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220화]
잠시 후 석민은 말없이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최소한의 인정으로 그의 죽음을 지켜볼 참이었다.
바티크의 목을 따라 흐른 뜨거운 피가 도랑을 타고 녹슨 하수구로 들어갔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원하던 죽음이었으니까. 군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이행하며 맞이한 죽음.
그래, 마지막엔 자기가 그렇게 열렬히 찬양하는 조국을 위해 죽었으니 그도 미련이 없었을 것이다.
바티크은 애국심을 이용하는 자들의 꼬임으로 자살에 가까운 작전에 투입되었고, 결국 쓸모없는 도구가 되어 서울에 있는 수많은 시체들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냥 버리는 장기 말로 쓰이다가 버려진 건데 그게 과연 보람찬 죽음일까, 바티크?’
“애국심.”
이젠 지긋지긋한 단어였다.
“이놈이고, 저년이고.”
한땐 존경하던 인물을 죽여서 그럴까.
석민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런 시선과 마주한 아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 경멸까지 어린 시선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방탄복에 보호되지 않은 팔다리 곳곳에 피까지 흘리고 있어서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바티크 페트로비치 김이 말했어. 한국 정부가 러시아에 사주해서 우릴 처리하라고 했다네. 대가는 한국 정부가 잡은 러시아 쪽 블랙요원의 석방, 그리고 바티크 페트로비치 김의 군 복귀.”
그는 의도적으로 풀네임을 부르며 말했다.
배신감에 그의 온몸이 떨렸다.
“대통령이 그 짓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는 아영이 반론하기 전에 얼른 말했다. 아영은 내심 그의 말에 안도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마 선호석 국가안보실장일 거예요.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오로지 그뿐입니다.”
석민도 그녀의 예상에 동의했다.
“확실한 건 한국 정부는 이제 신뢰할 수 없단 거야.”
이어서 그가 말했다.
“뭐라 말하고 싶겠지만 여론도 통일되지 않았고, 대통령의 국무위원이 상부의 허락 없이 타국 정보부와 손을 잡고 우리를 죽이려고 했어. 나 같으면 반역죄라고 노발대발할 거야.”
“그냥 이 사실을 대통령께 알리는 것은 어떨까요?”
체념에 가까운 목소리가 물었다.
“선호석은 당연히 발뺌하겠지. 게다가 유일한 증인은 이미 죽었고. 그 말은 즉, 대통령이 뭐라 말해도 믿을 수 없단 거지.”
석민은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통은 마치 마취제에 맞은 것 마냥 점점 사라져 갔다.
상황을 살피고 근처에 위험할 게 없단 걸 확인한 석민은 상의를 벗었다. 아직 방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더위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팔에 박힌 파편들을 보았다. 깊게 박히진 않아서, 피부에 박힌 것들은 손으로 파편을 떼어낼 수 있었다. 떼어낸 곳은 어느새 아물고 있어서 피도 나지 않았다.
대충 상처들을 확인한 그는 총을 챙기고 새 탄창을 끼웠다.
“군대와의 합류는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네? 석민 씨….”
“의견이 통일되지도 않았고 호시탐탐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데, 여기까지 와서 군대를 믿으라고? 너도 참 단순하다.”
석민이 말했다.
“뭐 최소한 군대와 싸울 생각은 아니니….”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예광탄이 그들이 눈앞에서 휙휙거리면 지나갔다.
석민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뛰어서 몸을 숨겼다.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사격을 한 바들을 보았다.
“교단놈들!”
아영이 소리치며 상체를 숙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어.’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선발대가 분명해 보였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설마 부상자들이나 낙오자들을 전부 버리고 온 건가?’
설마 교단인들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영은 몸을 돌려 역사 쪽으로 달리려다가 총을 여러 발 맞고 쓰러졌다. 관통상은 아니고, 방탄복에 착탄한 충격이었다.
“도착했다. 도착했어!”
총을 쏴대며 석민과 아영에게 접근하면서도 그들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떠들었다. 일부는 지난 일들이 떠오르는지 울음까지 터트렸다.
‘미친놈들!’
석민은 소총을 고쳐 잡고, 접근해오는 자들을 노리고 쏘았다.
석민의 반격에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석민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석민의 눈에 그들은 굼떴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무리하게 행군을 강행해서 온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석민은 사방으로 스쳐가는 총알 세례 속에서도 무리하게 상체를 내밀어 공격을 가했다. 광장 한가운데 쓰러진 아영을 백업하기 위해 일부러 그들의 시선을 가로채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총에 제법 여러 번 맞았는지, 충격으로 넘어져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죽은 척을 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에 대한 사격은 멈췄다.
“움직여!”
그 순간, 석민이 소리쳤다.
아영에게 공격이 멈췄으니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게다가 자신에게만 총알이 쏟아지니 죽을 맛이기도 했다.
아영은 거의 미동도 않은 채 손과 살짝 떨어져 있던 소총을 조심스레 쥐고서는 벌떡 몸을 일으켜 교단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발사했다.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갑자기 움직이자, 석민에게 제압 사격을 가하던 교단의 선발대가 총구를 그녀 쪽으로 다시 돌리려했다. 그때, 석민 또한 몸을 일으켜 세워 단단히 견착을 하고 놈들을 쏘았다.
순식간에 5명이 그들의 총에 맞고 쓰러졌다.
기관총을 거치하던 자들까지 마무리를 한 석민은 망가진 조준경을 떼버렸고 가늠쇠 가늠자를 이용했다.
대략 20명으로 추정되는 인원 중 5명이 쓰러지자, 기세가 잠깐 석민과 아영에게 기울었다.
아영은 몸을 움직여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엄호!”
석민의 목소리에 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총을 쏘았다.
그녀는 석민보다 그 총에 익숙한지 매우 빠르게 20발짜리 탄창을 소비하고, 더 빠르게 장전까지 마치더니 다시 쏘아댔다.
스탯영향으로 반동은 거의 없었고, 한 번 연사할 때마다 2명에서 3명씩 쓰러졌다. 교단인들은 도망치거나 몸을 숨기기 급급해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했다.
석민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 바닥에 총탄이 착탄하는 소리들이 쏟아졌으나, 안전하게 아영의 곁으로 갈 수 있었다.
잠시 교전이 벌어졌고 석민은 가지고 있던 탄창을 다 써버렸다.
아영이 사격을 하는 동안 석민은 가방을 열어서 빈 탄창에 탄약들을 한 발씩 넣었다. 왜 재장전 클립 가이드가 없는지 의문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러시아 놈들은 그 좋은 걸 안 쓰나?
교단인들의 수가 점차 많아졌다.
석민은 탄을 넣으면서 은․엄폐하는 벽에 난 구멍 사이로 피곤함에 전 음울한 얼굴들을 살폈다.
상대 쪽에서 사격하는 소리가 점점 줄어들자, 아영도 사격을 멈추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마쳐진 석민이 백업해줄 테니 그녀도 몸을 웅크려 빈 탄창들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저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니 석민의 얼굴에 그늘졌다.
“군대는 오려나?”
“올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군대랑 합류 안하신다고 하시더니 이제 필요한가 봐요?”
비아냥 섞인 대사였다.
날선 답을 할 수도 있었지만, 석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그들은 서로 격돌할 게 분명하니까.”
“선호석 안보실장이 그렇게 방해를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에 석민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해졌다.
“국가안보실장의 권한이 너무 막강하니까 그렇지. 미쳤어. 그래, 그 인간의 생각은 나처럼 합리적일 거야.”
그 말에 아영은 잠깐 속으로 울컥거렸다.
“그렇지만, 국무위원이 대통령의 결정 사항을 반대한답시고 우리를 죽이려고 해?”
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선호석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 대통령 몰래 이런 불법적인 일을 할 줄은 몰랐다.
“우리가 정권의 역린이었겠지. 가장 큰 약점.”
석민의 말에 그녀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국민을 몰래 죽이는 거니까요. 그치만 그거라도 하지 않았으면 수급 자체가 힘들었을 텐데….”
“그냥 매입 가격을 좀 올리지 그랬어.”
석민이 처량하게 말했다.
뭐, 전에도 들었지만 나라에 돈이 없다고 했었기에 답변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다.
“이것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아영의 대답을 들으며 그녀가 저렇게 된 것이 애국심 때문이라 석민은 생각했다.
그때 석민의 시야에 차 한 대가 보였다.
군용차가 아닌가? 아직도 그들에게 차가 남아있는지 몰랐는데….
차를 살피던 석민은 그곳에 달린 중기관총이 자신들이 버린 것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물러나자.”
일반 소총탄에도 구멍이 나는 외벽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엄폐를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물러나는 와중에도 탄창에 탄약을 한 발씩 넣으면서 움직였다.
“옥상으로.”
석민의 말에 아영이 움직였다.
지금 군대가 안 오면 곤란했다. 천사가 언제 하늘로 올라가 문을 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석민과 아영도 그에 대비하기 위해 하늘이 잘 보이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분명 교단이 이곳까지 당도했으니 천사도 왔을 것이다.
군대가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그들은 천사를 막을 수 없었다.
***
차량에서 내린 교주 백은호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왕십리 역사를 보다가 하늘을 보았다.
천사, 오르곤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하늘에서 인도하는 모습을 보았건만, 그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교주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교주님.”
박재만이 교주의 앞으로 나와 그의 푸짐한 몸으로 교주를 가렸다.
“총에 맞으실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네.”
백은호는 박재만을 옆으로 밀치며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속 가운데에 태풍의 눈마냥 매우 시커먼 검은 구멍이 보였다.
저기가 바로 천사께서 말한 천국의 문이었다.
이제 저 문이 열리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주가….
“방주!”
“방주! 방주!”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교인들 사이에서 소리가 나왔다.
“그들은 저 건물 안에 있나?”
“그렇습니다.”
박재만의 대답에 백은호는 잠시 왕십리역을 쳐다보았다.
“확성기를 가져와서 저들에게 항복하라고 해보게.”
“네?”
박재만은 잠깐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교주의 의도를 깨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성기는 제게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춘천 교구장 이춘복이 말했다. 박재만이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확성기를 선뜻 넘겼다.
이춘복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것을 받은 직후 앞으로 나와서 확성기의 사이렌을 크게 울린 직후 소리쳤다.
-들어라, 너희는 이제 독에 든 쥐와 다름이 없다! 그러니 항복하라! 항복하면 절대 죽이지 않고….
총성과 함께 총구 섬광이 건물 옥상에서 반짝였다.
그리곤 확성기를 든 채 소리를 지르던 이춘복의 머리에서 퍽! 소리와 함께 피가 뿜어졌다.
중기관총을 쥐고 있던 자가 몸을 움직였다.
총성은 단 한 발만 울렸으나, 곧 중기관총을 쥔 대원도 총에 맞아 죽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바로 여러 총성들이 하늘 높게 울려 퍼졌으며, 기관총좌에 오른 다른 사람이 중기관총을 갈겨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