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215화
“이것들이..”
자신들을 욕하는 소리에 백호대가 사람들을 노려봤지만 평소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의 태도.
“언젠가 천벌 받을 줄 알았다 이놈들아!!”
“지옥에나 가라!!”
“조용히 못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스릉!
결국 검을 꺼낸 백호대가 사람들에게 겨누자 조금 주춤하는 듯 했다.
휙!!
퍽!!
“!”
“어디 신령님 앞에서 검을 꺼내느냐!!”
백호대가 미처 보지 못한 돌멩이 하나가 맨 앞에 있던 백호대원을 맞췄다. 동시에 터진 노호성이 돌멩이를 던진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었다.
“저, 어린놈이!!”
아직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어린아이가 주먹을 허공에 흔들며 소리치는 모습을 본 백호대는 어이가 없었다. 젖을 뗀지도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어린 애가 그들을 보며 저런 소리를 하다니...
척!
“감히 백호대를 공격한!...!!!”
아이를 향해 걸어가던 백호대원이 갑자기 온몸을 진동시키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다가 거품을 물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천벌이다!!”
“와아아!!!”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확신했다. 천벌이 백호대원을 향해 내려졌다고.
“삼이야...? 왜?”
-애기한테 상한 기운을 풍기면서 가잖아!
“너도 애기야.”
-삼이는 다 컸어!
단순히 삼이의 변덕일 뿐이었지만 사람들이 제멋대로 받아 들였을 뿐이다. 자신이 다 컸다고 주장하는 삼이, 하긴 배는 다 큰 것 같다. 그렇게 먹고 계속 들어가는 걸 보며.
“자꾸 야채 아빠한테 넘기지 마라? 다 컸다며.”
은근슬쩍 계속 반화한테 먹기 싫은 걸 넘기던 삼이가 반화의 말에 움찔했다. 그러더니..
-아니야, 아빠 건강해지라고 주는 거야. 티비에서 봤어! 늙으면 골고루 먹어야 된대.
“...”
물론 반화가 많이 늙긴(?) 했다. 얼마나 살았는지 그도 모르니까... 지금 주변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화와 아이들의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어울렸다. 신령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겐 이 모습이 마치 그들만의 세계에서 사는 존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어떻게 보면 진짜 신령 같은 모습이긴 했다. 남들과 좀 다른 세계를 살고 있으니까.
“애랑 그만 놀고 해결 좀 하지??”
령이가 보다 못해 반화에게 눈치를 줬다. 남들 신경 안 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도 이제는 그냥 개무시하고 지들끼리 노닥거리다니..
“응?? 왜 저러고 있어?”
“너 때문이잖아!! 너랑 삼이!!!”
이제 보니 무시한 게 아니라 그냥 아예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삼이가 다 처리 했는데?”
“뭘 처리 했다는!...???”
털썩!! 털썩!!!
반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호대원들이 썩은 나무마냥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언제 이런 것일까...
“맹이, 이제 배부르지?”
-응!
맹이 배도 채웠겠다, 슬슬 자리를 옮기려는 반화.
“뭐야, 뭐해 거기서. 안 갈 거야??”
“...”
령이와 미료를 보며 손짓하는 반화. 소가주는 아예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해온 것이 있으니 집 하나 날아갔다고 저런 꼴이 된 것일 뿐이었다. 주위에 잘했으면 오히려 동정을 얻어 그 마을에서 잘 살고 있을 터였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집만 날렸다. 물론 재산도 조금 털긴 했지만... 정말 조금일 뿐이다.
“소..소가주님은..?”
“저자는 내 가문을 멸문 시킨 자이다!! 그런 자를 따를 생각이냐!?”
“...”
“뭐해? 가자.”
령이가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하는 미료에게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미료는 결국...
“네깟 년이!!! 나를 버려!?”
“쯧, 저럴 줄 알았어. 버리긴 뭘 버려? 쓰레기는 원래 줍는 거 아니야. 가자.”
뒤에서 차마 달려들지는 못하고 소리만 지르는 소가주를 보며 령이가 미료에게 말했다. 아까와 달리 결단을 내린 미료의 표정은 단호했다.
“네.”
돌아서자 바로 막말을 하는 그를 보며 미료는 다시 한 번 자신이 그저 장난감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은 씁쓸했지만 자신을 동생처럼 챙겨주는 령이 탓에 금방 그런 감정은 지워 버릴 수 있었다.
...
반화 일행이 너무 태연하게 떠나는 바람에 얼떨떨한 사람들. 천천히 쓰러진 백호대에게 다가간 사람들은 이내 그들이 절명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어...어떡하지..?”
이렇게 처리하고 그냥 가버릴 줄은 생각하지 못한 지라 사람들도 난감했다.
“그런데... 얼굴 기억나는 사람??”
“멍청한 놈! 그것도 기억 못!...어?? 여신님이 굉장히 예쁜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어떤 얼굴이었는지 모르겠네..?”
바보 같은 모습에 옆에서 호통 치려고 했던 남자는 도리어 자신이 의문에 빠졌다.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이목구비... 그 두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랬다. 딱 두 사람 빼고.. 소가주와 아까 돌을 던진 꼬마만이 반화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둘은 반화의 변덕으로 기억을 잃지 않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뼛속까지 기억 속에 남아 자신을 괴롭힐 존재로, 다른 사람은 평생의 이상향이 될 모습을 가진 존재로 기억에 새겨졌다. 아무도 모르게...
.
.
.
“...결국 이렇게 될 거였나...나이 들었다고 봐주는 거 없구나.”
“너도 조심해, 저 악마는 그런 거 없으니까.”
한쪽 구석에 쭈그려 민사장과 랑이가 조용히 소곤 거렸다. 지금 사무실 상황은...
“그러니까 그냥 사실대로 말했으면 좀 좋아? 응?”
“...”
저렇게 패놓고 대답을 하길 바라는 건 너무 양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누구도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해골씨 조차..
“다른 인간들이 쫒아 왔다라... 그것도 이쪽의 물건을 이용해서? 신기한 일이군... 혹시 그쪽 세계도 이곳과 비슷한가?”
“아니, 달라. 그쪽에서는 이쪽의 무기를 만들 능력이 없어.”
해골씨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순이가 반화와 함께 갔었던 곳의 풍경을 생각하며 말해줬다. 그 정도로 발달된 곳이 아니었다. 문명의 발전에 중요한 하수처리 시설이 그 정도 수준은 되지 않았던 곳이다. 아직 말을 타고 다니는 곳에서 그런 무기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가?? 흐음... 그럼 이 인간이 또 거짓말을 하거나, 또 다른 게이트에서 인간들끼리 접촉 했던가 둘 중 하나겠는데?”
거짓말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순이가 검신을 노려봤다.
“아, 아닙니다! 절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근데 넌 왜 왔어? 용 보러 왔다는 개소리는 집어 치우고.”
“...그게...”
역시 용을 보러 왔다는 얘기는 핑계였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끄나풀들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온 것일 뿐이었다. 그렇게 했음에도 결국 다른 왕가 놈들이 알아차리고 쫓아 왔지만...
구구절절한 검신의 내용은 이 자리의 누구에게도 어떤 연민의 감정을 주지 못했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이미 반화에게 치일대로 치였던 자들이라 감정의 기복이 굉장히 짰다. 그런 반응에 검신은 조금 당황했다.
“도와주십시오! 수많은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 곳에까지 영향이 갈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니들 일이고. 여기로 까지 넘어 오면... 뭐... 귀찮게만 하지 않으면 상관 안 할 걸? 아닌가?? 아예 니네 세계를 날려 버릴 지도 모르겠네?”
순이가 반화를 잠시 떠올렸다. 고양이인 자신보다 더 변덕쟁이인지라 어떻게 할지는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 그리고... 지금 니들 세계에 폭탄이 하나 있거든? 그게 터지지 않길 바라는 게 좋을 거야. 아, 하나가 아닌가??”
“!!!?”
“그건 그렇고... 파스?”
[..예?]
“다른 게이트 어디 있는지 몰라? 여태 그런 것도 말 안 해주고 뭐했어?”
[저도 할 일 많은데...요?.. 아닙니다!! 지금 바로 찾겠습니다!]
“그래야지. 얼른 찾아?”
잠시 반항하려던 파스를 간단하게 제압한 순이.
“그리고...”
다시 검신을 바라보는 순이.
“가자.”
“예??”
“가자고. 너 쫓아 온 놈들 있는 곳으로.”
“!!!도,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여기 무기를 쓰는 건지 궁금해서 말이야. 해골.”
“...난 빠지고 싶은데?”
순이의 말에 해골씨는 찝찝한 듯 거부했다. 순이와 엮이면 끝이 분명 좋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따라 와.”
“...”
선택권은 없었다.
해골씨를 간단하게 부려먹는 순이를 보며 민사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가장 오래 반화의 옆에 있던 존재다웠다.
[게이트 찾았습니다!]
마침 파스가 새로운 게이트를 찾았다고 연락해 왔다. 게이트의 위치는...
“중동이네요??”
“중동?”
“음... 그러니까 여기가.. 지금 좀 복잡한 곳인데요? 아마조네스라고 들어 보셨..큼.. 여튼... 좀 상황이 복잡한 곳입니다.”
아마조네스, 중동에서 억압받던 여성들이 들고 일어나 사우디 왕조를 무너트리고 세워진 왕국이었다.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여왕이 다스리는 군주제의 왕국으로 지금 복잡한 상태에 놓인 곳이었다. 아마 상황이 복잡한 곳이라서 게이트를 발견하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장 큰 이유는 파스가 신경을 안 쓰고 있었던 탓이겠지만.
“어쨌든 일단 가자고.”
“반화씨가 아무 말 안 할까요...?”
민사장이 걱정된다는 듯 했다. 분명 가면 사고 칠 것 같은데 괜히 안 말렸다고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웠다. 그래도 이제 가족이라 죽지는 않겠지만 두려운 건 두려운 것이었다.
“몰라! 알게 뭐야! 흥!”
“...?”
왜인지 반화에게 삐진 듯 한 순이였다. 당연히 이유를 모르는 민사장은 황당할 따름이었지만 같은 집에 사는 랑이와 해골씨는 어느 정도 짐작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가 귀찮다고 안 쫓아갔으면서 왜 승질이야... 에휴... 제발 가라, 집에서라도 쉬게.’
랑이가 순이를 보며 기도했다. 제발 게이트 안으로 가라고. 반화가 령이랑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에서 계속 승질만 내는 순이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집에서!
“뭐해? 가자니까?”
“...난 바쁜데.”
소심하게 거부해 보는 해골씨였지만...
스윽..
“간다! 자자, 진정하라고... 사우디라고 했나? 음... 여기겠군. 자~”
쩌적!...
순이의 손이 올라가는 걸 본 해골씨가 재빨리 공간을 열어 저 안으로 쑥 들어가고 순이가 엉망이 된 검신을 들고 사라졌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쉰 랑이. 당분간은 집에서 잘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쪽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오래오래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랑이. 그녀의 바람대로 순이는 과연 저쪽 세상에 오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새 자기 성질을 못 참고 다 때려 부수고 일찍 돌아 올 것인가? 아니면...
“저러다 마스터한테 들켜서 귀때기 잡혀서 오는 거 아냐? 아닌가? 그전에 다 때려 부수려나?”
“...왠지 그럴 것 같은데요?”
민사장이 랑이의 혼잣말에 동의했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일단 저쪽 세상은...
“지구에 살아서 행복하네요.”
아니, 반화의 집이 있는 한국에 살아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