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98화]
얼굴이 알려졌다고 하니 변장을 해야 했다.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방으로 가서 마스크 하나를 찾아 꺼냈다.
살구색의 마스크는 마치 사람의 얼굴 가죽처럼 보였으나,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인조 얼굴이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마스크를 옆에 둔 채 동양인으로 보일 법한 짙은 갈색 렌즈를 착용했다.
그리고 마스크를 쓰자 제법 덩치 큰 동양인 여성처럼 보였다.
‘잘 만들었네….’
서양인 특유의 골격을 숨길 순 없었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됐다.
그녀가 방에서 나오자 휘발유 통을 들고 있던 경비가 다가왔다.
“아, 그래. 뿌려.”
호텔 내부가 금세 휘발유 냄새로 가득했다.
“가자.”
곳곳에 꼼꼼히 기름이 뿌려진 걸 확인하고 알렉산드라가 앞장 서 움직였다.
그들은 위로 올라가는 대신 둔촌역 방향 지하철 터널을 막아두었던 문을 열었다.
안에는 인력 방식의 핸드카가 있었다.
호텔에 남았던 인원이 전부 그 위로 오르자, 그중 제일 건장한 2명이 핸들을 붙잡았다.
철도는 이전에 미리 사용할 수 있도록 복구해둔 상태였다. 종종 소수의 인원을 옮길 때나, 물자 조달에 사용했었다.
알렉산드라는 불붙인 휴지를 바닥에 던졌다.
흥건했던 휘발유가 순식간에 불타면서 호텔 안을 잠식해갔고, 곧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호텔 말리나, 아니 강동역은 그렇게 재가 되어갔다.
알렉산드라는 뜨거운 열기와 새까만 연기를 뒤로한 채 휴대폰을 들고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석민은 괜찮은 남자였다.
이런 여러 상황들이 서로 얽히지 않았다면 제법 괜찮은 말동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한국에 있는 동안 마음 편하게 모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순간은, 그와 대화를 나눌 때뿐이었다.
‘그래서 참 좋았는데.’
그렇다 한들, 상부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아마 전화나 문자하는 것도 대단히 어리석으리라.
알면서도 알렉산드라는 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협력을 하기로 약속했었는데, 상황이 설마 정말로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어.’
그리고 이젠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낮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 대신 옆에 있던 경비원에게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상황이 변함, 너 위험, 나 철수, 안녕.]
‘대충 이렇게 하면 알아듣겠지.’
휴대폰을 경비원에게 돌려준 그녀는 어두운 터널을 바라보았다.
위쪽에서 쿵쿵 소리가 울릴 때마다 터널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졌다.
핸드카는 빠른 속도로 터널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휴대폰을 손에 든 혜원은 불안한 눈으로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 어떤 전조도 없이 경기도에 소요 사태가 일어났고, 통금령이 떨어졌음에도 폭동은 벌어졌다. 무장을 한 천국의 문 교단이 서울로 진입한다는 속보까지 뜬 상태였다.
이런 때 가게를 여는 건 매우 위험했다. 결국 혜원은 가게 문을 닫아 잠궜다.
실제로 가게 문을 두드리거나 유리창을 깨기 위해 돌을 던지거나 총을 쏜 자들이 있었다. 가게를 약탈하려는 놈들이었다.
혜원은 지난번 납치 이후 유리창은 전부 방탄 성능이 있는 강화 유리로 보강해두었다. 불안에 의한 강박으로 한 일이었지만 덕분에 지금 같은 때 걱정은 한 술 덜 수 있었다.
혜원은 CCTV로 문을 열심히 뚫으려고 하는 놈들과 방송을 번갈아 보았다.
어차피 저런 놈들이 저 문을 뚫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콘크리트톱이 있을 리도 만무했고, 문을 풀 만한 도구도 없어 보였다.
그보다 걱정이 드는 건 석민이었다.
전화를 몇 번이나 했지만, 석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혜원은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무기도 그렇게 잔뜩 챙겨갔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았지만, 불안감이 전혀 가시지 않았다.
CCTV의 움직임 감지 센서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어떤 미친놈들이 회원 카드 리더기에 무언가 기기를 연결하고 조작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들이.’
혜원은 기가 질린 나머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녀는 컴퓨터로 문의 조작에 들어갔다.
일반적인 폭도가 아니라, 혼란스러울 때 한탕 챙기려는 목적의 전문가들인 것 같았다.
혜원은 컴퓨터를 조작해서 아예 문 쪽의 전력을 차단했다.
은행금고마냥 육중한 강철 문을 어떻게든 열려고 시도하는 그들이 우스웠다.
여기만큼 안전한 곳은 없었다.
‘그리고 걔도 안전했으면 좋겠네.’
그녀는 신을 믿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존재하길 바랐다.
***
붉은 용, 아직 이름은 알 수 없는 그것이 남산에 똬리를 튼 채 서울의 동태를 지켜보았다.
남쪽에서 폭음과 섬광이 울리고 번쩍였다. 가끔은 예광탄의 불빛들이 보이기도 했다. 마치 반딧불이들의 행렬처럼 길게 늘어선 차량들이 빛나는 지렁이처럼 보였다.
드래곤은 코웃음을 쳤다.
영리한 이 짐승은 이미 저들의 존재와 배후가 누구인지 알았다.
드래곤은 저것들을 어떻게 요리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면서도 자리를 유지했다.
섣부르게 움직이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천사가 문에 접근해서 열거나 닫아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직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드래곤이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미소를 짓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것이 감지되었다.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걸어둔 주문들이 발동되면서 잡아두었던 권속이나 괴수들이 풀려난 것이다.
드래곤의 고개가 주문이 풀린 곳으로 돌아갔다.
드래곤을 향해 무언가가 낮은 고도로 날아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저게 뭐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드래곤은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낮게 비행하는 천사의 존재는 당연히 베르였고 그의 등에 매달린 것은 석민이었다.
“너는 미쳤다.”
베르가 말했다. 그 말에 석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한테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내가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네. 그리고 인정한다.”
안 그래도 추운 서울 날씨에 베르의 등에 매달려 빠른 속도로 날아가다 보니 석민의 몸은 달달 떨리고, 발음은 부정확했다.
석민은 여러 가지 도구들을 이용해 베르의 등에 자신의 몸을 단단히 결속시켰고, 무기들을 챙겼다.
그리고는 눈앞의 수많은 주문들을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베르가 지나치자마자 멀쩡해 보이던 건물이 무너지거나, 주유소가 폭발하고, 수백의 감염자들이 풀려나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심지어 와이번이 나타나 그들을 추격하기까지 했다.
“꽉 잡아.”
와이번 몇 마리가 그들을 노리고 날아들었을 때, 베르는 곡예에 가까운 비행으로 피했고 석민은 몸을 웅크렸다.
석민은 베르가 몸을 틀자 중력의 영향으로 몸이 한쪽으로 심하게 쏠렸다. 거기다 차가운 바람에 손이 어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다행히 와이번들은 깊게 추격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베르와 석민을 추격하다가 그 너머에 있는 드래곤의 존재에 놀라 혼비백산하며 흩어져버렸다.
석민은 고개를 돌려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와이번 너머를 바라보았다. 주문들을 전부 풀어버린 것 때문에 괴수 백수십 정도가 서울에 다시 풀린 거 같았다.
“아직이야?”
“다 왔다!”
바람 소리에 말이 묻힐까봐 베르는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저공비행을 하던 그가 하늘 높이 올랐다.
석민은 어깨에 메고 있던 RPG-7을 잡고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탄두가 크고 위력이 막강한 열압력탄두가 이미 장전되어 있었다.
사거리가 짧은 것이 흠이지만, 상관없었다. 높은 곳에 있으니까.
석민은 드래곤을 조준했다.
드래곤은 아직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모른 채 멀뚱멀뚱 베르와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여태까진 천사는 도망치기 바빴고 쫓는 자는 자신이었다.
설마 천사가 먼저 자신을 찾아올 줄은 절대로 생각지 못했다.
석민은 조준하기 무섭게 방아쇠를 당겼다.
로켓이 날아가 드래곤의 목에 착탄하기 무섭게 폭발과 함께 드래곤의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렸다.
하늘을 찢을 것 같던 비명은 이내 분노의 함성을 바뀌었다.
그 순간, 석민의 눈앞에 새로운 알림글이 떠올랐다.
[드래곤 크라케르를 처치하여 사명을 완수하라.]
아마 아영에게도 떠올랐을 게 분명했다.
“좋아, 돌려!”
석민의 말에 베르가 몸을 돌려 날아갔다.
드래곤 크라케르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펴고 그들을 향해 날아올랐다.
***
박재만은 초조한 눈으로 상황판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된 건 언젠가?”
“5분 전입니다.”
예정했던 것보다 늦어져서 박재만의 얼굴은 매우 심각해졌다.
이왕이면 실시간으로 GPS로 위치를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교단의 교인들은 계획대로 움직여 주었다.
군 내부에 있던 인원들이 봉기하고 뒤에서 사보타지를 해준 덕분에 1만이 넘는 정예 교인들이 서울로 진입할 수 있었다.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고 비명소리가 난무했지만 대부분 우리 쪽 사람이 아닌, 불신자들의 비명소리였다.
결사대 인원을 제외하고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강남 지역은 괴수의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 덕분에 그들은 서울에 진입해놓고도 괴수 하나, 감염자 하나 마주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좋았다, 지금까지는.
그런데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 바로 정체였다.
군대가 나중에 서울 수복을 위해 개척해 놓은 대로들 덕분에 빠르고 안전하게 서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1만이 넘는 정예 교인들과 그들을 태운 차량으로 밀고 들어왔더니 교통 정체가 생긴 것이다.
가다가 서는 상황이 계속되자, 교구장들은 참다 못하고 의견 개신을 했다.
“서울에서 차를 이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속하게 서울에 입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구장 중 하나가 백은호에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올렸다.
“차들을 두고 이제 걸어서 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광배를 등에 업고 있는 교주는 요지부동이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문으로 가려면 차량이 필요하다. 문의 근방에 적들이 도착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니 빨리 가야 한다. 게다가 정부가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빨리 가려면 차가 필요하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교주는 횡설수설한 답변을 내놓았다. 교구장들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아무래 광배를 뿜고 선택을 받은 선지자라고 해도 그도 본질은 인간이었다. 그것도 아주 답답한 인간이다.
“그렇기에 저희들의 말을 따라 주셔야 합니다.”
박재만이 말했다.
“길이 전부 완벽하게 개척된 게 아니기 때문에 전 차량들이 빠져나가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박재만이 말했다.
“그러니 우리의 최정예 사도대 대원들을 장갑차에 태우고 먼저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한데….”
망설이는 교주의 모습에 박재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혹시 소수의 인원만 보냈다가 뭔가 일이 틀어질까 염려하는 게 아닐까 판단했다.
그는 교주를 향해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전차도 같이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차가 있으면 소수라도 충분히 위협적일 것입니다.”
전차라는 말에 교주는 잠깐 고민하다가 승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