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276화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고, 반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으로 들어오는 령이와 미료. 그런데 상태가 영 메롱이었다.
“뭐야? 꼴이 왜 그래?”
“헤헤헤... 힘 조절이 좀 안 돼서.”
바스락!...푸스스ㅡ....
아무래도 좀 과한 힘을 준 모양이었다. 하긴 늘 과하게 주긴 했었다. 그래도 애들은 금방금방 소화했는데 령이는 역시 아이들만큼 재능이 있진 않은 모양이다. 벌써부터 저렇게 삐걱거리는 걸 보면.
온몸에 얼음 덩어리를 덕지덕지 붙이며 나타난 령이, 머리도 얼려버렸는지 긴 생머리가 어깨 위로 오는 단발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미료는...
“쟤는 왜 저래?”
“그게, 그냥 톡 건드렸는데 얼어버렸어... 얘 좀 어떻게 해줘.”
“...후우...”
얼음덩어리가 된 미료는 령이의 터치에 반응하던 그 표정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 모양에 한숨을 쉰 반화는 령이의 힘 조절 훈련이 급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래가지고서야 집에 데려갈 수도 없었다. 저러다 가족들을 얼릴 수도 있을 테니.
“일단... 파스, 얘 좀 녹여 봐.”
[옙!]
냉동이 된 미료를 조심스럽게 녹이는 파스, 살아 있는, 그러나 얼어버린 생물을 녹이는 건 세심함이 필요한 작업이었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반화가 직접 했으면 금방 끝났을 테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령이가 이 모습을 보고 느끼라고 그런 것이었다. 힘을 조절하지 못하면 소중한 사람이 순식간에 얼음덩어리가 된다는 사실을... 물론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으허허헉! 허어억! 헙...”
머리가 녹으며 숨통이 트인 미료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도 엄살이었다. 굳이 구강호흡 하지 않고 마나호흡으로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저런 모습이라니, 오버였다. 라고 생각하는 건 이 자리에서 반화밖에 없었다. 인간이라면, 아니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냉동이 되었다가 녹으면 저런 모습을 보여야 정상인 것을... 반화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미료가 정신 차리길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덜컥!
“폐하!! 지금 요괴들이!”
“끄응... 살살, 살살 말해요. 좀.”
이제 막 녹아내린 미료가 녹초상태에서 힘 빠진 목소리로 방금 문을 열고 들어 온 이에게 말했다. 얼려있는 동안 긴장해서 힘을 과하게 쓴 건지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옙! 그러니까... 밖에 요괴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요괴요?? 제국의 앞은 수호신들이 지키고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아서...”
“규모가요?”
[그 독왕가라는 놈들이 크로마족이라는 놈들을 먹고 지금 이 대륙을 휩쓸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멀쩡한 곳은 제국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감염체가 널리 퍼져있으니 확산 속도가 빠르네요.]
파스가 반화에게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감염이라는 게 전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요괴들이 넓게 퍼져있는 이곳이나 인구가 밀집된 지구 같은 경우에는 그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놈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쫓던 크로마족을 모조리 삼켜버리고 이제는 요괴들로 눈을 돌린 상태였다. 지금은 레이브와 북요가 제국으로 통하는 입구를 지키고 있어 괜찮았지만 인간이 들락날락하면서 분명 구멍이 생길 것이 분명했기에 지금 달려 온 자는 급했다.
“가자. 그거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다 정리해야 돼.”
“네? 아... 네. 가서 전해주세요. 당분간 일단 나가지 말고 대기하라고요. 누구든지.”
“??예.”
반화의 말에 황급히 명령을 내리면서 반화와 령이의 뒤를 쫓아가는 미료... 왠지 심상치 않았다.
.
.
.
“완전히 바뀌었군.”
“우리가 기억하던 지형과 달라진 건 아니지만 요괴와 인간의 구역이 완전 바뀌어 버렸어. 그리고 저기는... 괴상한 것이 자리 잡고 있더군. 녀석들이 가까이 가는 것도 두려워해.”
감염체가 뭔가를 두려워하는 건 그들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일단 요괴들을 감염시켜 수를 늘리고 있었는데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해서 주저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보낸 존재에게 이 사실을 알려도 봤지만 어쩐지 대답이 없었다. 거기에 돌아가는 길도 막혀버려 난감한 상황에 빠진 독왕가의 인간들.
“추가 병력은 없는 건가?”
“연락할 길이 없다. 그분이 우릴 버리지 않았다면 분명 답을 주시긴 하겠지. 우린 그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칸 대륙으로 넘어온 독왕가의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들은 감염체의 원점이기 때문에 사실 처음에 감염체를 뿌릴 때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지시를 내릴 때만 필요하기에 많은 수가 있어 봤자 였다. 하지만 이렇게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서 강한 자가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지금 독왕가의 다른 인원들은 또 다른 세상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을 텐데 그들보다 빠르게 세계를 지배해야만 얻을 수 있는 힘이 컸다. 그걸 조금 더 나누더라도 강한 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냥 욕심내지 말고 아르지너트 대륙부터 정리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저것만 뚫으면 이 세상도 정복 할 수 있어. 그럼 그분도 다시 우리를 불러들일 거다.”
“그렇겠지.”
쉽지 않아 보이지만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감염체의 원점. 얼마든지 계속 감염체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거기에 저 괴물들 안에는 인간들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인간들의 흔적이 밖으로도 이어져 있는 걸 보면 분명 저들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감염체 하나만 그들을 통해서 넣어버리면 끝이었다. 그리고 나면 저 괴물들만 요리하면...
...
“응? 저것들은 또 뭐야? 요괴인가?”
“뭐, 비슷한 것들이지. 쓰레기라고 보면 돼.”
“쓰레기?”
“어. 지금부터 니가 해야 될 건 저 쓰레기들을 치우는 거다.”
“응?? 내가??”
“주체하지도 못하는 힘 마음껏 쓰라는 나의 배려다. 알겠냐?”
“...배려 같은 소리하네. 귀찮아서 그렇지? 맞지?”
령이의 말에 반화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니까.
그리고 그런 반화의 모습에 한숨을 쉰 령이, 그래도 지금 이게 필요하다는 건 알기 때문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정도의 힘이면 저런 것들은 말 그대로 그냥 쓸어버릴 수 있기에 그리 힘든 작업도 아니었다. 원래 쓰레기를 줍고 버리는 것도 힘든 일이 아니고 귀찮은 일 아닌가? 똑같았다. 아니,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했다.
...
“푸헤헤헤헤!!!”
“...괜찮은 거겠죠?”
“글쎄다..? 힘을 주다가 머리를 건드렸던가?”
령이의 모습에 미료가 걱정스러운 듯 반화에게 물었지만 반화도 확실할 순 없었다. 힘에 취해서 미치는 경우야 흔한 거니까. 아무리 반화가 정화를 해서 줬다고 해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힘을 갑자기 가지게 되면 충분히 미쳐버릴 수가 있었다.
지금 령이는 칸 대륙을 아예 얼음 왕국으로 만들어 버릴 생각인지 사방팔방으로 힘을 쏟아내고 있었다. 반화가 준 힘이 워낙 크긴 하지만 저런 식으로 쓰게 되면 금방 방전이 되어 버릴 건데...
“으허...히, 힘이 쭉 빠진다아아... 취한 것 같다아앙...”
“령이님!”
아니나 다를 까 바람 빠진 행사장 인형처럼 흐물거리는 령이를 황급하게 미료가 뛰어가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 힘을 다 써서 저렇게 되었다기보다는 힘을 쓰는데 몸이 적응이 안 되어 체력이 부족한 것이었다. 예전에 순이도 그랬고 아이들도 처음 힘을 가졌을 때 다 저런 걸 보면 모두가 겪는 성장통이 아닐까 싶었다.
미친*처럼 힘을 뿌리고 다니던 령이가 지쳐서 헤롱헤롱 거리는 걸 본 반화가 혀를 차며 주위를 한 번 살폈다. 거의 1/3 정도는 정리 한 것 같았다. 대신 아직 감염의 원점을 잡지 못해서 금방 복구될 것이 뻔했다.
“잘 됐네. 당분간 얘 힘쓰는 법 좀 조절하는 훈련도 하고.”
[그런데, 대륙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감염체들은 그렇다 쳐도 땅이 문제였다. 아르지너트 대륙처럼 위에서 계속 난동을 부리면 대륙이 찢어지고 망가질 수도 있었다.
“노에라 좀 불러 와. 그리고 땅 속성 가진 애들 없어?”
[없습니다만.]
단호한 파스의 말.
“...뭔 놈의 애들이 다 부수고 망가트리는 힘만 가졌냐?”
그게 다 반화가 준 힘이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 파스였다. 해봤자 돌아오는 건 팍!씨! 와 같은 협박일 테니. 대신 다른 의견을 내었다.
[아! 롱이가 있지 않습니까? 세계수도 있고, 아니면 엘프라도.]
“아, 그러네? 그 녀석 요즘 뭐해?? 통 보이질 않네.”
[지금 아마 가족 분들과 있을 겁니다. 이사했다는 말에 왔던데요?]
사실 파스도 그래서 알았다. 이사한 집에 롱이와 세계수가 와서 정원을 꾸며주고 있는 모습에...그리고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게 아니라 찾질 않으니 보이지 않았던 거였을 뿐이었다.
“아직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좀 있다 불러야지. 정원은 잘 꾸미고 있대?”
[예, 아주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푸롱, 듀스, 그리고 작게 크로롱 연못 까지 만들고 있네요.]
이사한 반화의 집은 롱이와 세계수 덕분에 별장을 축소해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어쨌든 아직은 겉만 살짝 얼어 있고 그 범위가 작은 상태라서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이렇게 두면 감염체가 얼어있는 부분으로 확산되는 건 막을 수도 있었다. 령이의 힘이 뿌려진 곳이라 감염체도 두려워 할 테니.
“쟤 챙겨서 일단 별장으로 가자.”
“예!”
“으허어어... 어지럽다아아...”
아직도 헤롱거리는 령이를 챙겨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반화들...
.
.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괴물이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우리끼린 절대 해결할 수 없어!”
“그분은 아직도 답이 없어...”
“후우... 일단은 멈췄어. 아마 힘을 다 썼겠지. 지금 빨리 해결책을 짜야 돼.”
갑작스럽게 령이에게 당한 독왕가와 감염체들은 황급히 도망쳤다.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힘을 가진 존재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을 줄 알았는데...
“분명 인간의 모습이었어.”
“젠장... 요괴들도 이렇게 부릴 수 있는데 저런 놈이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지?”
그들이 예상했던 상황과는 너무 달랐다. 칸 대륙이라는 걸 확인하고서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요괴들과 인간들의 지역이 바뀌어 있질 않나, 인간들을 괴물들이 지키고 있질 않나, 이젠 아예 인간이 자신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있었을 때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령이 때문에 그 생각이 완전 바뀌어버렸다. 시간은 결코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다. 지금은 힘이 빠져서 빠진 것 같지만 다시 힘을 충전한 그 인간같은 괴물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 뻔했다.
“수를 써야 돼. 극단적인 방법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