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214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지금 현 상황에서….”
“대통령님이 도와주실 거예요.”
아영의 말에 석민은 씁쓸하게 그녀를 보았다.
언짢다기보다 그저 아영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물론 자신이라도 그런 입장이었다면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은 했다. 그녀도 불안했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거의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한 꼴이었다. 그렇지만 상황이 매우 불리했고, 자신 또한 해답을 찾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기도 했다.
“대통령님이 어떻게 돕는다고? 우리를 위해서 무기라도 주시는 거야? 아니면 군대가 이 일을 맡을 거니까 우린 빠지라고? 대통령님께서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신 거야?”
하지만 기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영은 머뭇거리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석민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그게 통화 도중에 드래곤이 와가지고….”
석민이 뭐라 말하기 전에 아영이 말했다.
“그러면 대통령님에게 전화를 해봐야겠군.”
석민이 말했다.
“이야기해보자고.”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아영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석민은 마치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영은 눈으로 힐끔 석민을 바라보고는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대통령님?”
-아, 아영 대위, 축하하네. 용을 잡았다고?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석민과 아영의 의아한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아뇨, 제가 잡은 게 아니라 석민 씨가 잡았습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과거에 사태 때….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샐 것 같은 분위기에 아영은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통령님,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방주가 들어오는 건 매우 위험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데다가….”
-지원은 가능하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군.’
조금 초조함을 느낀 석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상황을 말하자면은 1기갑여단과 5공병여단이 서울에 진입했어. 군대가 가고 있으니 문제없겠지? 1개의 기보대대와 1개의 대공중대면 충분할 거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망할 군대가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린단 말인가? 게다가 생각보다 지원 숫자가 너무 적었다.
“고작 그것들로는 부족합니다.”
아영은 실시간으로 심각해지는 석민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을 이어갔다.
“해당 부대들은 지금 교단인들을 상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곳으로 바로 올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방주 안에 든 이계인들의 숫자는 300만이 넘습니다. 만일을 대비하려면 말씀하신 병력보다 더 많은 수가 필요합니다. 또한 오르곤이라 불리는 천사를 제압하려면 지상 병력들 보다는….”
-와이번이 너무 많아서 헬리콥터를 비롯한 비행 수송 장비들은 서울 진입이 불가능해. 게다가 드래곤이 죽은 이후로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대량의 감염자와 괴수들이 출현해서, 서울 방벽에 큰 문제가 생겼어.
“그러면 저희는 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긴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대통령은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말했으나, 석민은 낮게 혀를 찼다.
지금 같은 상태면 군대가 빠를지, 교단인이 빠를지.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1기갑여단은 남쪽에서 오지만, 5공병여단은 강북에서 올 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내가 보기엔,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소요될 것 같군.
“교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구리 암사터널을 지나 면목역쯤에 있어. 하지만 정말로 걱정 말게. 그들은….
“1시간이 아니라 40분 안에 올 위치가 아닙니까?”
석민이 보다 못하고 대답했다.
-최석민인가?
대통령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군대를, 우리를, 나를 믿어 줄 수 있겠나?
“아뇨.”
대통령의 말에 석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직접적으로 말하는군.
“그들의 무전을 감청하셨겠지요? 혹시 서울시립대 쪽을 경유하거나 그러진 않았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나?
대통령이 살짝 놀란 듯 묻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님, 시립대 쪽에 옛 군 주둔지가 있고, 거기엔 막대한 양의 탄약이 있습니다. 전에 보고 드리지 않았습니까? 탄약을 그들이 확보하게 된다면 그들은 충분한 탄약 보급을 하게 됩니다. 서울 시립대를 포격해서….”
-그건 안 된다는 것쯤은 자네도 알 것이라고 생각하네.
대통령이 노기에 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포격으로 탄약을 처리하는 것쯤은 문제가 없지만, 그렇게 되면 안에 같이 있던 막대한 양의 드래곤하트들 또한 파괴되는 건 당연했다.
“그렇지만,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막을 순 없겠지?
수천의 사람들을 막으라고?
석민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평소에도 군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가지고 있던 그로선 이 대화를 통해 다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영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좋아, 그렇게 해주게.
“그럼 끊겠습니다.”
“아….”
석민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아영은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무슨 짓이야?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석민이 분을 삭이며 물었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아영이 항변하듯이 말했다.
“그냥 문을 닫으면 그만이야.”
“하지만…!”
“우리가 놈들을 막았다고 치자. 오르곤이 하늘을 날아서 문으로 가버리면? 어떡하려고? 지금 당장 왕십리에 가지 않고 있다가 오르곤이 먼저 가서 문을 열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잖아.”
“오르곤은 절대로 혼자 못 가요.”
아영이 말했다.
“어째서?”
“처음엔 용 때문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오르곤이 왜 신도들을 이끌고 서울에 진입하려고 하겠어요?”
“그야 용 때문 아니야?”
석민이 말했다.
“용이 있고 자기들 힘으로 용을 처리하기 힘드니까 사람들을 이용해서…. 그리고 용이 이제 전부 없으니까, 아무런 방해물이 없지.”
“아뇨,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아영이 말했다.
“나라에서도 문을 주시해 왔어요. 놈들이 무슨 짓을 한다면 단번에 박살낼 만큼 무기들이 조준되어 있고요.”
“그 말은…. 사람들을 방패로 써야 자기들이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석민의 말에 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괜히 정부를 공격해서 혼란에 빠트릴 이유가 없어요.”
아영이 말했다.
“서울 진입을 위해서만 활동한 것은 아니라는 거죠.”
확실히 서울 진입만을 놓고 보자면 정부를 공격하기보다 군에 있는 그들의 끄나풀을 이용해서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나았다. 진입만 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말은 그럴듯했다.
“아무튼 이야기하자면, 군대의 추격이 시작되었으니 한가하게 탄약들을 챙길 시간은 부족해요. 우리가 시간을 끈다면, 조급함에 탄약을 많이 챙기지 못할 겁니다. 그러면 군대가 쉽게 진압할 수 있어요. 잠깐 동안이라도.”
“너 지금 하는 말이 아주 이상한 거 알아?”
참다못한 석민이 말했다.
고작 그 정도 병력으로 방주를, 그리고 오르곤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은 도저히 되지 않았다.
밑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면 모를까, 미친 광신도들과 함께 있는 그들을 뚫고 할 수 있는 일인가?
석민은 아영과 대통령이 합리적인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는 눈동자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몸에서도 조급함이 묻어나왔다.
이상적인 결과에 심취한 나머지 그들은 현실을 외면하고서 어떻게든 결과에 맞춰 퍼즐 조각을 끼우는 것처럼 보였다.
드래곤하트를 잃어선 안 되니까 막대한 탄약이 있는 시립대 또한 건드릴 수 없다고 우겼고, 방주 안의 300만 천사 또한 훌륭한 자원으로 써야 하니 어떻게 되든 일단 안으로 들이자는 것이다. 정 안되면 오르곤이 방주를 깨우기 전에 제압하면 된다면서.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국가가 아무리 힘들어 졌다고 해도 그깟 자원이 뭔데 이런단 말인가? 그거 없으면 정말 나라가 망하기라도 하는 걸까?
더 힘들어질진 몰라도, 망하진 않을 거다.
진실은 닥쳐봐야 알 수 있겠지만, 최소 석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방주는 드래곤이든 괴수든, 공격을 막을 만큼 단단했다. 그런 곳에 자위용 무장이 없을까?
사람들을 손쉽게 세뇌할 정도로 고등 생물이다.
그놈들을 이 세상에 풀어버리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안 돼. 할 수 없어. 불가능해.”
“석민 씨!”
“그만!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장단에 맞출 수 없어! 그만둬!”
“하지만, 당신이 죽게 되잖아요!”
그 말에 석민은 잠깐 몸을 휘청거렸다.
아영의 말도 맞았다. 석민은 자신을 희생하라는 퀘스트를 상기했다.
“저라고 그걸 원할 것 같아요?”
“그건 내 일이야.”
석민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했다.
“당신 일이라고요? 우린 팀입니다. 팀은 팀원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절대로 잃어선 안 돼요.”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답했다. 아영의 내면에 숨어있던 트라우마가 다시금 터져 나온 것이다.
그녀는 작전 중에 팀원들을 잃었었다.
내심 석민에게 열등감과 질투를 가졌지만 그녀에게 석민은 소중한 팀원이었고 절대로, 다시는 잃을 수 없는 존재였다.
“우리에겐 능력이 있고,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요. 할 수 있어요. 최악을 상정해도, 전 더 이상….”
석민은 차마 더 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한 번만이라도 제 말을 따라주는 게 어때요? 여태까지 당신이 하는 말에 따라주었잖아요! 절대로 석민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이걸 성공하면, 석민 씨도 나도 죽지 않고, 국가도 큰 이익을 얻어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새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거예요. 이 나라는 아직 가능성이 있어요. 거리에 부랑자나 집 없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다시 평화가 찾아오면 다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부모 세대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성공했는데, 우리라고 못할까요? 게다가 서울을 제외하고는 인프라가 차고 넘쳐요! 사람들도 고학력자들이고, 에너지 쪽만 자립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요.”
그녀는 마치 한동안 묵혀두었던 응어리를 푸는 것마냥 열변을 토해냈다.
그래, 석민도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어떤 목표를 이루는 것은 주저할 것이다.
“혜원 씨를 생각해요.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의 발목을 잡아서 군대가 늦지 않게 도착하게만 하면 돼요. 그것쯤은 못할까요?”
석민은 눈을 감았다.
내면의 본성은 죽고 싶지 않다고 소리쳤다.
“생각해 둔 게 있어?”
혜원의 얼굴이 감은 눈을 통해 어른거렸다.
어두운 밤중에 도란도란 나누었던 정다운 대화와 자신을 따스히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길이 스쳐 지나갔다.
“네.”
아영이 답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솔하고 확신에 찬 어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