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뽕 박규태 선생 #99 >
고준영.
돌 같은 단단함.
그리고 변함없는 표정.
그의 별명이 어째서 ‘모아이 석상’이 되었는지 그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한국에 저런 피지컬을 갖춘 선수가 있었나?”
“음……. 한국의 20번 체크해 봐.”
“톰! 포항에서 뛰고 있는 고의 자료를 좀 구할 수 있을까? 우리 클럽은 동아시아 담당이 없어서 말이야. 대신에 너희가 원하는 오스트리아 쪽 자료를 넘겨줄게. 어때?”
세계 여러 클럽의 스카우트들이 눈을 빛냈다.
고준영은 유럽에서 실패할 수준의 공격수는 아니었으니까.
위압감이 느껴지는 저 피지컬이라면 적어도 평균은 해줄 것이 분명했기에 스카우트들이 바삐 움직였다.
“막아! 무라트 카잔키를 잡아!”
“집중해! 1골 차이는 금방 따라잡히니까! 신중하게 수비하자! 상대는 독일이야!”
1 대 0으로 앞서나가는 것과 다르게 대한민국은 독일의 공격에 크게 흔들리며 계속해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수비진이 빛나는 수비를 했음에도 독일은 기어코 무라트 카잔키라는 강력한 골게터를 앞세워 대한민국의 틈을 비집고 들어 왔다.
-고오오올!
-아! 너무 아쉽습니다! 무라트 카잔키의 날카로운 슈팅을 막지 못하면서 점수는 1 대 0에서 다시 1 대 1 동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경기력이 좋습니다!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선수들이 다시 마음을 잘 추스르고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겁니다.
1 대 1이라는 점수로 따라잡혔다.
독일은 역시 쉽지 않은 팀이다.
그래도 아까와 다르게 독일이 과감하게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단순하면서도 파괴적인 측면 역습에 주의하며 차근차근 경기를 풀어나갔다.
“누가 그러던데 붉은색은 3배 빠르다고.”
“아! 그 말 들어봤다. 일본인 친구가 그러던데……. 아마도 어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대사였지.”
만프레드 피츠너가 적응했다.
정확히는 박규태가 내뱉는 두서없고 정신 나간 말에도 물 흐르듯이 대답하는 여유가 생겼다.
박규태는 속으로 조금 당혹감을 드러냈다.
‘진짜 적응했나?’
아무래도 저번 유로파리그 결승에서 약을 너무 뿌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를 꽉 문 박규태가 힐끗 다른 선수를 바라봤다.
‘영준이랑 자리를 바꿔볼까?’
그러기에는 고영준이 왼발잡이라는 것이 눈에 걸렸다.
그와 자리를 바꾸게 되면 양발잡이 수비수인 만프레드 피츠너와 붙게 되는데, 아무리 고영준이 피지컬이 좋아도 상대 양발잡이 수비수를 상대로 분명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오늘 경기에서 적어도 무승부는 가져가야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승점을 모으게 된다.
남은 경기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승점을 쌓을 기회는 없을 테니 말이다.
“김치랑 내 유니폼도 붉으니까. 3배는 빠르게 움직여야겠어. 그래야 1골을 더 넣을 수 있겠지.”
“그러면 난 4배 빠르게 움직이겠다.”
“그러면 난 5배.”
“그러면 난 10배……!”
미친놈.
박규태가 혼나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앞으로 만프레드를 말로 괴롭힐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박규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측면에서 날아드는 크로스에 반응해서 움직였다. 이강민이 올려준 칼 같은 크로스였다.
“흡!”
만프레드 피츠너와 같이 떠오른 박규태.
이번에는 만프레드가 공중볼을 잘 처리하며 박규태가 공을 소유하는 것을 저지했다.
-다시 높게 뜬 공!
-이번에는 고준영 선수와 마르코 아하우스!
-고준영 선수가 공을 따냅니다!
-저 높이를 보세요! 진짜 고준영 선수가 있으면 이강민이나 다른 측면에서 움직이는 선수가 크로스를 올리기 너무 수월하거든요?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강팀인 독일을 상대로 우리 대한민국의 선수들이 정말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준영이 따낸 공을 박규태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이어지는 슈팅을 독일의 골키퍼가 완벽하게 막아내면서 결국 1 대 1이라는 점수로 전반전이 끝나고 말았다.
독일 선수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고.
반대로 대한민국 선수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렇게 전반전이 끝났다.
* * *
“나쁘지 않았어!”
박명훈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술적인 단순함 때문에 경기가 조금 답답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독일도 나쁘지 않았지만……. 답답했을 거야.”
하지만 그것은 독일도 똑같았다.
대한민국이 단순한 전술로 독일의 공격은 차분하게 막으면서 그들도 답답한 경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1 대 1이라는 점수가 독일의 공격이 잘 풀리지 않았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마도 독일의 감독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답답했다.
그들도 알고 있다.
대한민국의 수비진이 천천히 독일의 공격진을 늪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늪 축구라……. 마음에 드네.’
점유율도 포기하고 수비에 치중했다.
필요한 상황에서는 거친 수비를 하면서 상대의 주요 포인트를 끊어준 것도 좋게 작용했다.
거기다 전반전이 딱 끝날 시점에 조금씩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수중전에 거칠고 질척한 수비까지 섞이면 해볼 만했다.
“규태야! 필요하면 내려와서 플레이해도 좋아. 체력을 크게 소비하지 않는 수준에서 중앙까지 내려와서 상대의 기점을 마크해줘! 그러면 분명히 독일 녀석들은 급해질 거야.”
“진수야! 전반전에 잘했어! 소속팀과 다르게 대표팀에서는 중앙 수비수로 뛰어서 적응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무라트 카잔키를 상대로 1점이면 진짜 잘한 거야.”
박명훈 감독이 전술의 큰 틀을 설명한 뒤.
이강민이 선수들에게 전술의 세세한 부분을 설명하며 후반전에 더 끈적끈적한 축구를 할 것이라 예고했다.
“좋아! 가서 한번 기적을 만들어보자!”
기적을 만들자.
그 말을 끝으로 선수들이 필드로 나섰다.
후반전이 시작되기 무섭게 조금씩 내리던 비는 폭우가 되어 필드를 시원하게 적셔버렸다.
솨아아아아아!
수중전에 돌입한 두 팀의 선수들은 전반전보다 더 큰 체력적인 부담감을 느끼며 경기에 임했다.
-무라트 카잔키의 드리블!
-아! 곽진수 선수가 미끄러졌습니다!
-하지만 박태진 골키퍼의 선방으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위험했다.
비가 쏟아지면서 필드가 미끄러워졌다.
덕분에 대한민국의 수비수들이 무라트 카잔키의 날카로운 방향전환에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문제는 독일도 미끄러운 잔디 때문에 골을 넣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라트 카잔키도 몇 번의 슈팅 시도에서 디딤발이 미끄러져 제대로 슈팅을 가져가지 못했다.
‘잔디가 엉겨 붙어서 중심을 잡기 힘드네.’
하지만 그것도 곧 적응될 것이다.
-아! 결국에는 골을 허용합니다.
-후반 8분에 터진 독일의 역전을 알리는 무라트 카잔키의 두 번째 골입니다.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선수들이 이 실점으로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경기를 풀어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렇습니다. 아직 1점 차이입니다.
역전을 허용한 순간.
대한민국 수비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집중하자! 할 수 있어!”
이강민이 급히 선수들을 다독였다.
그런데도 표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역전을 허용한 순간 경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점을 말이다.
“캬! 국뽕 수치 올리기 딱 좋은 경기네.”
하지만 박규태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전반전의 리드가 무색하게 후반전에 들어서자마자 상대의 매서운 공격에 흔들리며 2 대 1로 밀리는 상황.
여기서 동점을 물론이고 역전까지 성공하면 아마 박규태의 국뽕 수치가 꽤 오르지 않을까 싶었다.
‘순위도 13위에 걸친 이후로 잘 움직이지도 않았으니까. 이런 경기에서 제대로 활약하면 순위가 하나쯤은 오르지 않을까?’
그렇기에 박규태는 웃었다.
어떻게 보면 기회였으니까.
모아이 석상처럼 무덤덤하던 고준영도 놀랐는지 돌 같던 얼굴에 표정을 드러냈다.
“영준아!”
“네, 선배님.”
“비가 오는 날에 뭐가 제일 생각나냐?”
“비가 오는 날…… 이요?”
곰곰이 생각하는 고준영.
박규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 오는 날!”
“음…… 막걸리랑 빈대떡이 아닐까요?”
고준영의 대답에 박규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번에 골 넣으면 ‘주-모우!’를 대신해서 ‘빈-대떠억!’으로 세레머니를 바꿔야겠다. 고맙다! 준영아!”
무덤덤한 고준영도 박규태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진짜 이 인간이 미쳤나?’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2 대 1로 지고 있는데……. 독일이 계속해서 수비진의 라인을 올릴까요? 역습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배님.”
“흐흐흐! 걱정하지 마라! 폭풍은 두 번 치니까.”
“흐흐흐! 걱정하지 마라! 폭풍은 두 번 치니까.”
“…….”
“자! 녹두장군 박규태가 나가신다! 으하핫!”
“자! 녹두장군 박규태가 나가신다! 으하핫!”
“무리해서 두 번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선배님.”
고준영의 말처럼 독일은 아까보다 라인을 내리며 아까보다 공격에 크게 집중하지 않았다.
‘무리해서 1점 차이의 리드를 내주기 싫겠지.’
박규태의 생각처럼 독일은 대한민국을 꽤 어려운 팀이라 생각했다.
덕분에 독일의 감독은 수비를 굳히며 천천히 승기를 자신들 쪽으로 가져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쓰윽’하고 머리를 쓸어올리는 만프레드 피츠너를 보며 박규태가 빠르게 눈을 굴렸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체력의 소모가 심한가 보군. 아까보다 독일 수비진의 반응이 느린데?’
박규태는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공격.
이강민의 반대편에 있던 정우현이 보낸 패스였다. 박규태는 당연히 과감하게 슈팅을 가져갔다.
-아쉽습니다!
-크로스바를 살짝 넘어가는 공!
독일은 거북이처럼 등껍질을 내세웠다.
덕분에 아까보다 공격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편해졌지만, 반대로 최전방에 있는 박규태와 고준영이 고립되는 상황이 자주 나오면서 힘든 상황을 이어나갔다.
“아쉽겠네? 이번 헤딩은 제대로였는데!”
만프레드는 전반전과 다르게 후반전에 침묵하고 있는 박규태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리고 그런 만프레드에게 박규태가 멋있는 척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한 발 남았다.”
때마침 이강민이 코너킥을 차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박규태는 그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저 감이었다.
이강민이라면 이쪽으로 보낼 것이라는 감.
정상적인 공격수가 아닌 김치와 국뽕에 푹 삶아진 박규태의 눈에 보이는 날카로운 코스였다.
이강민이라면 분명히 이렇게 크로스를 올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박규태가 움직였다.
뻐엉!
이강민의 발을 떠난 공이 독일과 대한민국의 선수들을 지나서 박규태가 달리고 있는 앞으로 날아들었다.
일반적인 코너킥과 다르게 선수들의 무릎 높이로 날아드는 낮은 코너킥이었기에 쉽게 반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규태는 달랐다.
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발을 뻗어야 한다고.
그래야 골을 넣을 수 있다고.
그래서 박규태는 바로 발을 휘둘렀다.
오직 박규태를 위한 환상적인 코너킥이었다.
‘이런 질 좋은 코너킥을 놓치면…… 축구 선수가 아니지! 멋지게 동점을 만들고 광명 찾자!’
제대로 임팩트 된 공이 골망을 흔드는 순간 박규태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관중석을 향해 달려갔다.
-고오오오올!
-박규태!! 박규태!! 비가 내리는 힘든 상황에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2대2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후반 22분! 2대2 동점을 만든 박규태! 그가 오늘 경기 대한민국의 2번째 골을 터뜨립니다!
-아! 정말 멋집니다! 박규태! 박규태! 그가 독일을 상대로 멀티골을 터뜨리며 자신의 진가를 드러냅니다!
-이거죠! 이게 대한민국이 가진 저력이 아니겠습니까? 진짜 박규태 선수를 보면서 항상 느끼지만……. 이 선수가 골을 넣는 것을 보면 속에서 뭔가 차오릅니다!
박규태가 무릎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비가 잔뜩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잘 미끄러졌다.
와아아아아!
박규태가 빈대떡을 생각하며 소리쳤다.
“녹-두우우우우!”
노옥-두우우우우우!
주-모! 김치팍에게 빈대떡 하나 추가!
으아아아! 믿었습니다! 김치팍!
김치팍! 김치팍! 김치팍! 김치팍!
경기장을 찾은 한국 교민들.
그리고 김치규태교 회원들의 광기 어린 응원을 들으며 박규태가 아련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아아! 박규태! 너무 멋져!”
“형! 사랑해요! 김치팍!”
“규태 오빠 김치 파티!”
“아……. 너무 아련한 눈빛이야! 분명히 규태 님은 김치 발할라를 생각하고 있을 거야! 너무 눈부셔!”
하지만 관중들의 생각과 다르게 박규태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 끝나면 꼭 빈대떡 먹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박규태가 세레머니를 끝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국뽕 박규태 선생 #99 > 끝
ⓒ 엉심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