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화 #
251화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든지 말든지 삼이는 뿌듯했다. 악마(?)의 손에서 동생을 구해냈으니까. 그사이 본가로 쳐들어가려던 반화는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이내 다시 누웠다.
“귀찮다.”
“...그것마저 귀찮아?”
“어, 에이... 뭐 그냥 출산기념 선물로 치지.”
“그런 선물도 있어?”
“없을 건 뭐야?”
“그러네. 인간들은 뭐든 이름만 붙이면 알아서 이야기를 만드니까.”
따뜻한 온수매트에서 벗어나기 귀찮았던 반화는 대충 핑계를 대고 다시 누워 입을 벌렸다. 령이가 황당한 듯 보다가 결국 또 귤 시중을 들어줬다... 힘을 빨리 받아야 하니까.
“근데 진짜 나 힘 언제 줄 거야? 진짜 줄 거지?”
“쯧. 누가 안 준대? 준다니까? 나 약속은 지킨다?”
“약속은! 지키겠지. 언제 일지 몰라도.”
“믿어, 믿어. 좀 금방 줄 테니까. 음? 입이 비었네?”
“으으으...”
반화의 말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멈추지 않는 손은 귤을 까서 부지런히 반화의 입속에 집어넣었다. 가끔씩 코도 파면서.
.
.
.
“으음...”
결국 그 상태로 잠에 빠졌던 반화네 식구들. 가장 먼저 일어난 반화가 눈만 말똥말똥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음... 아직... 저녁시간이 아니네.”
꽤 오래 잔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진 않았다.
-밥!?...으먀냠냐?
“이런 건 또 귀신 같이 듣네. 아니야. 더 자.”
밥 소리에 벌떡 일어난 삼이를 다시 재우며 반화도 그대로 뜨끈하게 몸을 지졌다. 역시 겨울엔 몸을 지져 줘야했다. 외부 온도에 대한 것들을 완전 무시 가능한 반화이지만 그런 반화조차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위대한 발명품, 온수매트의 힘이었다.
“이 놈의 쥐를 찾긴 찾아야 하는데...”
자고 일어나니 생각나는 한 녀석.
“파스, 어때? 흔적은 좀 찾았어?”
[전혀...못 찾겠습니다. 어디서 사라진 것도 모르겠습니다.]
“흐음... 집에서 나간 흔적 없지?”
[아!...예! 없습니다. 별장으로 간 흔적도 없습니다. 그럼...]
“집에서 사라진 거네. 집에 마가 꼈어. 뭐가 자꾸 달라붙는 건지. 굿을 한 번해야 하나.”
[굿 할 필요가 있을 까요...? 신도 무서워서 도망갈 것 같은데.]
파스의 말해도 신이 있어도 도망갈 것 같았다. 신이 정말 전지전능하다하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신화로 내려오는 신들의 힘이면 여기서 그 정도는 그냥 아이들 손에서 정리가 될 것이다. 굳이 반화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가? 흐음... 의지라...의지가 뭘까...”
차원을 넘어서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는 의지. 자신의 기감에도 감지되지 않는 의지라는 것에 반화가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다 잠에 취해 있어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상황이라 집중하기 편했다.
“파스, 너도 일종의 의지로 움직이는 건가?? 인공지능은 뭐지? 정령들이 태어나는 것도...흐음... 의지라...”
파스는 처음으로 진지한 모습의 반화를 보며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늘 가볍고 협박만 일삼는 괴물인 줄 알았는데 이런 모습이라니... 과연 저런 괴물 같은 힘을 얻은 것이 운으로 얻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그런 건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계산으로는 분석이 불가능한 영역이라... 차라리 그 해골에게 묻는 것이 어떻습니까?]
무슨 연구하는지는 모르지만 해골씨가 조금 그런 쪽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종족을 만드는 것 같은데 육체는 얼추 만들었고 지금 그 환경과 살아 있는 정신을 집어넣어야 한다는데 아마 의지와 관련된 연구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해골!!!”
쿵!!!
-웅!?
-뺘?!
-아고, 깜딱이야! 아빠! 놀랐잖아요!
“어? 어, 미안하다...”
생각에 빠져 아이들을 잠시 잊었던 반화는 자신이 해골을 부르는 소리에 털복숭이들이 죄다 털을 바짝 세우고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얌전한 맹이가 소리 지른 걸 보니 많이 잘못한 모양이다. 하긴 꿀잠을 깨웠으니.
맹이의 박력에 사과한 반화, 그리고 잠시 후...
“불렀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아니, 뭐... 무슨 일 있는 건 아닌데.”
헐레벌떡 뛰어 올라온 해골씨가 사방을 휙휙 둘러보더니 반화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어마어마한 소리로 큰일 난 것처럼 불렀는데 아이들에게 마스터가 구박받는 모습뿐이었다.
“예...?”
“물어 볼게 좀 있어서.”
“아니, 그럼 그냥 의지로 하시면 되는데...”
“아~ 맞네. 그러...어?? 방금 뭐라고 했지?”
“예?...???”
오늘따라 마스터가 왜 이러는 건지... 해골씨가 이상한 표정으로 반화를 쳐다봤다. 그러나 반화의 표정은 엄격, 진지했다.
“의지로 하라고 했지... 그걸 왜 생각 못했지?”
너무 어렵게 생각한 듯했다. 아니면 너무 그냥 물 쓰듯 자연스럽게 쓰고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늘 쓰고 있는 걸 고민하고 있었다니.
“괜히 고민했네.”
“근데 저는 왜???”
“어? 아, 온 김에 밥이나 좀 해라. 애들 다 깨서 저녁 먹어야 되니까.”
“!?!!!”
노에라가 없으니 이제 식모살이는 해골씨가 하게 되었다. 해골씨가 황당해서 반화를 멍하니 바라봤지만 반화의 성의 없는 손 휘저음에 힘없이 돌아서서 주방으로 들어간다. 이놈의 집구석... 망했으면 좋겠는데 망할 일이 없어서 참 슬펐다. 그리고 갑자기 노에라가 보고 싶어지는 해골씨였다.
해골씨가 주방으로 들어가고,
“그럼 일단 의지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겠는데 이걸 차원 너머로 보내는 건 나도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나랑 파장이 맞는 놈한테 의지가 전해질까? 흐음....”
직접 소환을 한번 해볼까 고민하는 반화, 한번 해보면 어떤 원리인지 알 것 같았다.
.
.
.
“..으득...”
작은 쥐의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고 크게 동굴을 울렸다.
“저... 그래도 아직 완전 거짓말은 아니지 않나요?”
“그걸 어떻게 믿어? 약 파는 놈들 말을.”
“약은 안 팔았는데...”
“시끄러워.”
“옙!...”
잠시 초룡의 움직임도 멈추고 깊은 고민에 빠진 노에라. 과연 저 오글리의 말을 믿고 계속 이 방향으로 가도 되는 것인지 노에라도 선택할 수 없었다. 저 녀석 말이 틀리다고 해도 어디로 가야되는지도 모르고 정말 그 도시가 있는지도 이제는 모호해졌다.
“하아...젠장... 어쩔 수 없나?”
“역시 계속 가야겠죠?”
“넌 좀 닥치라니까! 거기에 고깃덩어리로 계속 매달려있고 싶지 않으면.”
“헙!”
분위기 파악 못하고 계속 나불거리던 녀석이 노에라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열리는 순간 고깃덩어리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토끼 같은 자식... 귀때기를 잘라 버릴라.”
흠칫!
귀는 밝아서 노에라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녀석이 몸을 떨었다. 생긴 것도 토끼이지만 하는 짓도 토끼였다.
“후... 어쩔 수 없나. 일단 가는 방향으로 계속 가보는 수밖에.”
돌아갈 곳도 없는데다가 방향이고 거리고 아는 건 하나도 없는 녀석 때문엔 노에라는 머리가 지끈 아파오려 했다. 제일 중요한 게 정보인데 그게 머릿속에 하나도 없는 녀석이니... 이 녀석을 써 먹을 곳은 하나 밖에 없었다.
“으아아아!? 어!?오웅! 으억! 살려 주세요!!!”
“일단 좀 굴러라. 생각 좀 하게.”
“!? 생각하는데 저는 왜?!”
“네 그 멍청한 얼굴만 보면 열불이 솟아서 생각이 안 돼. 옳지! 그 표정! 그 표정이 딱 좋아.”
어째 점점 노에라의 훈련(?)이 과격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오글리 녀석이 죽어라 훈련장을 도는 것을 보며 노에라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맘 편히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
덜컹!
“음? 또 뭐지?”
이번엔 또 뭔가에 막힌 듯 토룡이 멈췄다. 생각에 빠졌다가 깨어난 노에라는 잠시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 멍 때리고 있었는데...
쿠웅!!!
“어??! 무, 무너지는데요!?”
토룡의 굴이 무너지면서 토룡까지 찌그러졌다. 아무래도 위쪽에서 뭔가 강한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흐음, 우릴 알아차리고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토룡을 목표로 하고 충격을 줬다고 말하기엔 뭔가 약했다. 지하 깊숙이 돌아다니는 토룡을 알아차릴 정도면 이정도 충격만 줬을 리 없을 것이기에 노에라는 위쪽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가정을 했다.
“어, 어떡하죠?? 이러다 생매장 되는 거 아니에요?”
“좀 호들갑 좀 떨지 마. 입만 있어도 살아날 놈이.”
“...에이... 아무리 재생력이 좋아도 그럴까 봐요?”
“왜? 궁금해? 해볼까?”
“아닙니다!”
잠시 고문...아니, 훈련을 안 했더니 또 입을 나불거리는 녀석에게 신경 쓰기 보단 위쪽의 상황에 신경을 쓰기로 한 노에라는 가볍게 녀석을 조용히 시키고 다시 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으음... 일단 올라가 봐야겠어.”
“예?? 위, 위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아깐 생매장 되는 거 아니냐며? 생매장 안 당하려면 올라가야지.”
“아니, 그건...”
어차피 오글리의 말 따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던 노에라였다. 이미 토룡은 위로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쿠궁!... 쿵!
올라갈수록 선명해지는 쿵쾅 소리.
“뭐야, 여기...?”
스윽...
“헉! 크로마족입니다!”
“응?? 크로마족? 그게 뭔데??”
“이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놈들이에요. 저 놈들 때문에 우리 종족이...”
“아~ 그럼 쟤들이 주류 종족이라는 거구나?...근데 왜 쟤들 생긴 게 다 자기주장을 하고 있냐? 같은 종족 맞아? 그리고... 저거 지금 풀루 감염된 거 맞지?”
“역시... 크로마족도 풀루에 감염 되었나 봐요.”
땅 속에서 나온 노에라는 지들끼리 싸우고 있는 놈들을 발견했다. 오글리의 설명에 따르면 저 놈들이 이 세계의 주류 종족이라는 건데. 보아하니 저놈들도 풀루 때문에 지들끼리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검은 핏줄이 선명하게 온 몸을 뒤덮은 녀석들을 상대로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놈들이 공격을 가하고 있었는데 저놈들의 덩치가 거의 덩치의 반만 했다. 그리고 주류 종족이라는 믿음이 확 가는 게 무력 수준이 오글리 녀석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호오... 잘 싸우는데?? 저 정도면 지구의 능력자들이라고 부르는 녀석들보다는 낫겠어.”
“지구요?? 지구는 어디에요?”
“니가 나를 불러 낸 곳.”
“아... 그 세상에도 무시무시한 크로마족들과 비슷한 종족이 있군요.”
“무시무시하긴 그냥 인간들일 뿐인데. 무시무시하다는 말은 저런 놈들한테 쓰는 게 아니야.”
“??”
“있어. 그런 게... 젠장... 옆에 있을 땐 그렇게 괴로웠는데 지금은 정말 보고 싶네... 그 괴물들이.”
노에라는 삼이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떠오르는 솜방망이를 떠올리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나 그런 감성적인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풀르에 감염된 종족을 거의 다 처치한 녀석들이 땅 위로 올라온 토룡을 발견해버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