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 <-- 책임 -->
침체되어가는 그는 떨어지는 피를 온몸으로 마주했다. 그 피 사이에서 보이는 고블린의 내장과 늑대의 피로 물든 가죽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 얄궂은 일이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세월에 파묻혀가는 것을 진정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여 초탈(超脫) 하였는데, 또 이렇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이 너무나도 화가 났지만 그런 감정은 겉으로 나오지 못했다. 안에서도 활화산처럼 타오를 것 같았지만 쥐꼬리만한 불길에 족했다.
오랜 세월 동안 무한히 가라앉았기 때문에 감정조차도 그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사용하지 않은 녹슨 수도꼭지처럼 〈분노〉가 일어나지 않고 뻑뻑하게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듯이 나타났다.
‘운이 따라주지만 항상 그러지 못할 것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
개(犬)처럼 기어가고, 범(虎)처럼 뛰어가도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가득하다.
단순히 운이 좋지 않아 미끄러지는 이들이 느끼는 허무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고, 단순히 운이 좋아 성공하는 이들이 느끼는 성쾌감은 하늘을 찌른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그였다.
그의 오른손이 흐물거리면서 느긋하게 위로 올라갔다. 형체도 없었음에도 누구나 그 장면을 본다면 그것이 〈오른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모순된 모습을 지닌 존재였다.
오른손은 검은 물방울이 되어서 위로 뻗어나갔다.
그것이 언제 자신과 연결된 상대에게 전달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었다.
이 공간이 그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이상한 곳이기도 했다.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장소에 있는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땅!
땅!
땅!
‘소리가 땅땅 치킨을 생각하게 하네.’
전생자 박호훈 그리고 이곳에서는 드낙이라 불리는 13살의 애송이는 언덕을 올랐다. 그곳에는 대장간이 존재했고, 대장장이 말룩산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흙언덕〉.’
언덕에는 풀 한 포기 살고 있지 않았다. 생명력이 아무리 강해도 철가루가 뒤섞여서 비 한 번 내리면 철냄새와 비냄새가 진동을 하는 이곳에서 생명력이 꽃을 피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언덕을 오르면서도 바람을 타고 맡아지는 쇳내음은 드낙에게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무섭도록 냉정해지는 심장을 드낙이 움켜쥐었다.
실전을 겪으면서 드낙은 철내음을 맡으면 기묘할 정도로 냉정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속도는 너무 빨라서 심장이 차가워지는 듯한 기묘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좋은 현상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을 효과였다.
하지만 박호훈은 아니었다. 그는 이것을 정신병이라 여기고 있었고, 마을을 두런두런 걷거나 조용히 명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이런 현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열려 있는 대장간의 창문과 문에서는 대장장이 말룩산이 거칠게 농기구를 만들고 있었다. 특히나 말들이 이끄는 대형 농기구를 통철로 만들고 있었는데, 아주 굵은 갈고리가 여섯 개 달린 것을 집게로 단단히 고정하고, 밑에는 따로 만든 고정대에 놓고, 두드려 형태를 갖추는데 노력하고 있었다.
“말룩산!”
두 번 소리치고 드낙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치이이이익!
대형 농기구를 그대로 물에 넣은 채로, 말룩산이 세수를 하고 수건을 목에 걸고 밖으로 나왔다. 언덕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거세었고, 그는 시원함을 느꼈다.
“애송이. 무슨 일이야?”
“철제 방어구에 제법 관심이 있어서요.”
“돈은 있고? 흐흐.”
드낙은 빙긋 웃었다.
“락손에게 두둑하게 받았죠.”
“락손에게?”
흥미가 생겨 되묻는 그에게 드낙은 대답을 회피했다.
“됐고, 방어구나 보여주세요. 팔 방어구 쪽으로.”
말룩산이 손을 뻗었다.
“됐긴 뭐가 돼? 손이나 줘 봐.”
드낙의 오른팔을 잡아서 주물럭거리더니 혀를 찼다.
“아야.”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서 드낙이 통증을 느꼈다. 워낙 우악스럽게 잡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참이나 커야 할 놈이 고블린 몇 마리 잡더니 기고만장해가지고 말이야.”
“그거랑 금속 방어구랑 뭐가 달라요?”
“한참 클 놈한테 금속은 맞지 않아. 단가가 비싸서 괜한 일이야. 내년만 되어도 못 써먹을걸?”
“에이. 한 치수 크게 잡죠 뭐.”
“가죽이랑 똑같은 줄 아느냐?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까 그런 거 좀 알려달라고요."
드잡이질을 하다가 지친 말룩산이 고개를 결국 끄덕였다.
“좋다. 대신에 락손이 왜 너한테 돈을 줬는지 말해줬으면 하는데?”
어려울 것 없었다.
“사냥 대회 때 제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요. 당연히 받아야 하는 돈이었죠.”
물론 받지 않았다. 비전 몇 개 알려주는 락손과 척을 질 수 없었기에 거의 무료로 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락손이 부탁했던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연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됐죠?”
드낙은 저녁 늦게 되어서야 말룩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보여준 형편없는 금속 방어구 지식을 단단히 고쳐주었다. 그 내면에는 앞으로 드낙이 장성한다면 그의 고객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철의 불순물을 줄이기에는 〈흙언덕〉에 있는 화덕은 화력이 약했기에 〈접쇠〉를 농기구를 만들 때도 심혈을 기울이는 말룩산이었다.
드낙은 당연히 그에게서 방어구를 구입해 밖의 세상으로 향할 것이다. 대장간 기술을 모른다고 하기에는 현대에서 판타지 소설의 부흥기 중 한 줄기였던 온갖 대장장이물 소설을 본 박호훈이었다.
접쇠가 노력이라면, 열처리는 습관이었다. 자주자주 휴식을 취하고 배고프면 바로 밥을 먹는 말룩산은 열처리의 전통 중 하나인 담금질의 대가이기도 했다. 땀의 찝찝함을 못 견디는 말룩산은 자주자주 물을 뒤엎어 쓰는데 그 사이에 작업물을 물에 집어넣어 담금질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 습관으로 만들어지는 농기구는 열처리가 굉장히 잘 되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낙이 말룩산의 작업물을 높게 쳐주는 이유는 강철의 질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자주 휴식을 취하면서 담금질을 매우 자주 하는 것. 접쇠를 통해서 진실되게 자랑질을 하며 값을 높이는 점 때문이었다.
‘구매할 만하지.’
높은 온도의 화덕을 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접쇠 과정이 가장 좋다고 여기는 풍조를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 말룩산이었다.
며칠 뒤에 열린 〈청년회〉에서 락손은 긴장한 티가 역력한 채 안으로 들어섰다. 그 표정은 금방 밝아졌다.
“드낙에게 보상까지 약속하며 늑대 사냥을 보름 전부터 하게 했고, 숲의 깊은 곳에 소리 나는 줄을 설치하는 사전 작업을 지시한 것이 락손이요.”
노발대발하면서 락손이 성급하게 개최한 〈사냥 대회〉에서 생겨난 사망자 4명의 보상금을 줘야 한다고 발광을 하던 말룩산이 스스로 그렇게 말하며 락손에게 배상금을 요구했던 것이 철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마을의 농산물과 화살촉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금속을 다루는 말룩산이었기에 락손과 대립이 가능했는데, 그가 스스로 말하며 빠지자 순식간에 락손에 지불해야 할 피해자 보상금은 마을이 모두 함께 부담하기로 했다.
그것은 〈피해자 보상금〉이 아니라 〈위로금〉으로 바뀌었고, 금액도 반절이나 깎였다.
너도나도 아는 산골 마을이라도 사유재산이 엄연히 살아있었고, 강제할 수 없었기에 〈목표 금액〉도 죽죽 양피지에서 줄이 그어져서 사라졌다.
‘좋군.’
락손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드낙을 속으로 칭찬해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꼼짝도 못하고 매달 은화를 공으로 알렉과 키텐의 가족에게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마을에서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지역 유지로까지 여겨지고 있는 게 락손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을 가족같이 여길 수는 없었다.
그는 수많은 전장을 비겁하게 헤쳐온 진흙속의 현장 지휘관이었다. 그에게 묻은 피는 호수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뭐라도 가지고 있어야 했던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락손은 부유하게 노후를 보내고 싶어 했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주는 선인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분명히 짊어져야 할 4명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도 짊어지지 않은 채 그렇게 허무하게 흘러갔다.
그저 도시에는 알려지지도 않고, 손해 생각에 겨우 들락거리는 보부상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마을인 이곳에서는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알렉에게 그리고 키텐의 가족에게 우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한 주 동안 기금을 모았다. 그리 대단한 돈은 아니었지만, 두 가족은 감사하며 최대한 빠르게 행복해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덕담을 나누었다.
그 속에 드낙은 없었다.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락손이 왜 나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 이제야 알겠네.’
〈청년회〉는 락손에게 있어서 편한 제어 장치였다. 마을의 산업을 책임지고 현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속해있었기에 청년회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은 마을 전체에 영향력을 뻗치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현물자산이 알렉이나 키텐의 가족에게 못 가게 하려는 수작질을 드낙을 통해서 말끔하게 해결한 것이다.
‘뒷맛이 쓰다.’
드낙은 마음이 답답했다. 악행(惡行)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락손 비전 모음서 필사본〉을 얻게 되겠지만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4명의 죽음을 더욱 허무하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드낙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전후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락손에게 휘둘린 대가는 고작 〈마음의 답답함〉뿐이었지만 그것이 크게 여겨졌다.
〈정직함〉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자유로움을 그제서야 깨달은 드낙은 자신이 그리 나쁜 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후회만 하고 악행을 해서 얻어낸 이득을 버리지는 않았다.
신념을 굳혀 가기에 드낙은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후회한다고 해서 돈다발을 거절할 대범함이 그에게는 아직 없었다.
“잘 해주었다.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와서 비전 모음서를 필사해도 좋다. 양피지는 내가 벌써 마련해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문자 3000 백서〉라는 것이다.”
두툼하고 법전같이 굵은 책자였다.
“난 이걸 보고 독학했다. 아주 상세하게 적혀져 있으니 독학하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중간 이후에는 귀족들이나 쓰는 단어가 있으니 거기까지 참고 안 해도 상관없다.”
락손의 설명에 드낙이 눈을 빛냈다. 생각보다 좋은 물건이었다. 독학하라는 말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주 상세하게 사전처럼 되어있어서 그냥 들고 다녀도 될 법했다.
“전의 부탁은 조용히 비밀로 하자고.”
“부탁이요? 무슨 부탁요?”
드낙의 능청스러움에 락손이 크게 웃음소리를 냈다. 끝마무리까지 완벽했다. 그 말을 하고, 두툼한 문자 3000 백서만 들고 나온 드낙의 표정은 어두웠다.
〈락손 비전 모음서 필사본〉을 제작하는 데에는 반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림이 많았고, 락손이 말해주는 설명을 주석처럼 달아야 해서 그냥 새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해를 넘기게 되었다.
겨울에도 드낙의 활동성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하루에 100번 활을 쏘는 것도 실력과 요령이 붙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늘어났다.
비전에 대한 능숙함도 꾸준히 발전했다. 락손은 더러운 생각을 하는 자였지만, 검술 실력만큼은 기사와도 대등했다. 온갖 비전을 익히면서 자연스럽게 무력에 대한 생각 자체가 기사처럼 격이 높아져 있었다.
그 덕에 드낙의 싸움법에도 기술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삼류무인의 싸움은 체중. 근력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류무인의 싸움은 기술로 이루어지는데, 고작 14살에 불과한 드낙은 벌써부터 이류무인의 마음가짐을 하게 되었다.
락손이 드낙에게 준 지식은 생각보다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드낙은 그를 싫어했다.
현대인의 삶을 살았던 박호훈, 드낙에게 있어서 4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락손은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해주지 않았고, 그가 가진 것에 비해서 내어준 것도 적었다. 모순되고, 편협한 생각이라고 욕먹어도 드낙은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자신이 가담해서 만든 일임에도 드낙은 그렇게 락손을 밀어내야만 했다.
그 결과 락손과 드낙은 관계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더 깊어지지 않았다.
‘비전(祕傳) 검술은 다양한 무기를 필요로 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락손이 중구난방으로 전쟁터에서 얻은 비전들은 모두 제각각 사용무기가 달랐다. 그 덕에 드낙은 그것을 하나의 무기로 재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온갖 무기를 사용하기에는 돈이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되어서도 사용하지 못할 터였다. 실효성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비전의 개량?”
비빌 곳은 마음으로 밀어낸 락손이었다. 퇴역군인이라면 생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확이 없었지만 드낙은 큰 목표를 하나 설정할 수 있었다.
12개에 달하는 비전을 오롯이 하나의 무기로 만들어 토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엄청난 전투력 상승을 불러올 것이다. 무공의 초식과도 같은 비전은 목적성이 매우 뚜렷한 것이었기에 드낙은 거기에도 신경을 쓰기로 했다.
롱소드 이상의 폭과 길이를 가져야 하는 〈스티얼 휴펜(Stier Hupfen, 황소의 튀어오름)〉이 첫 번째 개편 목표였다.
‘난 숏소드와 방패를 즐겨 사용하고 있어.’
방패를 쭉 내밀고, 상대를 견제하며 상대가 가진 공간을 어지럽히고, 밀어내며 공간 싸움에서 우세를 점한 상태로 날렵한 숏소드로 상처를 주는 것이 드낙의 기본 싸움법이었다.
여기에 상단을 기본으로 하는 롱소드의 비전인 〈스티얼 휴펜〉은 롱소드의 긴 리치를 이용한데다가 상단까지하여 적의 머리를 견제하다가 벼락처럼 베어져서 목을 베어버리거나 머리를 신경 쓰는 적의 비틀린 시야 감각을 이용하여 손목을 베어버리는 비전이었다.
머리에 가까운 사물은 더욱 위협적이고 가까이 느끼는 인간의 착시를 노린 비전이 바로 〈스티얼 휴펜〉이었다.
‘이것을 방패와 숏소드로 구현한다?’
어려움이 컸다. 고민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