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 <-- 검은 산골 마을 -->
어둠 속에서 눈이 데굴 굴렀다. 그것은 분명 눈알이었지만 그 무엇도 볼 수 없었다.
[침체되어 무엇 하나 볼 수 없는 나에게도 운명의 실이 찾아오는가?]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특이한 운명에도 그 무엇 하나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이 또한 그저 지나가겠지.]
기대감을 가지기에는 너무나도 깊게 가라앉았고, 세월은 가라앉은 만큼 흘러가 버렸다. 한 줄기의 실보다 못하고, 한 가닥의 머리카락보다 못한 것이었다.
이런 작은 운명에 눈을 뜰 정도로 고요한 곳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계속해서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았다.
“와하하하!”
용병들이 자리를 꿰찬 빈집 여러 곳에서는 연신 웃음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떠들썩했다. 드낙은 그 안을 보았다. 말이라도 잡았는지 고기 냄새가 창문 틈으로 크게 흘러나왔다.
‘잔치를 벌였네.’
술을 거침없이 마시는 용병도 보였다. 그들의 면면들을 확인한 드낙은 실망했다. 어느 판타지에나 있는 〈용병놈들〉이었다.
짐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보초를 서는 이 하나 없었다. 귀중한 것이 없을뿐더러 장물을 파는 것조차 힘든 산골 마을이었다.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막을 조금 펼쳐서 안에 있는 것들을 확인했다.
‘전쟁하러 왔나.’
중병기부터 시작해서 온갖 무기들이 한가득 있었다. 대부분 장병기였다. 리치가 긴 것이 대부분이라는 소리였다.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녹이 슨 것도 있었고, 피 냄새가 풍겼다.
‘쯧.’
철만큼 녹이 잘 스는 것도 없었다. 이렇게 관리를 안 할 것이라면 주석의 비율을 높인 청동 무기를 쓰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다른 짐마차도 내친김에 확인했다. 그만큼 시간이 남아돌았다.
‘여긴 원거리 무기네.’
나머지 한 대는 볼 것도 없었지만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온갖 생필품과 보급품들이 가득했다. 여분의 방어구 또한 보였다.
드낙은 이것을 훔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현대의 도덕심 때문이었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 새로운 삶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볼일을 다 본 드낙이 후다닥 사라졌다.
반전 따위 없었다. 용병들은 정말로 짐마차에 그 어떤 장치 하나도 해놓지 않았다. 보초도 없었으며, 제대로 된 체계가 하나도 되지 않은 마적 집단이나 다름없었다.
말 그대로 오직 칼밥과 목숨 값으로 다닐 뿐이며 현대인이 생각하는 모습과는 크게 달랐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드낙은 웬일로 아버지와 장남 녀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무 테이블에 포도주가 놓였다. 집에서 만드는 포도주였고, 제법 도수가 높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목장 일이라는 것이 야외에서 활동할 때가 많기 때문에 화기(火氣)를 높여주고 체온을 계속해서 상승시켜 유지하게 하는 도수 높은 술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부르시고. 술까지···”
장남인 세르낙과 드낙의 아버지인 할다낙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락손의 추천으로 〈검은 깃발 청년회〉의 임원 회의에 갔었다지?”
“예. 저보고 망루 잡이를 하라고 하더라구요.”
할다낙이 손사래를 쳤다. 주제를 돌리기 위함이었다.
“그건 되었다. 전부터 계속 지켜봤다. 나는 네가 이 일, 저 일 간 보듯이 건드리는 모습에 실망한 적도 많지만, 락손에게서 꾸준히 검술을 수련하는 것에는 믿음을 조금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조금이었다. 그래서 그 어떤 지원도 주지 않았다. 이렇게 자리를 한 것은 다름 결심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런 태도에 드낙은 기대감을 가졌다.
아버지 할다낙이 세르낙에게 눈을 돌렸다.
“네 형이 먼저 말했다. 네가 진짜 꿈꾸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항상 손 하나 잘리기 전에 차라리 도시로 가서 일을 하라고 말하던 세르낙이었다. 드낙은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네 형이다. 이 녀석아.”
가죽 주머니를 대뜸 꺼내서 밀어 넣었다.
“목장 운영을 하면서 제법 모아둔 돈이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똑같은 자식인데, 너한테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계속 세르낙이 말했다.”
“아버지도 똑같은 소릴 하셨으면서···무슨···”
서로가 서로에게 떠넘기는 꼴을 보면서도 드낙은 냉큼 가죽 주머니의 안을 살펴보았다.
‘은화다!’
동화도 섞여있었지만 그래도 자본금으로 쓰기에 딱 좋았다.
“갑자기 왜들 이래요?”
1인 가구가 한 달 동안 먹고 살 생활비가 바로 은화 한 닢인 것을 감안했을 때, 상당한 돈이었다. 특히나 무기나 방어구가 비싼 전투가 생활인 이곳에서 이것은 매우 큰 자본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돈이야 나중에 벌면 된다. 아니면 성공해서 갚던가.”
장남 세르낙이 괜한 소리를 했다.
“락손이 너에게 추천장이라도 써주면 도시에서 병사 노릇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 퇴역 군인이면서도 끝까지 군인으로 전역했으니 나름 잘 생활한 락손이다. 그의 추천장을 받은 이가 없으니.”
아무래도 청년회의 임원회의에 간 것이 두 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듯했다.
“고맙게 쓰겠습니다.”
술을 몇 명이나 비우면서 추억 팔이를 했다. 도수가 높은 술을 체온 유지로만 마시는 것이 전부였기에 이런 날은 특별했다. 괜히 은화를 제법 모은 것이 아니었기에 검소함이 몸에 배어있었다.
미성년자라는 개념이 없는 세계였기에 음주는 상관이 없었다. 담배가 장수의 비결이라고 말하는 곳이었다.
바로 다음날, 락손의 도움으로 용병단에 속할 수 있었다.
드낙은 가벼운 경장비에 원형 방패와 숏소드 그리고 투척 단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따로 용병들에게 임시로 원거리 장비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공짜였다.
“퇴역 군인의 추천인데 나이는 상관없지. 짧은 시간 환영한다. 〈애송이〉.”
용병들은 대놓고 드낙이 고블린과의 전투에서 오줌을 지릴지 안 지릴지 내기를 하거나, 시체를 보고 토를 할 것이다 안 할 것이다로 판을 짜기도 했다. 특히나 가장 핫한 것은 이 어린노무새끼가 고블린을 한 마리라도 잡느냐는 것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지. 개새끼들.’
드낙은 속으로 마구 욕을 했다. 락손의 영향력 때문에 드낙이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이었고, 〈쇠주머니 용병단〉의 〈용병단장 조세(Jose)〉의 말은 말 그대로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고 락손의 눈치를 봐서 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드낙은 용병단의 중앙에 배치되었다. 또한 짐꾼처럼 짐 두 개를 들어야 했다. 단련을 하고, 오랫동안 싸우는 연습을 한 드낙이었기에 가뿐했다. 애초에 방어구를 가죽 방어구로 선택했기도 해서 무게를 줄인 점도 있었다.
“제법인데? 힘이 장사네. 장사야.”
용병들은 가볍게 농을 치기도 했고
“걸리적거리면 그냥 그 정수리에 단검을 쑤셔 박을 거야. 알아들었어? 개-새끼야.”
퍽.
복부에 가볍게 잽을 넣으면서 시비를 털며 화풀이를 하는 용병도 있었다. 드낙은 그런 텃세는 가볍게 넘겼다. 거친 용병들의 지랄병은 이미 예상한 것이기도 했다. 짐마차의 피 냄새나는 장병기 수레를 봤을 때부터 예상한 것이다.
용병단장 조세는 전혀 터치를 하지 않았다.
용병이 죽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용병 33명은 각자의 짐만을 들고 〈검은 산〉으로 향했다. 그곳의 탐색이 임무였다.
“7인 1조로 움직인다. 나머지 다섯은 주변 순찰을 돈다. 그리고 너, 애송이.”
“제 이름은 드낙인데요.”
“그래 애송이 새끼야. 대답이나 해.”
“예.”
“넌 나랑 같이 간다.”
용병단장 조세는 드낙의 목덜미를 살살 치면서 하나씩 출발하는 조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목숨이 첫 번째다. 락손은 이 거지 같은 산골 마을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도시에서 제법 친했던 상단인 실버 스틱 상단은 이 마을의 모든 자원을 거래하게 되었지. 이곳은 사실상 〈락손의 장원(莊園)〉이나 다름없어.”
그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드낙에게 뒤지지 않을 이유를 말해주었다.
“손 하나 날아가거나, 다리가 불구가 되든 상관없이 살아만 있으면 되니까 알아서 몸을 사리라는 소리야. 알겠냐?”
“예.”
용병단장 조세도 움직였다. 그는 상체만 보호하는 가죽 갑옷이 전부였고, 활과 화살 그리고 단검보다는 긴 대거를 사용하는 용병이었다. 허벅지의 혁대에는 보통 화살보다 길이가 절반이나 짧은 화살깃이 없는 화살이 보관되어 있었고, 화살 통에는 여느 화살과 다름없는 화살이 30여 발이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다.
‘원거리가 특기인가 보네.’
드낙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투사체의 기울어지는 각도와 거리 감각이 절망적인 드낙은 활을 잘 못 쏘았다.
용병 33명 중 4개조가 폐광 탐색을 시작했고, 5명의 〈순찰조〉는 밖의 순찰에 임한 상황 속에서 조세와 용병들을 따라서 폐광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푹! 푸욱!
능숙하게 검집으로 흙을 파내고 그곳에 깔끔하게 쳐낸 나뭇가지를 박아 넣었다. 척 보아도 인위적이었다. 한 마디로 탐색을 한 곳이라는 표식이기도 했다.
“들어간다. 들어가서는 입 하나 뻥긋하지 마라. 폐광은 잘 울리니까. 만약에 울리면 그대로 빠져나와서 숨어서 상황을 지켜본다.”
제법 경험이 묻어있는 소리였다. 드낙은 그것을 꼼꼼하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용병은 모두 장병기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짐마차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의문스럽게 생각한 드낙은 폐광 안으로 들어오자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협소한 곳.’
당연히 장병기를 사용할 여건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둡다.’
횃불보다 긴 장병기는 그 이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의 보조로 사용하려고 해도 횃불의 명확한 시야보다도 멀리 있는 긴 무기를 어떻게 적을 견제하겠는가? 한 마디로 개소리에 불과했다.
횃불의 가시거리는 그렇게 멀리가지 못했기에 드낙은 절로 긴장했다. 중간에 있었음에도 그랬다. 용병들의 숨소리도 점점 작아들어갔다. 얇고 긴 숨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용병들의 걸음 속도를 정하는 것은 가장 선두에 선 조세의 몫이었다.
폐광은 구불구불했다. 대중없이 판 흔적이었다. 광부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구불구불한 통로였다.
사각.
단검으로 지나온 길의 방향을 표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뭐야? 앞에 빛이 보이잖아?’
드낙이 덜컥 겁을 먹었다. 반대로 용병들의 기세가 바짝 올랐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 폐광에 불이 켜져 있다는 뜻은 고블린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매캐한 검은 연기를 내뿜은 횃불이었다. 고정대에 올려져 있고, 오랫동안 타고 있었는데, 조세는 주위를 매섭게 보면서 그 밑에까지 도달해서 횃불을 빼냈다.
흙에 쑥하고 집어넣어서 불을 끄고 횃불을 둘러보았다.
“고블린의 마른 배설물이다. 검은 연기를 많이 내는 특징도 있고, 이렇게 불을 끄면 악취가 나지.”
작게 말하는 조세에게서 풍겨오는 악취에 드낙이 소리를 냈다.
“윽.”
“낄낄.”
의도적으로 냄새를 맡게 한 듯했다. 다른 용병들은 수영하듯이 입으로만 숨을 쉬고 있었다. 〈고블린 횃불〉에 다시 불이 붙어서 고정대에 놓였다.
몬스터라고해도 빛 한 점 없는 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나 고블린은 일단은 두발로 다니고, 도구를 사용하는 지성 종족이었다. 또한 밤낮 구분 없이 활동하는 놈들이었기에 아주 어두운 곳에서는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조세의 조는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보다는 아주 촘촘하고 확실하게 탐색을 이어나갔다.
‘목숨이 첫 번 째라더니. 진짜 확실하게 하네.’
조세가 멈추자 긴장의 끈을 놓지 않던 용병들이 기민하게 멈추었다. 조세가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울퉁불퉁한 통로의 벽이었다.
손가락 하나를 올리며 자신을 가리킨 조세의 수신호에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세가 혼자서 벽으로 향했다. 횃불이 보여주는 가시거리를 넘어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횃불의 빛 때문에 그 무엇도 볼 수 없었다. 양쪽 귀를 곤두선 채 드낙은 몸 하나 꼼짝하지 않고, 대기했다. 이만큼 긴장했던 적이 없었다.
뿌득. 그릅.
아주 작은 소리가 잡혔다. 그것은 뼈를 부수는 소리였고, 큰 소리를 못내는 단말마였다.
‘고블린을 잡았구나!’
“따라와.”
조세가 성큼성큼 움직였다. 울퉁불퉁한 벽에 횃불의 빛이 닿았지만 드낙은 눈만 껌뻑였다. 조세가 그 그림자 속으로 쑥하고 들어가자 깜짝 놀랐다. 그림자의 어둠을 교묘하게 사용해서 통로를 만든 것이었다.
성인 남자도 수월하게 지나갈 수는 없었지만 아주 시간을 들여서 조금조금씩 움직이면 그렇게 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폐광은 물 떨어지는 소리와 지하수가 흐르는 소리가 웅웅거렸기에 충분히 소음 없이 갈 수 있었다.
은폐된 통로를 지나자 고블린의 시체가 하나 있었다.
“보초다.”
“그럼 이곳이 고블린들의 본거지?”
용병 하나의 말에 용병단장 조세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지. 폐광의 입구가 얼마나 많은데. 그 발정나고 탐욕스러운 고블린은 잔뜩 퍼졌을 것이다.”
다시 조세가 움직였고, 횃불은 더 이상 필요가 없을 만큼 곳곳에 〈고블린 횃불〉이 밝혀져 있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한다고?’
고작 8명이었다. 미친 짓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은 드낙은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신병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외지인이 그들의 행동에 토를 다는 것은 곧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용병들의 난폭한 성질을 드낙은 결코 간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