 하나가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락손의 머리가 마적의 발에 걷어차였다.
"윽!"
순식간에 다굴을 당했다. 반항도 못한 채 피떡이 되었다.
“괜찮습니까?”
“응급처치부터···크으으···”
도끼가 틀어박힌 오른팔을 보며 센다빌이 신음소리를 냈다.
“죽이지마!”
상처를 서둘러 돌보면서도 센다빌은 락손의 생사를 염려하였다. 곱게 죽이고 싶지 않았다.
“흐읍. 흐으읍. 으으으으으으으으읍!!!!”
부들부들 떨면서 도끼가 뽑혔다. 그곳에 새하얀 가루가 듬뿍 묻혔다. 그다음에는 뽕 소리를 내며 유리병에 든 붉은 액체가 조심스럽게 한 방울씩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아주 세심하고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후우우우웁! 흐으으으읍!”
심호흡을 하면서 온몸에 힘을 가득 쥔 센다빌이 그제서야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신은 누워있었다. 약초를 미리 다져놓은 것이 가죽 주머니에서 나와서 듬뿍 상처에 발라졌다. 감각이 무감각했다.
새하얀 가루의 정체가 마비가루였기 때문이다.
“죽겠군.”
온몸이 땀에 절어진 채 센다빌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노인네는?”
“단단히 포승해서 광장에 함께 묶여있습니다.”
“남자들은?”
“보이는 놈들은 죄다 묶었고, 밖에 나간 남자들까지 들어오는 족족 항복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죽은 놈이 있나?”
“락손 그놈에게 골통이 깨어진 놈이 하나. 그게 전부입니다.”
밖으로 나섰다.
광장에 있는 이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누가 봐도 두목으로 보이는 풍채가 산만한 센다빌이 나타나자 절로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미리 마련된 단상에 오른 센다빌이 히죽 웃었다.
“나는 락손에게 토벌당했던 쌍도끼 센다빌이라고 하는 자다. 마을 사람들에게 악감정은 없다. 그 증거가 여기에 있다.”
털썩!
자신들의 동료였지만 이제는 선동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락손의 손에 죽은 마적 하나가 눈을 부릅 뜬 채로 잡혀 휘청거리면서 끌려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바로 센다빌이 서있는 발판에 놓였다.
“허읍···”
머리에 책상다리가 박힌 채 죽은 마적의 모습은 끔찍했다. 그것은 마치 키텐의 시신과 비슷했다. 들것에 들려져서 움직였지만 부러진 목 때문에 머리가 크게 덜렁거리던 모습은 누구에게나 악몽처럼 다가오는 기억이었다.
“내 친구가 죽었다. 하지만 난 너희들을 아직 죽이지 않았지. 나는 락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 왔을 뿐이다! 허튼짓을 하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에 떠나겠다. 물론, 친구가 죽은 배상금 정도는 가져가도 되겠지?”
그 말에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았다. 흉흉한 기색에다가 산발한 머리카락을 지닌 센다빌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담이 큰 자가 이곳에 없었다. 그 정도로 담이 컸다면 반항해서 도망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렇게 묶여있을 수가 없었다.
“묶은 사람들을 남녀로 나누어서 창고에 넣어라!”
“빨리빨리 일어서! 남녀로 나뉜다! 남자는 앞으로! 여자는 뒤로!”
“여보! 꺽.”
입을 함부로 내뱉은 남자는 그대로 머리통에 곤봉이 휘어들어갔다.
“아빠!”
반항하려는 아들에게 마적이 단검을 쿡하고 목에 들이밀었다. 목젖이 움직이면서 피가 슬슬 흘러내려왔다. 어찌나 단검의 날을 잘 갈았는지 피부를 그대로 베어버렸다.
“앞으로 걸어. 〈애송이〉. 우리 두목이 말했던 대로, 우리는 락손에게밖에 관심이 없다고.”
그 말은 거짓이었다. 아침해가 뜬다면 마적은 남자들이 있는 창고에 불을 지피고, 여자들은 노예로 삼을 것이다.
〈일그러진 세탄〉이 고안한 이 전술은 산골 마을이나 작은 마을에 아주 유효했다. 마을 사람끼리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유대감은 꿀처럼 달달한 장점으로 보이지만, 세탄이 산채를 운영하며 얻은 인간의 나약함을 이용한다면 순식간에 단점으로 변했다.
손 하나 풀지 않고, 수십 명 단위의 마을을 털어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인명피해를 일으키기 싫다. 이 마을의 가장 돈 많은 놈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하러 왔을 뿐이다. 하루가 지나면 돌아갈 테니, 반항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라.
인간의 생존본능. 이기심을 자극하는 이 전술은 〈검은 산골 마을〉에서도 통했다.
“여기가 마지막 집인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 마을 외곽에 있는 집들까지 돈 될만한 것을 수거하고 있는 마적 두 명이 사냥꾼 게릭의 집 앞에 당도하였다. 척 보아도 사냥꾼의 집이었기에 마적은 긴장한 채로 앞으로 나섰다.
“목장이랑 대장간이 남았는데, 거기는 다른 녀석들이 갈 거야.”
“잡힌 놈 중에 사냥꾼이 있었던가?”
“활을 수거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 없어. 조심하라고.”
스르릉.
무기를 꺼내들며 한 놈은 옆으로 돌아갔고, 한 놈은 바로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갖 박제가 드글드글하고 가죽이 널려있는 것이 많았다. 특히나 가죽 특유의 냄새와 탈취제의 향이 강렬하게 코를 찔렀다.
‘없나?’
그렇게 말을 하자마자 정수리에 그대로 화살이 틀어박혔다. 박제를 발로 받치고, 벽 모서리의 위에 있던 게릭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옆으로 돌아갔던 마적은 쿵하고 쓰러지는 소리에 그대로 도주했다.
“악!”
허벅다리에 화살을 맞고, 고통이 근육이 수축하면서 그대로 엎어졌다. 연달아서 쏘아지는 두 발의 화살이 추가적으로 다리에 박혔다.
한 손에 세 발의 화살을 모두 쏜 게릭이 한 발을 뽑아들어서 활을 당겼다. 몸을 뒤로 돌린 산적이 손을 허우적거렸다.
“자, 잠깐!”
쒸익!
퍼걱!
흙에 피가 튀었다. 기회를 잡은 게릭은 값이 나가는 가죽과 며칠 먹을 육포 그리고 식수를 담은 가죽 포대까지 챙겨서 그대로 집을 떠났다. 마을과 반대편이었다.
‘마적의 숫자가 너무 많소. 이것으로 그나마 가는 길에 나를 원망하지 마시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마적 두 명의 목숨 값은 그의 자기합리화였고, 곧 몰살당할 마을 주민들에 대한 정(情)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했다고 여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