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 <-- 검은 산골 마을 -->
락손이 앉은 곳이 바로 상석이었다. 의자부터가 남달랐고, 양옆에 검은 깃발이 덜렁 있을 뿐이었다. 드낙은 그 깃발을 보고 단번에 이 원탁 모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검은 깃발 청년회〉잖아.’
말 그대로 마을의 노동력을 행사하는 이들 중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한 마디로 〈우수 회원〉들의 모임이고, 이곳에서 결정된 의견이 청년회에 속한 〈정회원〉들에게 통보되는 식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내가 왜 이곳에 초대된 거지?’
목장을 물려받지도 못하는 차남인 드낙이었다. 이곳저곳, 하루 품삯을 받으며 일을 했지만 그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때때로는 차별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그것은 특히 락손에게 싸움법을 배우면서 더 그랬다.
‘어차피 떠날 놈이라고 함부로 하는 놈들이 많았지.’
한 마디로 일반적인 마을 청년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드낙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대장장이 말룩산부터 시작해서 도축과 사냥을 겸하고 있는 도축 사냥꾼 게릭까지 〈검은 산골 마을〉에서 활동하는 이들 중에서도 영향력이 제법 있는 이들이 원탁에 앉아있었다.
“드낙을 불러온 것은 그가 이번에 끼워도 괜찮을 만큼 싸움을 잘 하기 때문이다.”
“몸집이 고블린 같은데, 도움이 될까?”
게릭이 비웃었다. 그럼에도 락손은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직접 붙어보던가. 방패는 빌려주지.”
“흥.”
함정과 활을 사용하는 게릭이었다. 방패가 가지는 이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활이 가지는 단점을 잘 아는 것이 게릭이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이야기를 끝냈다. 다른 이들은 별생각이 없었다.
13살 먹은 애새끼에게 시비를 털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도 왔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자고.”
대장장이 말룩산이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우리 마을이 항상 거래하던 〈실버 스틱 상단〉에 줄을 놓았다. 못해도 다음 주에는 용병단이 올 것이다.”
용병단이 언급되자 드낙이 단번에 눈치챘다. 지금 이 자리는 〈고블린 토벌〉을 위한 자리였음을 깨달았다. 입술이 바짝 탔다.
‘젠장.’
락손에게서 검술을 배우고 있고, 마을의 곳곳에서 품삯을 받으며 일하는 처지였다.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아직 그는 장성하지 않았고, 더 성장해야 했기 때문에 울타리가 필요했다.
비전을 익혔기에 락손은 고블린 토벌에 드낙을 참가시킬 생각인 듯했다. 전력은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것이 좋았다. 10명보다는 11명이 좋은 법이었다. 퇴역군인이자 농장주인 락손은 1명의 차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였다.
드낙은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입을 꾹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신참의 자세였다. 입 하나 놀리지 않고, 최대한 주변을 확인하며 모나지 않는 것.
한국에서 가르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 거친 남자들의 세상에서 신참내기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못생겨도 일머리가 있다면 대우받는 것이 남자들의 사회였다. 일머리가 없어도 눈치 하나만으로도 살아남는 것이 남자들의 사회였다.
“용병대가 올 때까지 울타리를 보강을 해야 하나?”
“고블린이 어디에 숨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위험하잖아.”
“척 봐도, 검은 산에 있는 폐광 중에 하나겠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곳에 숨겨진 정보를 드낙이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정보의 폭풍이나 다름없는 현대에서 살았기에 무엇이 귀중한 정보인지, 필요 없는 정보인지는 뭣도 몰랐지만 정보를 쓸어 담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다.
원체 적은 정보로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과는 정보를 흡수하고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이 남달랐다.
“우리가 할 일은 울타리를 제대로 기능하게 하는 것과 꼼꼼하게 마을을 정찰하는 일이다. 전에 쓰러지고 보수하지 않은 마을의 목책을 다시 세워야 한다.”
“아이고야.”
“으, 그 미친 통나무···”
목책 이야기에 모두가 끙끙 소리를 냈다. 괜히 보수를 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힘이 들었기에 놔둔 것이었다. 드낙이 이곳에서 살아온 지 10여 년, 그동안 몬스터의 침입 하나 없던 곳이라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곳이라서 락손이 노년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위에서 노닐 놈이 없어서 이기도 했다.
“꼭 해야 해. 위에서 보면 고블린들이 마을에 오는지 안 오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어. 특히나 밤에는 더더욱!”
10명의 농노와 온갖 일에 나서서 촌장 노릇을 하는 락손이었다. 누구 하나 그에게 반대를 하지 못했다.
“사냥개도 고블린의 소리를 못 듣는데··· 눈알이 빠지겠다.”
불평을 하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락손과 부딪치지 못하는 원탁 모임은 사실상 락손의 통보를 하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드낙은 망루 대장이 되어라. 모두 생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너밖에 없다. 품삯은 검은 깃발 청년회의 회비로 넉넉하게 쳐주마.”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애초에 이곳에 드낙이 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바로 〈망루잡이〉의 총대를 멜 놈이 바로 드낙이었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검과 방패를 숙련할 정도로 출세욕이 있는 드낙은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쓰기 좋은 패였다.
“저보고 망루잡이를 하라고요?”
2교대의 지옥보다 못한 말 그대로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망루에서 살아야 했다. 그게 바로 망루잡이였다. 현대의 공장보다도 못한 삶이었다. 말 그대로 민간인 군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락손은 입에 침을 묻혔다.
‘역시나 눈치 좋은 놈답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드낙은 온갖 변명거리를 대고 있었다.
‘이거 하면 골병난다!’
“저같이 어린애가 뭘 알겠습니까? 망루잡이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경험이 없음을 첫 번째로 들었다.
“책임진 일을 해보지 않았는데, 아주 큰 코 다치실 겁니다.”
제대로 된 일을 책임지고 해보지 않은 것을 두 번째로 들었다.
“다른 경험자들도 많지 않습니까?”
자신보다 우월한 커리어를 지닌 청년회의 일원이 있음을 세 번째로 들었다.
“그래도 락손의 검을 배웠잖아? 웬만한 놈들은 큰 코 다칠걸.”
대장장이 말룩산의 말에 게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 높은 그도 〈망루잡이〉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중소기업에서 모든 일에 손을 대야 하는 것처럼, 이런 산골 마을에서의 방위는 한 마디로 한 명이 독박 쓰는 것이 최고였다. 편하기도 편했고 무엇보다 그런 방침을 정하는 청년회의 임원들이 편하기 위해서였다.
락손이 드낙을 보며 말했다.
“검을 배우는 것은 결국 마을을 나가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냐? 이런 기회는 흔하게 오지 않는다. 용병들이 오기 전까지 망루잡이를 하면 용병들과 함께 토벌전에 나가도록 내가 힘써주마. 어떠냐?”
실전의 경험!
몬스터와 특히 싸워본 적이 없는 드낙에게 있어서는 제법 구미가 당겼다. 고블린 토벌에 경험이 다분하고 자신 있는 용병단이 오기 때문에 안전하기도 안전할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산골 마을을 벗어나 출세해서 최소한의 노후를 보장해야 하는 드낙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미끼나 다름없었다.
‘목장의 차남.’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하고 16세가 되면 의식주의 해결도 알아서 하라고 할 것이다. 어차피 경험할 실전이었다. 거기다가 이미 고블린 한 놈을 기습으로 때려눕힌 드낙이었다.
‘꼭 락손의 입김이 있어야 용병단에 속할 수 있나?’
자신의 실력이면 끼워줄지도 몰랐다. 어린 애새끼가 후방만 잘 봐도 용병단이 조금 더 수월할 수 있었다. 혹은 짐꾼이 될 수 있었다.
‘하여간 똑똑한 놈이라니까.’
온갖 생각을 하고 있는 드낙을 보며 락손이 짜증을 내면서 입을 열기 전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물리기 없기다.”
락손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이제 죽었다!”
“망루잡이를 쉬운 줄 알고, 냉큼 받아먹었지? 말도 마라. 죽는다.”
“나 때는 말이야!”
“내가 했을 때는 말이지!”
순식간에 시끌시끌해졌다.
다음 날부터 드낙은 검은 깃발 청년회에 속한 마을 장정들과 함께 망루 보수에 나섰다. 검은 산 쪽을 보고 있는 망루는 락손의 식량창고를 턴 고블린이 온 숲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다.
‘방심하면 안 되겠네.’
드낙은 마음을 고쳐잡았다.
“허이차! 어기어차!”
마을 장정들이 악소리를 냈다. 그들의 뒤로는 황소만 한 말이 밧줄을 끌고 있었다. 무식한 통나무 하나가 겨우 올라가자마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서 밑에 파 놓았던 구덩이를 다시 덮어버리고 단단히 밧줄로 조여서 쭉 당겨 말뚝을 네 곳에 박았다.
딱! 딱! 탁!
나무로 된 망치가 나무로 된 말뚝을 인정사정없이 후려팼다.
그런 작업이 4번이나 되었다. 사실상 목책의 기본이 되는 통나무 4개를 새로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하나를 하고는 그대로 쉬어야 했다.
‘진이 빠지네. 미친 통나무.’
통으로 된 나무여야 했기에 별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목책을 건설하기에는 이 마을에 건축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런 귀중한 지식은 가문 대대로 물려질 뿐이었다.
“드낙! 너 망루잡이를 한다며?”
쉴 때마다 당연히 드낙의 망루잡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남의 고생만큼 재미난 것이 없었다. 온갖 이야기를 떠들어대자 드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대로 드러누웠다.
“내가 미쳤지.”
열정페이가 주는 경력이 아주 대단하다고 말하는 놈에게 속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락손에게서 나중에 더 받아낼 것이 생겼다고 여겨도 괜찮았다. 말 그대로 락손의 의견을 드낙이 수락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알고 있는 비전을 더 알려주지 않을까?’
무식한 목책 수리는 해가 질 때서야 끝났다. 엉성하던 목책이 새 단장을 했다. 사다리로 5m는 올라가야 했고, 그 위로 또 2개의 층이 있는 목책은 굉장한 시야를 드낙에게 주었다. 층의 가장 위가 망을 보는 곳이고, 그 밑이 드낙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화장실은 당연히 무식하게 통에다가 눠야했고, 아침 점심 저녁마다 교체가 되었다. 악취를 막기 위해서 통에는 뚜껑도 있었다.
“활은 익숙하지 않은데.”
드낙은 활을 받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연습한 적은 있을 거 아니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활을 잘 쏜다는 말을 입증하려고 한 드낙은 성대하게 쪽박을 찼다. 무려 1년을 게릭에게 돈을 바치고 얻은 결과는 〈삼류 궁수〉라는 타이틀뿐이었다. 지나가는 개새끼조차도 너보단 활을 잘 쏜다고 게릭에게 항상 들은 말이었다.
연습한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드낙은 병적으로 투사체의 기울어짐에 대한 거리감각이 망가져 있었다.
‘원거리 무기를 근거리처럼 쓰지 않고서는 명중하기 힘들다는 소리지.’
말 그대로 절망적인 재능이었다.
다행이라면 높은 곳에서 쏘는 화살은 애초에 내려보고 쏴야 하고, 중력의 영향에 편승하는 경우가 있어서 드낙도 제법 활 솜씨가 괜찮아진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낙하 속도까지 받쳐지기 때문에 강력하고도 빠른 화살이 되었다.
망루에서 지내는 일은 지겹고, 지겨웠다. 망루에서 근력 단련을 하고, 스트레칭을 하는 하루하루가 계속 이어졌다.
그 사이에 마을은 고블린에 대한 방비를 완성했고, 중개인을 통해서 용병에게 의뢰비를 주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에게서 돈을 모으기도 했다.
평화로운 일주일이 흘러갔다.
노련한 락손의 예상대로 혼자만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 마을의 존재를 은폐한 고블린인 듯 고블린은 그 뒤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용병단이다.’
망루에서 제법 멀었지만 마을을 향해서 오고 있는 용병단의 모습을 드낙은 확인할 수 있었다. 인원이 제법 되었다. 서른 명 정도로 상당했다. 짐마차가 3대가 정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금속 갑옷도 입고 있는 용병이 있는 듯했다. 나무에 가려졌기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무기일 수도 있었다.
‘이 세계의 용병들은 어떤 놈들일까?’
고블린을 때려잡고, 오크와 맞서기 위한 용병들이었다. 판타지 세계에서 칼밥을 먹고산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할 것 같았다.
‘잔혹한 놈들이겠지?’
‘생각 외로 아주 규율이 잘 잡혀있을 수도 있어.’
어느 쪽이 되었든 재미난 일이 생긴 것과 같았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망루잡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기대감은 겨우 저녁때나 되어서야 풀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미안, 미안! 용병단을 처음 봐서···”
드낙이 진심으로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쳤다. 소리를 지르는 연습을 할 정도로 심심한 삶을 살았던 드낙이었기에 뽑아내는 성량이 엄청났다. 꿈찔해서는 마을 청년이 괜히 웃으면서 교대를 했다.
후다닥!
드낙이 달려갔다. 당연히 용병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어린아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속은 달랐다. 자신 또한 칼밥을 먹고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루한 산골 청년이 노후를 위해서라면 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