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204화]
-아영대위?
그의 목소리는 왠지 힘이 없었고, 떨리는 듯도 했다.
-왜 이제야 전화를 한 건가?
“그게….”
대통령의 목소리를 듣자, 감정이 북받친 아영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았다.
-정말로 나라를 배신하고 다른 나라에 붙은 건가?
대통령의 물음에 아영은 감정을 추스른 후 대통령이 괜한 의심을 하게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 그렇겠지. 우리 대위가 배신할 정도면 이 나라는 망해도 싼 나라였겠지.
성현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그러면 무슨 일을 한 건가, 대위?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그렇게 아영은 대통령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독실한 신자의 모습과도 같았다.
사명의 문, 그 너머에 있는 방주와 천사들, 그리고 천국의 문 교단과 베르의 이야기.
한동안 간결하면서도 진실로 꾹꾹 눌러담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절대 그를 배신할 마음이 없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자기 변호도 약간 섞여 있었다.
대통령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이야기만을 들어주었다.
처음엔 사명과 석민 그리고 아영에게 생긴 특별한 능력 이야기를 허망한 환상 이야기로 치부하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으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됐고, 마지막엔 진실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영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통령이 길게 내뱉는 탄식을 들었다.
-왜 이제야 말한 건가?
“죄송합니다.”
-내가 추진하던 정책과 상반되는 것이라서 그런 거지?
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언의 긍정이었고 대통령도 그렇게 알아들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래, 서울을 수복하고 서울과 경기에 깔린 끝없는 겨울을 끝내는 것도 옳은 일이지.
이 마음씨 좋은 사람은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했다. 그래서 아영의 마음이 더욱 아팠다. 이 고통은 분명 죄책감이었다.
-그 불쌍한 친구는, 어떤 반응인가?
“충격이 큰 것 같습니다. 설마 문을 닫는 조건이 자신의 목숨값이 될 줄은 몰랐을 테니까요. 저 또한 몰랐고, 어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귀관이 보기엔 그 친구가 어떻게 반응할 것 같나?
“제가 보기엔….”
솔직히 말해서 아영은 석민이 어떻게 행동을 할지 갈피가 안 잡혔다. 하지만 잠깐 동안 그의 행동 패턴과 지금까지 겪었던 그의 성격을 떠올린 뒤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석민 씨는 근래에 소중한 이가 생겼고, 금전적으로도 전에 비해 여유가 생겨서 처음보다 유해진 상태입니다. 이제 막 인생에 빛이 들어오고 있는데, 다 버리고 목숨 끊는 행동을 할까요?”
-그렇게 보는 건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군.
“네?”
-그 친구라면 분명 자기 목숨을 버릴 거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영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자네만큼 그 친구를 오래 만난 것은 아니지만, 사명이라고? 돈도 못 버는 그런 일을 왜 하겠나? 싹 다 무시하고 원래 하던 작전을 하면서 부수입을 챙기면 그만인데. 설마 자기가 무적이라 안 죽을 거라고 생각했겠나? 최석민 그 양반도 사명감을 가지고 한 거지.
“그렇긴 하지만….”
아영은 석민이 그렇게 순진한 자선사업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가?
대통령이 화제를 돌리자 아영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야 어쨌든 내가 밀던 정책에서 반하는 일을 한 게 아닌가?
“도와주십시오. 대통령님.”
-도와달라고?
대통령이 되물었다.
-뭘 어떻게?
“지금, 그 천사가 하려는 짓은 자기 동족들을 이곳으로 옮기려는 것이고, 드래곤은 그를 방해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이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죽은 베르가 말하길 문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닫힐 것이라 했으니, 대통령님께서 미시던 드래곤하트를 통한 에너지 자립은 불가능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대통령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베르의 말을 신뢰할 수 있냐고 되묻고 싶었으나, 이미 죽은 자였다.
“저희가 문을 닫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군대나 장비를 지원해 주시면, 저희가 기회를 봐서 드래곤을 처리하고 천사의 의식을 방해해서 문을 닫겠습니다.”
아영은 그게 최선이고, 석민이 죽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서울 시립대에 지난 몇 년간 교단의 감염자들이 모아 둔 막대한 양의 드래곤하트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이용한다면 적어도 5년 정도는….”
-아니, 내 생각은 달라.
대통령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방주를 이쪽 세상으로 오게 하게.
“네?”
아영은 놀라 되물었다.
“방주를 안에 들이시면 안 됩니다.”
-고작 300만의 피난민에 지나지 않아. 게다가 배 한 척이 들어온다고 해서 이 나라가 무너지지도 않고. 또한 그게 들어오면 교단인들은 진실을 깨달겠지.
대통령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그리고 그 300만의 천사는 아주 훌륭한 자원이 될 거야.
“네?”
아영이 놀라 되물었다.
-천사에게도 드래곤하트가 있단 걸 알지 않는가?
“네.”
베르와 함께 지냈던 아영은 매우 끔찍한 일이라 생각했다. 비록 인간이 아닐지언정 모습이 유사한데다 그들 또한 감정을 가진 존재였다.
그들의 드래곤하트를 꺼내기 위해선 전부 죽이란 말과 똑같았다.
-게다가 천사의 드래곤하트는 드레이크나 와이번 보다 더욱 오래 자원으로 쓸 수 있는 가치가 있어.
“그건 무슨?”
-전에 자네가 준 드래곤하트, 천사의 것이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자네한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분석결과 천사의 드래곤하트는 발전기 터빈 하나를 8개월 동안 돌릴 수 있다는군. 8개월짜리 연료가 무려 300만 개나 생긴다는 것이야.
아영은 크게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들이 쓰는 기술을 알아낼 기회이기도 하지. 방주라는 것을 분석하면 무언가 새로운 발견도 있을 테고.
대통령의 말을 듣자 아영 또한 그의 의견에 찬동하고 싶어질 정도로 놀라운 정보였다. 솔직히 그 정도면 윤리 의식쯤은 눈 감은 채 못 본 척 할 만할 법했다.
대안이 생길 수 있고, 그들의 사명과 국가에도 이로운 게 아닌가?
-아서 C 클라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나는 마법이나 기적을 믿지 않아. 그것들은 분명 고도로 발달한 과학일 거라 생각하네. 그것들을 알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은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지 않을까? 아, 물론 이것은 추측이긴 하지. 그래, 그 방주가 넘어온 직후에 놈을 제압하면 되겠지. 안 그런가?
환상 속에 있던 아영은 얼른 다시 현실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저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천사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 천사, 오르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저희가 가진 무기로 잡기 힘듭니다. 대통령님 말씀대로 하려면 오르곤이 방주에 들어가서 천사들을 깨우기 전에 제압해야 합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아영은 대통령이 바로 지원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대통령 또한 마찬가지로 바로 지원을 할 것이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 순간, 엄청난 괴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아영이 있던 버려진 상가의 바닥에서도 진동이 느껴졌다.
“다음에 전화하겠습니다.”
아영은 바로 휴대폰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
드래곤 크라케르는 자신이 너무 방심했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당할 리 없다고 오만한 생각을 했다.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나타난 돌연변이가 달려들더니 입 안으로 들어가 찢어발겼다.
그렇지 않아도 수많은 인간들의 총공격이 입으로 향했고, 내뿜는 화염과 주문이 이상한 놈에게 막히는 통에 그것들을 짓밟지 못한 채 자존심 상하게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화가 수그러지지 않은 크라케르는 저도 모르게 불을 뿜어댔다.
심지어 돌연변이에 의해 송곳니 하나까지 뽑힌 상태였다.
천하의 자신이 그깟 하등 생물에게 이빨까지 뽑히다니.
크라케르는 이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회색 연기가 코를 통해 뿜어져 나왔고, 열기 때문에 주변의 땅과 나무가 쪼그라들었다.
그러다 크라케르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에 한 남자가 띄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한들 드래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놈이 왜 저기에 있는 것이지?
드래곤이 더욱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비록 천사의 등에 매달려 있긴 했지만, 전에 봤던 놈이었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않는 드래곤은 석민이 자신에게 로켓을 쏜 놈이란 걸 알아챘다.
당장이라도 저놈에게 가서 사지를 잡아 뜯어버리고 있었지만, 크라케르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직 상처가 깊었다.
입 아니고도 치명상을 입은 상태라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저 생물이 있던 건물엔 창문이 없어서 화염을 뿜어도 타격을 주기 어려웠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주둥이를 높이 쳐들고 울음소리만 크게 내면 됐다. 크고 우렁찬 울음이 아닌, 기괴한 음정을 뒤섞은 소리였다.
그러자 왕십리역 가까이에 설치된 주문들이 풀리면서 권속들이 풀려나왔다.
수천 명의 감염자들은 비틀거리며 나와서 일제히 남산 쪽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상당히 기괴하고도 소름끼쳤다.
드래곤은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번엔 감염자들이 일제히 왕십리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거리를 수많은 감염자들이 가득 메웠다.
곧 사방은 어눌한 발걸음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뭐죠? 갑자기 무슨 일이죠?”
잔뜩 놀란 아영이 올라와 물었지만, 석민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에 물고 있던 담뱃대를 내려놓았다.
급하게 행동하느라 담뱃불을 제대로 끄지 못했고, 연기 고리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그대로 아영에게 포착되었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석민은 아영을 알게 된 이후로 가장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아영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욕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그것을 꾹 참았다. 그의 상황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답답하고 허망하여 담배를 피웠을 것이란걸.
“팀의 목숨을 잃게 하는 행동입니다.”
“…미안해.”
석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명백한 그의 잘못이었다.
순순한 인정에 아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상황에 대해 물었다.
“드래곤이 오고 있나요?”
“아니.”
석민과 아영은 남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담뱃불 보고 운 게 아닌가?”
“아뇨, 그건 아닌 거 같군요.”
아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드래곤은 명백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섬뜩한 기분을 느끼는 가운데, 석민은 드래곤이 마치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석민은 무기를 준비했다.
“이런 식으로 싸우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기대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드래곤은 노려보기만 할 뿐, 가만히 있었다.
“뭐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왕십리역 앞에 있는 광장에 수많은 무리가 나타났다.
느릿느릿하게 어기적거리면서 걸어오는 모습이 상당히 끔찍했다.
“저, 저!”
석민과 아영은 놀라서 제대로 말을 못했다.
“출입구를 막아.”
석민은 유탄을 꺼내서 한 발 쏘았다.
퐁! 하는 소리가 난 지 몇 초 지난 직후에 가장 선두 그룹의 십수 명의 감염자들이 폭발과 함께 날아가거나 파편에 휩쓸려 그대로 쓰러졌다.
석민은 유탄을 빠르게 3발 더 쏘았지만, 감염자들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야, 출입구를 막아줘!”
아영이 자신의 AK-203 소총을 꺼내서 쏘려고 하자, 석민이 제지했다.
“입구를 막으라고요? 어떻게요? 여기 빌딩인 거 몰라요?”
“셔터라던가, 계단 문이라든가 잠글 수 있는 거 많잖아! 옥상 문만 잠갔다가 농성 중에 드래곤이라도 오면 어떻게 하려고!”
계단 문을 잠가봤자 계단이 봉쇄되나?
아영은 석민 역시 당황해서 제대로 생각도 못 한 채 말한다고 여겼다.
“아뇨, 그냥 도망치죠, 석민 씨. 지하철을 이용하면….”
“늦었어.”
그는 고갯짓으로 다른 지하철 출입구를 통해 지하로 들어가는 감염자들을 가리켰다.
감염자들은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