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이트 오브 서울 200화 (200/226)

[게이트 오브 서울 200화]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선호석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성현제는 휴대폰을 들었다. 아영과 연결된 비화폰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성현제는 아영만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편이라 신뢰했다.

국회의원이던 시절, 자신을 구해줬던 그녀였다. 그 뒤 종종 대화를 나눌 때마다 깊이 있는 지식과 올곧은 성품을 느낄 수 있었고, 남다른 애국심 또한 두드러졌다. 그녀는 언제든지 나라를 위해 봉사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조국을 배신하고 매국 행위를 했단 말인가?

‘아니야.’

성현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영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성현제는 자신이 제법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 믿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를 믿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최석민.”

성현제의 입에서 읊조리듯 석민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영이 만약 어떤 배신의 행위에 조금이라도 연루가 되었다면, 그건 그녀가 실수한 것이리라.

그녀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이미 싹튼 불안과 의심은 모든 화살을 석민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석민 때문이다. 러시아 요원과 대화를 나눈 것도 석민이었다.

‘방첩부서에게 일 좀 시켜야겠네.’

성현제는 나지막이 한숨으로 짜증을 흩어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가안보실장과 대통령의 동태를 확인할 정도면 청와대에서 외국에 포섭된 자가 있다는 것이니까.

‘아영 대위에게 전화를 해봐야겠지.’

선호석은 둘 다 처리해야하며 절대로 전화를 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휴대폰 위치 추적결과 계속 서울 시립대 쪽에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봐선, 정체를 들켰다 생각하고 휴대폰을 버린 것입니다. 전화를 해봤자 받을 리 만무합니다. 대통령님, 시간이 지체될수록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국가안보실장인 선호석이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그도 충실한 충복이었다. 그렇다 한들 성현제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성현제는 잠시 생각해본 뒤 답을 주겠다 말하고 그를 물렸다. 선호석이 독단으로 러시아 정보부와 거래하여 그 두 사람을 처리하기로 한 걸 몰랐기 때문이다. 알았다면 그를 물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선호석을 신뢰하지만, 그보단 아영과의 인연을 더 강하게 믿었다.

성현제는 망설이며 들고만 있던 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발신음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기만 할 뿐 연결은 되지 않자 성현제는 한숨을 쉬며 종료 버튼을 눌렀다.

선호석의 말대로 그들은 휴대폰을 두고 이동을 한 것 같았다.

그는 아영의 개인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그 또한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은 조금 성가시게 됐다고 생각은 할지언정 아영을 의심하지 않았다.

굳은 신뢰와 작은 우정, 절대적인 믿음이 그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대통령은 비화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선호석, 이 새끼가 괜히 전화해 가지고 휴대폰들을 두고 간 게 분명해.’

아영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대통령은 일단 눈앞에 벌어진 일부터 해결한 직후에 다시 아영과 연락을 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방열복을 차려입은 교단의 사도대 대원들이 빠르게 냉동 트럭을 향해 움직였다.

교주의 신성한 기적이 그들을 보호해준다곤 하나, 크기가 한정된 데다 드래곤의 공격 때문에 교단인들이 산개해버렸기 때문에 보호막이 교단인 전부를 보호해주진 못했다. 그건 냉동 트럭 또한 마찬가지였다.

차량의 겉은 불타고 있었다. 차를 몰던 기사도 겁먹은 채 도망치다가 한줌의 재가 되었다.

곳곳에선 까맣게 탄 채 죽어있거나, 불타고 있는 자의 비명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드래곤의 불길 때문에 보호막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서 냉동 트럭을 향해 가는 길은 더뎠다. 그곳에 잠들어 있는 이들이 절박한 순간이었다.

열심히 하늘을 향해 산탄총을 쏘아대며 괴성을 질러대는 남자를 밀치며 냉동 트럭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문이 열려 있었다.

“아…!”

검정색 군복에 무장을 한 이들이 사도대 대원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발라크라바에 전투용 안경을 쓰고 있어 그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바짝 마른 몸들이었다. 화염의 열기 때문에 몸이 좀 많이 그을려 있었다.

그들은 냉동 트럭의 적재칸에 잠긴 자물쇠를 직접 총을 쏴서 열어둔 상태였다.

“미리 해두셨군요.”

사도대 대원들이 말했다.

“형제님이 일어났습니까?”

말하는 사도대 대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머리 위에서 드래곤이 울부짖는데도 그들의 두려움이 담긴 눈은 냉동 트럭의 문에 꽂혀 있었다.

“형제님은 무사합니까?”

사도대 대원이 다시 물었다.

“무사합니다.”

조금은 거칠면서도 냉정한 목소리로 그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바퀴가 녹아내려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차 또한 표면이 찌그러지거나 불타고 있었지만, 단열재가 잘 되어 있어서 그런지 내부는 멀쩡했다.

“우리는 구속을 풀 수 없습니다.”

밖의 이변을 감지했는지 차가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몇몇 이들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동시에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발톱으로 쇠를 긁는 듯 기괴한 소리도 들려왔다.

점점 문을 두드리는 쿵쿵 소리가 커져갔지만, 자물쇠만 부셨을 뿐 잠금장치는 풀지 않아서 문이 열리진 않았다.

“확실히 구속된 거 맞습니까?”

“안 열어봤으니 모릅니다. 교주께서 이 자를 풀어 주라고 했습니까?”

“네.”

그 말에 무장을 한 자들은 뒤로 물러났다. 그들 또한 되도록 이것과는 엮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들이 비켜선 자리로 들어간 사도대 대원들은 서로를 눈짓으로 살핀 뒤, 문으로 다가가 잠금장치를 풀었다.

서서히 열린 문 사이로 하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안은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속구를 풀 수 있는 자물쇠와 쇠사슬이 문가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들이 안으로 들어갈 일은 없었다.

“형제님.”

벌벌 떨리는 손으로 사도대 대원들이 자물쇠를 풀었다. 그 부름에 대답하듯, 짐승 같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일어나십시오.”

마지막 쇠사슬까지 푼 그들은 문을 활짝 열고 뒤로 물러났다.

“교주께서 적을 처치하길 원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석민과 베르는 목표를 달성하고 아영에게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석민은 베르의 등에 봇짐처럼 매달려 하늘을 날았다. 얼핏 비참한 형상인 데다 몸은 꽁꽁 얼고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어쨌든 계획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석민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교단의 전투원이 드래곤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뭐, 운이 좋으면 치명상 정도는 입힐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대로 드래곤이 죽으면 좋겠지만, 기대 해봤자 어려운 일이겠지?’

어쨌든 드래곤은 부상을 입을 것이 자명했고, 못해도 힘이라도 빼줄 게 분명했다. 그 정도면 위험을 감수한 보람은 충분히 있으리라.

그렇게 상황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사이, 석민의 눈 사이에 무언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구름 속에서 날고 있는 존재였는데, 절대로 와이번은 아니었다.

하얀 날개로 보아 천사일 게 분명했고, 오르곤이 자신과 베르를 습격하려는 게 아닐까 판단한 석민은 보조로 챙겼던 총을 꺼내 들었다.

“베르, 뒤에 지금 오르곤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름 속에서 오르곤이 튀어나왔다.

그자는 베르의 날개를 노리고서 창을 크게 휘둘렀다.

베르와 석민을 추락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게다가 날개를 다치면 문을 여닫는 의식에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기에 의식을 방해하기 위한 의도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베르는 급히 선회를 해서 그것을 피했다.

뒤에서 공격이 실패하고 추격이 오자, 기겁한 석민은 자신의 총을 쏴댔다. 급한 조준에다 비행으로 언 몸 때문에 감각이 무뎌져 눈먼 총알 3발이 오르곤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갑작스런 총격에 오르곤의 몸이 출렁이더니 이내 구름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급하강하더니 베르의 아래쪽으로 몸을 낮췄다.

각도가 맞지 않아서 석민은 총을 조준할 수 없었다. 사격 각도를 맞추기 위해 베르보고 이 이상 상승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석민은 하얗게 성에가 잔뜩 낀 총을 고쳐 잡다가 놓칠 뻔했다. 장갑을 3중으로 꼈는데도 손가락이 얼어서 방아쇠를 움직이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석민은 하늘은 자신의 전장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는 몸을 돌려 베르에게 하강할 것을 종용했다. 베르는 조금 머뭇거리듯 석민과 아래쪽에 위치한 오르곤을 눈으로 힐끔거리며 번갈아 보다가 고도를 낮췄다.

그러나 그건 바로 오르곤이 노리고 있던 수였다. 베르가 순박하게 수직 하강을 한 것 또한 잘못이었다.

베르가 하강하기 무섭게 오르곤이 상승하며 창을 위쪽을 향해 횡으로 휘둘렀다.

고도를 낮추고 있어서 베르는 피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창이 내리꽂히고 있는 곳은 방어구나 무기로 보호가 안 되고 있는 뒤편의 아래쪽이었다.

“위험!”

석민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제대로 경보를 주지 못했고, 한발 늦은 베르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몸을 좌측으로 틀었으나 결국 창격을 피할 순 없었다.

베르의 왼쪽 종아리와 허벅지가 조금 깊게 베였다.

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고 피가 혈관을 제대로 건드렸는지 석민이 기겁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피를 내뿜었다.

천사들의 덩치를 고려한다고 해도 죽을까 무서울 정도의 양이었다.

원래는 날개를 노린 창격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오르곤의 입엔 미소가 걸렸다.

창격에 의해 베르는 몸의 중심을 바로 잡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했다. 베르의 왼쪽 날개가 제대로 접히지 못한 채 세차게 부딪히는 공기 저항 때문에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야, 야, 인마!”

놀란 석민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베르의 이름을 불러댔으나 베르는 하염없이 추락해갔다. 높은 고공에서 땅으로 순식간에 떨어져 가는 기분은 절대 좋을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이 바로 목전에 다가와 있는 것처럼.

석민은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마구 총을 쏴댔다.

분노와 두려움, 복수심 등이 섞인 사격이 오르곤을 향해 쏟아졌으나, 제대로 조준도 안 된 총알인 데다가 이미 하늘 위로 올라간 오르곤이 총에 맞을 리 없었다.

“이런 젠장!”

석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점점 멀어지는 구름들을 보았다.

“야, 베르! 정신 차려!”

겨우 다리 베였다고 말하기엔 상처가 큰 데다 피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베르는 출혈 쇼크인지 흐릿하던 눈동자마저도 서서히 넘어가더니 눈꺼풀이 감기고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이런, 세상에….”

석민은 고개를 내려 밑을 내려다보았다. 폐허가 된 서울의 도시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건물의 잔해들이 가득한 땅에 박히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떨어지는 방향이 우연찮게도 서울 시립대 방향이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 죽은 목숨이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미친 듯 뛰는 심장 때문에 심장마비가 오거나, 아니면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았다.

눈앞에서 혜원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연락을 못 했네.’

서울 소식 들었으니 엄청 걱정하고 있을 텐데.

혹시 모른다. 자기를 기다리면서 맛있는 요리를 하고 있을지도.

아영에게도 미안하게 되었다. 자신 없어도 이 일을 그녀가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 걱정됐다.

구속구를 풀 수도 없었고, 낙하산도 없었다.

‘게임 오버야.’

석민은 눈을 감아버렸다.

곧 큰 충격이 석민의 온몸을 뒤덮었고 의식을 잃었다.

마침 왕십리역 건물 옥상에서 석민과 베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던 아영이 상황을 목격했다.

하연 별빛이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력 스탯을 이용해 그 모습을 확대했고, 공포에 질린 석민의 얼굴과 마주했다.

“아, 안 돼!!”

아영의 외침이 무심하게 석민은 빠르게 지상을 향해 떨어졌다.

지금 베르와 석민을 잃는다면 사명이고 뭐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이대론 그녀 혼자서 이 황망한 서울에 고립된 채 남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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