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215화]
“뭐가 필요한지 당장 말해.”
“시립대에 다녀오세요.”
“뭐라고?”
“가서 50구경 탄약을 잔뜩 챙겨 와요. 많이, 아주 많이.”
그녀는 등에 메고 있던 접이식 전동킥보드를 꺼내서 풀었다.
“시제품인데 300킬로그램은 너끈히 버티고도 남을 물건이에요. 배터리는 추위 때문에 빠르게 닳고 있지만, 거기쯤은 다녀올 수 있어요.”
“그걸 언제 챙겨왔어?”
“지금 그게 중요해요? 만약을 대비한 것이라고 하죠.”
아영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최단 코스 잡는다고 겸재교를 통해서 올 거예요. 아까처럼 아파트에서 중기관총을 거치해서 사격하면 놈들은 쉽게 못 와요.”
“유효사거리 안에 닿고도 남겠네!”
석민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무기와 군장을 풀었다.
괴수들이나 감염자들은 그에게 묻은 드래곤의 피 냄새 때문에 접근을 못 하니 다녀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저는 아까 파괴된 장갑차에서 K-6 중기관총을 챙기죠.”
“알았어.”
석민은 그렇게 말하며 접이식 킥보드를 챙긴 뒤 바로 움직였다.
속도를 보아하니 가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혼자가 되었을 때 석민은 다시 상념에 잠겼다.
‘가능한 일일까?’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방주가 들어오고 나서 오르곤을 처단하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영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내심 죽고 싶지 않아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지만, 석민은 여전히 불확실성에 잡혀 있었다.
“가능하다면… 좋겠지.”
군대가 제때 와서 오르곤을 처단한다면, 방주가 안 들어와도 될 것이다.
그는 찬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발라크라바에는 이미 하얗게 성애가 가득 차 있었고, 눈썹도 물기가 얼어 하얗게 셌다.
하지만 이상하게 버틸 만했다.
‘좋아, 한번 해봐. 장단에 맞춰 줄 테니까.’
그는 혜원에게서 받은 SR-1 소총을 어깨에 짊었다. 많은 양의 탄약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말을 안 들으면 바로 쏘려고 한 것 같단 말이지.’
아영이 자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열변을 토하면서 권총집으로 손이 움직였다. 착탈 방지용 똑딱이까지 풀어놓고 말이다.
‘쏘려던 것은 아니겠지.’
감염자들을 사냥에서 포식하고 있던 괴수들이 맞은편에서 석민이 다가오자 낮게 그르렁거리며 경계를 했다. 그러나 곧 석민에게서 풍기는 냄새에 놀라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석민은 혹시나 대치하게 될까 바짝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인도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거리에 차량이나 무너진 건물 파편들이 있었지만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매우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헌팅트로피 창을 열었다.
크라케르를 잡고 난 뒤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던지라 헌팅트로피는 보지 못했었다.
[드래곤 크라케르]
다른 드래곤들이 가지던 즐거움 이상의 집요함과 살육에 대한 집착을 가진 이 드래곤은 결국 자신이 사는 세계를 멸망시켰다.
새로운 살육의 향연을 위해 의도적으로 방주 계획을 방치시킨 그것은 기회를 노리고 천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자신을 포함 일부만 넘어오게 되자 다시 새로운 기회를 노리고 동족들을 기다려왔다.
석민은 인상을 쓰며 그것을 읽었다.
다시금 그는 이것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다.
‘가능하려나.’
그는 당장이라도 문을 닫고 싶었으나, 한숨을 내쉬며 대신 헌팅트로피 창을 닫았다.
***
잠을 자지 못하고 있던 혜원은 막연하게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혹시 석민이 전화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전화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전화를 했다가 핸드폰의 벨소리나 진동 때문에 그가 괴수나 감염자들에게 들킬까봐 겁이 났다.
‘자고 있을지도 몰라.’
혜원은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그리 생각했다.
‘아무리 서울에 있다고 해도, 거기서도 잠은 자겠지. 안 그러면 피곤할 테니까.’
그렇지만 혜원은 잠들 수 없었다.
자려고 할수록 더욱 정신이 또렷해지고, 석민이 부정적인 상황에 처하는 장면만 자꾸 떠올랐다.
“한 번만 해 줘라, 이 새끼야.”
혜원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려운 거 아니잖아.”
일말의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것만큼 야속하고 가혹한 것은 없었다. 과거에 그것으로 큰 상처를 입었었던 그녀로선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죽지 않았다는 것만 알려달라고.”
참지 못한 혜원이 흐느꼈다. 하지만 기다리던 전화는 결국 오지 않았다.
“나쁜 새끼.”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등신 같은 놈.”
결국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휴대폰으로 뉴스 영상을 틀어 보았다.
하루 종일 긴급 속보로 사이비 광신자들에 대한 뉴스가 방영됐다.
군대가 출동해서 작전 중이라고 했으나 세밀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기에, 뉴스에 나오는 패널들이나 아나운서들은 천국의 문 교단의 유래와 역사에 관해서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자들입니다. 감염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기적이 존재한다며, 눈앞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자들이 있고, 그에 동조하는 자들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 아닌….
참다못한 혜원은 뉴스를 꺼버렸다.
원하는 정보는 단 하나도 없는데 쓸데없는 소리들만 끝없이 흘러나왔다.
멀리서 은은하게 총성이나 미사일이 날아가는 소리, 혹은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서울은 대혼란이었고 서울 방벽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대규모로 나타난 괴수와 감염자들 때문에. 특히 하늘을 날 수 있는 와이번들이 방벽을 쉽게 넘어오면서 그것들을 잡기 위한 주둔군이 사격을 가하는 소리가 끝없이 울렸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경기도의 주민들은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됐다.
그녀가 보기에 이 일은 꽤나 길게 지속될 것 같았다.
***
“전화는 안 하세요?”
석민이 말없이 휴대폰만 물끄러미 바라보고있자 아영이 한 말이었다.
“전화해봤자 좋은 말 못할 텐데.”
석민은 몸을 숙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괜히 전화해서 사람 마음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석민은 지금 혜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전화를 기다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영은 기관총의 덮개를 열어서 탄약을 장전했다.
석민이 100발짜리 50구경 탄약통 6개를 챙겨왔고, 아영이 장갑차에서 챙긴 50구경 탄통 1개까지 포함해서 총 700발이 그들에게 있었다.
적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녀는 이미 탄약과 총을 알림글을 통해 확인해 두었다.
강 너머로는 아직 아무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항상 궁금했는데….”
“말해.”
“석민 씨는 혜원 씨의 어디가 좋아서 사귀게 된 거죠?”
낯간지러운지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낮게 헛기침을 했다.
“남녀가 눈 맞고 만나는데 뭐가 있겠어.”
석민은 내심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툭 내뱉었지만, 대답하는 말투에서 쑥스러운 감정이 묻어나왔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대가 호감을 보이고 나 또한 호감이 갔으니깐.”
“어떤 면에서 호감이 갔는데요?”
아영이 좀 더 꼬치꼬치 캐물었다.
“뭐랄까…. 입이 험하고 담배 좋아해서 키스 할 때마다 쩐내가 나고, 강한 척 허세를 부리면서도 실제로는 많이 여리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여자라고 할까. 외로움도 많고. 그게 호감이 갔어.”
평소라면 입을 꾹 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했을 석민이었지만,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 있어서 그런지 감수성이 흘러넘쳐서 술술 말이 나왔다.
“마치 죽은 오빠를 대신할 듬직한 남자를 원하는 것 같더라.”
가끔가다 그녀가 아양 떠는 것이 마치 친한 오빠에게 보이는 늦둥이 동생의 그것과 같았다.
재워 달라, 등 긁어 달라, 그런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여동생을 잃은 그의 감정을 크게 자극했다. 그의 여동생도 종종 그랬기 때문이었다.
아영은 석민의 등을 잠시 바라보았다.
최근에 많은 일들로 살이 좀 빠지긴 해도, 확실히 석민은 등이 넓은 남자였다.
물론 근육도 많지 않고, 지난번 터널에서 보았던 것처럼 축 늘어진 살들을 보면 멋진 몸은 분명 아니었지만, 운동 좀 하면 자연스레 역삼각형 몸이 될 법하게 신체 구성이 좋았다.
“확실히 그럴 것 같네요.”
“너는? 연인이 있고?”
“없어요. 제 눈높이에 맞는 그런 남자.”
“나중에 생기겠지.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너는 이상형이 뭔데?”
“그야 슬림하고 탄탄한 몸매에 잘생긴 남자죠.”
“너무 높네.”
“하하.”
아영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실 듬직한 남자보다, 박봉이어도 제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 저를 받쳐줄 수 있는 남자가 좋아요.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반겨줄 수 있는 가정적인 남자요.”
“그런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텐데.”
그 말에 놀란 아영이 뭐라 반박하려는 순간, 석민이 급히 몸을 숙였다.
“온다.”
그 말에 아영은 다리 너머를 보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과 차량들이 보였다.
아영은 기관총의 장전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거리는 대충 250에서 300쯤 되니, 그녀는 영점을 300으로 맞추었다.
“다리 중간쯤에 오면….”
“알아요.”
석민은 처음엔 ASH-12.7을 쓰려고 했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생각을 고쳐먹고 SR-1을 꺼냈다. 혜원이 추천해 준 멋지고 성능도 훌륭한 총이었다.
5.56mm라서 여태까지 무거운 탄환을 쓰던 그에겐 좀 못 미더웠지만, 저들이 방탄복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고 떨어진 거리도 5.56mm의 유효사거리 안에 들고도 남았다.
아영은 차분하게 조준에 들어갔다.
그 무리의 맨 앞을 차지하고서 앞장서서 움직이는 건 장갑을 보강한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이었다.
그렇지만 민수형 장갑차를 보강한 것이라, 50구경 탄환에는 별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강했다 한들 운전석만 했지 엔진 쪽은 안 했을 터였다.
아영은 신중하게 차량을 노렸다.
거치한 것이지만 삼각대가 없어서 부서진 아파트 담장 위로 총을 올린 것이라 주의해야 했다.
차량의 뒤로 광신자들이 무기를 들고 허리를 숙인 채 따라왔다.
남녀노소 온갖 인간 군상들이 그들의 야간 시력 능력을 통해 형광 빛으로 반짝였다.
이윽고 그녀는 방아쇠를 눌렀다.
퉁퉁퉁거리며 폭음에 가까운 총성과 총구 섬광이 눈앞에서 번쩍이며 날아가 장갑차에 박혔다.
그러자 차량의 보닛에 구멍 나고 앞바퀴가 터지면서 차체가 기울어졌다.
고함 소리와 급히 움직이는 엔진음이 들려왔지만 장갑차는 움직이지 않은 채 보닛에서 연기와 작은 불꽃만 뿜어냈다.
아영은 후속 차량에도 사격을 가했다.
사격음과 기관총탄이 쏟아지면서 교단인들이 몸을 엎드리고 숙였다.
중기관총의 총탄을 맞은 이들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 모래알 같은 형광색 빛만 남았다.
아영은 화망을 만들면서 기관총을 쏘았다.
중기관총의 총구 화염이 번쩍였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있던 자리로 온갖 총탄이 날아왔다. 곧 주변은 콘크리트 흙먼지에 뒤덮였으나, 석민과 아영이 가진 화력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탄약은 탄통을 통해 빠르게 비워져 갔다.
화력에서 밀리면 숫자가 훨씬 많은 저들이 순식간에 밀어붙이기 때문에 그녀는 돌격하는 인간무리들을 향해 기관총을 퍼부었다.
달려들던 이들이 총에 맞아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이 반으로 절단이 났다.
다리 위는 무기들의 섬광으로 마치 폭죽이 터지듯 반짝거렸다.
“재장전!"
아영이 외치기 무섭게 석민은 소총을 들어 조준했다.
기관총의 총성이 멎자 엎드리고 있던 이들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달렸다.
석민은 가장 앞에 서서 권총을 들고 달려가는 자를 쓰러트렸다.
평소 같았으면 달리는 이들이 몸을 웅크리지 않게 하기 위해 뒤에 있는 놈부터 처리했겠지만, 지금은 저들을 겁먹게 해야 했기 때문에 앞에 놈부터 쏘아댔다.
그가 총을 쏠 때마다 한 명씩 바닥으로 추락했다.
앞에서 달리던 자들이 그렇게 되자, 뒤에 있던 자들이 몸을 은․엄폐하면서 그들이 가진 탄을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