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꿈틀거리는 세상 #
160화
그들이 게이트를 넘어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바로 은신처를 찾는 것이었다.
“악몽이 없는 세계로 다시 이동하기 위해서 에너지가 필요한데...”
“어디로 가야할까요...?”
“거대한 기운에 우리의 기운이 드러나지 않는 곳으로 가야한다.”
일단 인간 몇 명을 이용해 지구의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그들의 몸만 잘 숨기면 악몽, 즉 반화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마왕이 이내 방향을 잡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기운을 너무 많이 사용해 이동도 힘들지만 녀석은 마왕이었다. 남의 머리 위에서 그들을 조종하는, 한때 이 세계를 집어 삼킬 뻔한 종족의 왕이 겨우 이 정도에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라 다짐하며 조금씩, 조금씩 어딘가로 이동하는 그들은 멸망한 세계의 마지막 생존자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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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로 넘어갔다고?”
[예...]
“어느 게이트?”
[일본 쪽 게이트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추적은?”
[그게... ]
“쯧... 됐어. 그냥 내버려둬. 옹이랑 관계는 없는 녀석이니까.”
놈들이 옹이에게 했던 일을 알아차렸을 때는 너무 열 받아서 관계가 있든 없는 그냥 죄다 죽여 버렸지만 사실 몇몇 놈은 옹이와 관계되지 않았었다. 그냥 마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자신의 종족을 지배했을 뿐인 녀석들, 자신의 눈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굳이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다 죽여 버리고 세계도 지워버렸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놈들이 얼마나 처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반화. 사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나저나 시커먼 놈 하나 내보내니까 또 시커먼 놈 하나가 들어 왔네?”
새로 지어진 별장의 마당에 앉아 있는 까망이를 보며 반화가 웃긴지 피식거렸다. 성격도 좀 비슷하고 털만 빼면 쌍둥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노에라에 의해 잘 가꿔진 정원이 별장 앞에 꾸며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곳에서 맹이와 삼이가 뛰어 놀고 있었다. 호수가 있어 애들이 수영하면서 놀기에 딱 좋았다. 지구는 지금 한겨울이지만 이곳 기온은 거의 초여름에 가까우니 아이들은 살판이 났다. 얼리고 지지고 안에 들어갔다가 물장구치고 아주 신이 나셨다.
“응? 아, 그러고 보니 롱이가 없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생각해보니 롱이가 없었다. 엘프왕국에 데려다가 놓고 한참을 잊고 있었다.
“잘 살고 있겠지 뭐. 롭스야, 근데 왜 너 그 모습으로 있어?”
-꾸어어...
어린아이처럼 작은 모습을 하고 있는 롭스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는데 다리가 짧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래도 나름 프라이드는 있는 녀석이라서 한사코 원래모습을 고수하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어 작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어떤지 약간 풀죽은 모습 같기도 했다.
“얼마나 보기 좋아. 옷도 입을 수 있고.”
슥슥..
그러거나 말거나 반화는 녀석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옷까지 사주었지만.
“마스터, 여기가 남쪽입니까?”
“어, 중앙대륙 남쪽 끝이야.”
“그럼 ...?”
빠지지지직!!!!
...
해골씨가 뭔가 말하려 했는데 갑자기 굉음과 함께 엄청난 빛이 번쩍이는 바람에 듣지 못한 반화.
“...삼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가끔 놀다가 흥을 주체하지 못해 저렇게 힘을 방출하기도 했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적어도 녀석과 노는 녀석들 중에는 저 힘에 다칠 녀석은 없었으니까. 다만 호수에서 놀다 보니 그 밑에 있는 생물들이 몽땅 기절해서 호수 위를 뒤덮어 버렸다.
둥~둥~
-아빠아아아아!!!
“...왜?”
-물꼬기 먹자!!
너무 많아 서로 겹쳐져서 빼곡하게 호수를 매운 놈들을 보며 삼이가 입맛을 다셨다. 세계의 악동이라는 녀석은 그걸 또 부리로 쪼아 하나씩 뜯어 먹고 있었다. 이대로 뒀다간 호수에 생선 썩은 내가 진동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반화가 둥둥 떠다니는 것들을 해골씨를 시켜 정리를 했다.
“왜 제가...?”
“귀찮아. 어! 그거 몇 개 회 좀 떠봐.”
“...”
괜히 옆에 있다가 잡일을 하게 된 해골씨는 속으로 반화를 욕하며 물고기들을 분류해서 반화가 열어 둔 아공간에 차곡차곡 정리를 했다. 손가락으로 이거 저거 가리키며 회를 뜨라고 하면 정말 면상을 생선대가리로 찍고 싶었지만 꾹꾹 참고 한 시간 내내 일만하다가 결국 말하려고 했던 건 까먹고 지쳐서 집으로 바로 돌아 가버렸다.
아이들은 해골씨가 뜬 회를 냠냠 맛있게 먹더니 다시 호수로 돌아가 버렸다. 정말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초장을 입가에 다 묻히고 허겁지겁 먹자마자 호수로 달려가는 것을 보며 반화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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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 크랙 덕분에 이번 달 내로 건물은 완공되겠네요.”
“그리고 원인도 알아냈고요.”
“수고했어요. 명하씨.”
임시 사장실에서 민사장과 명하가 현재 회사 상황에 대해 말했다. 반화로부터 결국 건물이 폭발한 이유를 들은 명하는 바로 민사장에게 알려 주었고 그 후에 테러와는 연관 없는 사항이라고 발표를 했다. 사람들은 긴가민가했지만 그것보다 새로운 세계에서 소환되었다는 존재에 대해 더욱 관심을 주었다.
“반화씨도 소환되었다는 존재들이 어디로 간 건지 모른다고요?”
“네, 찾기 귀찮다고 그냥 놔뒀데요. 그래도 게이트를 넘어서 지구에는 없다고 하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지구가 점점 다른 세계와 합쳐지는 느낌이네요...”
지금 러시아는 무정부 상태에서 방치되어 몬스터 천국이고 아프리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국이야 반화가 정리 했지만 그때의 충격 덕분에 세계에서는 함부로 토벌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또 그 미친놈이 날뛰다간 지구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아 사람들만 대피 시킨 상태에서 아틀란티스로 오히려 영역을 넓히는 중이었다. 지구는 이미 포화상태라 방어시설을 설치하기엔 너무 복잡했지만 아틀란티스는 달랐다. 마나가 풍부해 그곳에서 얻은 마도 기술과 과학을 합쳐 단단한 방어시설을 만들며 조금씩, 조금씩 넓혀 가고 있기에 오히려 그쪽이 안전했다. 그리고 만약 그 미친 인간이 난장을 피워도 아틀란티스에서 피우는 게 좋을 테니..
“지구가 합치든 말든, 우리부터 좀 합치죠?”
“...예?”
묵직한 직구에 민사장이 순간 당황해 말도 안 나왔다. 지금 고백을 한 건가...?
“내가 그때 갑자기 건물이 터져서 말을 못했는데 크리스마스에 우리 키..키스까지 했는데 그냥 이대로 넘기려고 했어요??”
“정확히는 명하씨가 술 취해서 한 거 아닙...”
“그쪽도 안 피했잖아요!!”
“그건 그런데...”
민사장은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다. 명하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은 건 당연히 그도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술을 깨고 생각하니 명하는 반화의 동생이었다. 그럼 자신은 ... 이젠 공적으로 엮이는 것도 모자라 사적으로도 그 인간과 엮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밖으로 표현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건물은 폭발하고 반화의 집에서 마주친 그 살벌한 모습 때문에 차마 고백도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말을 명하에게 하면 과연 자신은 무사할 것인지도 판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뭐요?”
“으음...좋아요, 사귑시다.”
“진짜죠? 혹시 뭐 오빠가 무서워서 그런 거나 그런 건 아니죠?”
“...반화씨 생각하면 안 사귀었죠.”
일하라고 직장에 보내놨더니 이젠 연애를 하고 있는 명하를 반화가 본다면 기가 찰 일이지만 그 인연을 반화가 연결해줬으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열은 좀 받겠지만...
“그럼, 일 합시다.”
“눼에...”
연애도 일단 일은 끝내고 해야 할 것 아닌가? 산더미처럼 쌓였던 업무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지금은 꽁냥거릴 시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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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환경 속을 뚫고 이동하던 마왕 무리는 드디어 그들이 찾던 장소에 도착했다. 그동안 간간히 생기를 흡수하며 정말 생명만 연명하면서 끝내 목표했던 장소까지 도달한 그들은 허겁지겁 살아있는 생물들을 찾기 시작했다.
“생기...생기가 필요해...”
생기에 대한 갈증에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은 불가능했다. 어느 정도 이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 다면 결국 그들은 이성을 잃고 말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생기를 찾아 헤매던 중 엄청난 생기를 찾아낸 그들은 홀린 듯 생기를 향해 달려갔다.
...
콱!!!
“끄억...!”
우적! 우적!!
마지막 한 놈 까지 씹어 삼켜버린 존재가 눈을 번뜩이며 더 먹을 것이 없는지 찾아봤지만 이 일대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먹을 것이 없었다.
뚜둑!
“시간이 꽤 오래 지났군. 게이트라...”
방금 전 먹어치운 놈의 능력을 흡수한 존재가 기억을 뒤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힘이 부족해...”
아직 힘에 대한 갈증이 가시지 않은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아직 환경에 적응도 되지 않아 힘의 사용도 익숙하지 못했다.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 적응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며 방금 먹어치운 놈들에 생각했다.
고맙게도 깨어나지 못할 수면에 들어간 자신을 깨워준 어리석은 놈들은 뭔가에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지만 하필이면 자신을 발견해 최악의 행동을 하는 바람에 모든 걸 자신에게 빼앗기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악몽이라...재미있는 녀석이군. 만만하게 볼 수 는 없겠어.”
아무래도 완전히 자신의 힘을 되찾는다고 해도 장담할 수 없는 놈인 것 같아 추가적으로 더 힘이 필요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에 마침 자신이 먹어 치울 아주 좋은 놈이 있었으니 힘을 회복하는 대로 놈이 깨어나기 전에 끝낼 계획을 짠 그는 원래 있던 곳에 주저앉아 조용히 힘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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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삭!
평화로운 아침을 푸롱 열매와 함께 시작한 반화가 눈이 내려 온통 새하얗게 변한 마당을 내려 봤다.
“좋네. 넓으니까 확실히 보는 맛이 있어.”
국립공원에 가야만 볼 수 있을 광경이 집 앞에 펼쳐져 있으니 좋을 만했다. 거기에 계절마다 색다른 모습을 계속 보여주니 그의 마음에 속 들어오는 마당이었다.
“그래도 관리가 안 되서 좀 지저분해 보이긴 하네.”
롱이가 있을 땐 정말 그림 같았는데 지금은 그냥 넓기만 했다. 그림 같은 풍경은 아니었다. 조만간 데려와야 할 것 같았다. 별장도 좀 꾸며야 하니 겸사 겸사.
-우웅...어!!!
“눈 왔어. 진짜 눈은 처음 보지?”
-응!!!
삼이가 잠에서 깨 반화를 찾아 거실로 나왔다가 온통 하얀 마당을 보고 후다닥 달려왔다.
“으차!”
녀석을 안아 입에 푸롱 열매를 넣어 주며 마당을 걸어 보는 반화.
-우아아아아...
이래 봐도 태어난 지 아직 1년도 안된 녀석이라 한창 신기한 게 많은 녀석이었다. 애기치고 사고치는 스케일이 좀 크긴 하지만...
할짝!
-물맛이야!!
“...그래, 물맛이지...”
눈을 핥아 먹어 보더니 엉뚱한 소리를 하는 녀석이 귀여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아무 자국도 없는 눈 위에 살포시 올려 준다.
뿍! 뿍! 뿍!
-발자국!
자기 발자국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걸 보니 덩달아 반화의 기분까지 좋아졌다.
퍽!!
“...”
스윽.
-히히히히!!! 아빠 흰머리 됐어!
반화의 머리에 눈덩이로 정확하게 날린 녀석이 까르르 웃는다.
“...전쟁이다 이 자식아.”
-끄아아앙!!! 차가워!!
되로 주고 말로 받은 녀석이 그래도 좋다며 깔깔거리며 털이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놀더니 배고프다며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끙... 다 젖었네.”
반화도 집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마당엔 눈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아침의 격렬한 흔적만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