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201화]
절단
비릿한 내음이 코끝에 닿았다.
석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열렸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회색 도시가 비쳤다.
혜원의 침대 위라고 생각했던 석민은 놀라서 몸을 일으키다가 온몸이 망치로 치듯 욱신거리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제야 자신이 하늘에서 베르와 함께 떨어졌단 사실을 떠올렸다.
“베르, 베르?”
찬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금 짙게 나는 비린내에 그제야 이게 피 냄새라는 걸 알아챘다.
자신의 피 냄새가 아니었다. 석은 베르를 살피기 위해 움직이다가 가슴을 치고 가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추락할 때 베르가 지면 쪽으로 떨어져서 쿠션 역할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까지 넘어온 충격은 만만하지 않았다. 아마 베르 또한 엄청난 고통을 느꼈으리라.
베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석민은 손목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자신과 베르를 결속해 두었던 나일론 끈을 잘라냈다.
폐에 피라도 찼는지 통증이 끝나지 않았고, 숨쉬기 힘들었다. 기침할 때마다 고통과 함께 피가 나왔다.
석민은 숨을 최대한 깊게 마셨다. 가슴이 꽉 조이면서 고통이 심해졌다. 그는 신음소리를 흘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우두둑 소리가 나면서 마치 오랫동안 곪았던 고름을 짜낸 것처럼 서서히 통증은 줄어들고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부러져서 폐를 찔렀던 갈비뼈가 치료되진 않았어도 더 이상 폐를 찌르진 않는 것 같았다. 이젠 멍이 든 것처럼 조금 욱신거리는 기분 정도만 느껴졌다. 스탯의 영향으로 점점 몸이 낫는 거였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석민은 헬멧을 벗었다. 제 역할을 항상 충실히 해준 녀석이었지만,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추락할 때 목이 부러질 뻔했다. 살아남은 건 그저 운이 좋은 거였다.
RPG-7 발사관은 추락의 충격으로 부러져서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석민은 그것들을 멀리 던졌다.
그때, 큰 바람 소리가 석민의 귓가를 치고 갔다. 하늘로 시선을 돌리곤 기겁하며 몸을 일으켜 옆으로 피했다.
그가 있던 자리, 베르의 시체에 큰 창이 깊숙이 박혔다.
오르곤이었다. 그는 그대로 창을 들어 올렸다. 베르의 시신은 아주 쉽게 들렸다.
석민은 도저히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오르곤은 창을 휘둘러 석민의 방향으로 베르를 던졌다. 조준이 너무 높아서 석민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석민은 SMG 홀스터에서 총을 꺼내서 오르곤을 노리고 쐈으나, 그는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가려 쉽게 막아냈다. 그리곤 석민을 향해 돌격해왔다.
석민은 기겁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 자신의 몸 상태는 완벽하지 못했다.
RPG를 챙겨온다고 수류탄과 소총은 다 빼고 보조 무기로 9A-91과 같이 딸려있던 권총만 챙겼는데, 이걸론 오르곤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했다.
순식간에 20발짜리 탄창이 비었다.
오르곤의 창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재장전할 겨를이 없자, 석민은 우스운 꼴이 되더라도 억지로 챙기려 했던 권총을 꺼내 오르곤의 무릎을 노리고 쐈다. 창이 석민의 눈앞을 스치는 순간, 오르곤의 무릎에 총알이 박혔다. 오르곤이 이를 악물며 무릎을 꿇었다.
석민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도망쳤다.
넓은 곳에선 자신이 너무 불리했다. 그리고 저 망할 놈의 날개를 뚫을 법한 무기도 필요했다.
베르의 창으로 상대할까 잠시 생각도 했으나, 그곳까지 가려는 길목을 오르곤이 단단히 막고 있어서 힘들었다.
석민은 차선책으로 무기고가 있는 건물을 향해 달렸다.
오르곤은 창을 거꾸로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뒤돌아서 달려가는 석민을 향해 창을 던지려 했지만 다리에 입은 부상이 제법 심해서 제대로 조준이 안 됐다.
결국 오르곤은 다리를 질질 끌고서 석민을 뒤쫓아 갔다.
석민은 부상 때문에 움직임이 느렸다.
아직 뼈가 안 붙었다.
스탯 덕분에 뼈가 매우 빠르게 붙는다지만 최소 5분에서 10분은 더 있어야 뼈가 붙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권총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상황이 최악인데도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에 웃음이 났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가 그리웠다.
아영이 같이 있다면 저런 놈 따위는 금방 처리했을 것이다.
‘유탄 발사기 한 발만 있었어도.’
무기고는 상태가 썩 좋진 않아도 여러 종류의 탄약과 무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전에 두고 간 SR-1 소총도 있을 터였다.
이미 다 살펴본 무기들이긴 해도, 자세히 살피다 보면 다른 뭔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9mm 건 5.56mm 건, 천사든 뭐든 맞으면 죽는 건 똑같았다.
석민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몸은 석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회복이 더뎠다. 입 안 가득 피가 고였다.
석민은 스스로 기절하지 않기 위해 비릿한 피를 삼켰다.
그런 석민의 뒤를 오르곤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따라오고 있었다.
오르곤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대론 석민을 추격하기 어렵다고 여긴 탓이다.
그때, 석민이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순식간에 석민이 서 있던 아스팔트 전부가 젤리처럼 변했다. 마찰력이 0에 가까운지, 엄청나게 미끄러웠다.
아무리 움직여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당황한 석민이 허둥거리다가 SMG 홀스터에서 다시 소총을 꺼내 20발짜리 탄창을 끼웠다.
창이 2미터 앞까지 도달했을 때, 석민이 연사로 오르곤을 향해 쐈다.
총성이 연달아 울리면서 석민의 몸이 반동으로 뒤로 밀려났다.
석민의 총격에 오르곤이 접근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타 석민이 계단을 올랐다. 몸이 계속 미끄러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냄새는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건물 입구로 들어서서 바리케이드로 쌓여있던 가구들을 붙잡아 쓰러트려서 입구를 막았다.
고작 몇 개의 가구뿐이었지만, 입구가 좁은 데다가 덩치가 큰 오르곤에겐 제법 훌륭한 방해 거리가 돼줄 것이다.
석민의 예상대로 오르곤은 입구에서 막히자 거칠게 손을 움직여 가구들을 잡아 당겨댔다.
그 구멍 사이로 오르곤과 석민의 눈이 마주쳤다. 분노로 가득 찬 오르곤의 눈은 이해하기 힘든 생물을 마주친 자처럼, 석민에게 오싹함을 선사했다.
석민은 복도를 지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
아영은 멀리서 희미한 총소리를 들었다.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그 소리만으로도 석민이 자주 쓰던 9X39mm 탄약인 것을 눈치챘다.
‘석민 씨가 살아있다!’
그 사실을 깨달자, 절망에 빠져있던 그녀는 다시금 용기를 얻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교전 중인 게 분명해.’
도와주러 가야 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최대한 빨리 간다 해도 못해도 2시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아영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지하로 내려갔다.
장기전이 될 수도 있었고, 어느 쪽이 이기든 수습을 하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선 석민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전우로서의 도리였다.
‘다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
혹여 저격총을 챙겼더라면 어디 고지대에서라도 감시하며 도와줬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그녀는 석민이 주었던 AK-203은 어깨에 둘러메고 이동했다. 적어도 왕십리역사까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망할 놈의 수영을 다시 해야겠지만.’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녀는 어느샌가 말투나 습관이 석민과 비슷해졌단 걸 깨달았다.
‘제발, 무사하세요.’
그녀는 퀘스트창을 열어서 다시 확인했다.
사실, 왕십리역의 지하에 도착했을 때 그녀에게 새로운 퀘스트가 나왔었다.
그것은 아영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고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차마 석민에게 바로 말하지 못했다.
최악을 가정했을 때, 자신이 죽더라도 석민은 죽어선 안 될 자였다.
가장 이상적인 건 베르가 죽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황상 베르가 살아있을 확률은 매우 낮아 보였다.
아영의 얼굴이 걱정으로 어두워졌다.
***
석민은 무기고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무기들을 뒤졌다.
대부분은 예전에 보았던 데로 사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는 미련하게 새로운 무기를 찾기보단 40mm 유탄들이 가득 담긴 상자들을 찾아보았다.
“어디보자, 여기서 본 것 같은데.”
그는 피가 섞인 기침을 하며 유탄들 속에서 나무개머리판이 달린 유탄 발사기를 찾았다.
“M79. 역시 살펴보다가 어렴풋이 본 것이었는데, 있었네.”
M79는 구닥다리 무기로, 월남전 때나 쓰던 것이지만 근래에 다시금 사용되는 무기였다.
아무래도 예비군들을 위해 치장물자로 두었다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것들을 들어 올렸다.
꼴에 총기가 아니라 유탄이라고 알림글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유발사기의 약실을 열어서 유탄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왜 이걸 안 썼을까?
폭음이 너무 큰 폭발물이라 괴수들에게 지나치게 큰 주의를 끌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는 석민은 유탄들을 챙겼다.
5발이면 충분할 것이다. 이중목적유탄과 일반유탄을 각각 2발과 3발씩 챙긴 직후 그는 SR-1을 꺼내 들었다.
[Kalaschnikow SR-1]
내구도: 100%
품질: 상상
탄약: .223 Remington
칼라시니코프사에서 생산한 민수용 소총,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아 상태가 매우 좋다.
그는 알림글을 통해 총기의 상태를 확인한 직후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30발짜리 5.56mm 탄창들을 꺼내 클립 어댑터를 끼운 후 5.56mm 10발짜리 클립을 넣고 탄을 한 번에 쭈욱 넣었다.
석민의 행동은 매우 신속했다.
3탄창 전부 30발이 들어가자 그는 스프링 장력이 힘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거꾸로 둔 상태에서 방탄복의 탄창파우치에 끼워 넣었다.
이제 오르곤을 상대할 준비는 끝났다.
석민은 이중목적유탄을 유탄발사기에 끼워 넣은 직후 무기고를 나왔다.
그때, 무기고 입구 반대편에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석민의 시야에 손과 발을 이용해서 기어 지하 복도를 따라 기어 오고 있는 오르곤과 눈을 마주쳤다.
‘뭐야 저게? 저거 왜 저래?’
그는 인상을 쓰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안으로 들오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날개로 몸을 감싸서 좁은 틈을 비집는 모습이 기괴했다. 오르곤의 번들거리는 눈은 마치 광기처럼 보였다.
석민을 확인한 오르곤은 더 빠르게 접근해 왔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서 들어와야 했나?
게다가 이쪽엔 유탄발사기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석민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유탄발사기를 조준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퐁! 하고 유탄이 발사되어 오르곤에게 닿으려던 순간, 갑자기 오르곤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그대로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뭐야?”
놀란 석민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허공을 지난 유탄은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물수제비마냥 튕기더니 반대편 벽에 부딪혀 폭발했다. 그 충격이 복도를 따라 석민에게까지 엄습했다.
“뭐야?”
흙먼지 가득 마신 그는 다시금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