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96화]
대략 50분쯤 후, 석민과 아영, 베르는 지난번 감염자들을 따라갔던 길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맨홀이 있는 곳까지 당도했다.
덩치가 큰 베르의 몸이 지나가기엔 너무 협소한 공간이었다.
“잠깐 기다려봐.”
석민이 먼저 맨홀을 따라 내려가 보았다.
입구만 좁을 뿐, 안쪽은 크고 깊었다.
하수도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큰 비가 올 때 빗물이 역류하지 않도록 크게 파둔 덕분에 안에서 베르가 움직이기엔 무리 없어 보였다.
“맨홀 구멍을 키워보지.”
석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베르가 창으로 맨홀 구멍을 갈랐다. 분명 튼튼한 콘크리트인데도 마치 두부라도 썰 듯, 너무 쉽게 잘려 나갔다.
도대체 천사들이 가진 무기들은 어떻게 만들어졌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지.
석민은 의문을 담은 눈으로 떨어져 나가는 콘크리트 파편들을 옆으로 치웠다.
그렇게 구멍을 넓혀가고 있을 때, 어디선가 커다란 총성과 폭음이 울렸다. 거리는 멀었다.
“그놈들이 벌써 진입하는 건가?”
석민이 중얼거리듯 물었지만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을 것이라고 아영과 베르는 판단했다.
그들은 소리가 들려온 곳에서 시선을 떼고 하수도를 따라 내려갔다.
안엔 커다란 공동이 있었다. 높이가 족히 2미터쯤 되었다.
“지하에 이런 게 있네.”
어쨌든 베르의 덩치가 지나가기에 충분했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서쪽 방향으로 향했다.
“강북 지역은 난개발이 심해서 이런 거 못 만든다고 들었는데.”
아영도 경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거 빗물 저장 터널 맞지?”
“네.”
그녀가 답했다.
“강남에서 지은 건 트럭 두 대가 지나갈 만큼 크다고 들었어요.”
“뭐, 거기보단 작긴 하지만, 그래도 대단하긴 하네.”
물론, 지나갈 수 있다 해도 키가 4미터쯤 되는 베르가 움직이기엔 고역이긴 했다. 그럼에도 베르는 아무런 불평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대로 길을 따라 쭉 가면 청계천으로 빠질 것 같았다. 그러나 감염자들이 표시한 곳은 다른 곳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구멍이었다.
베르도 충분히 기어갈 크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무리 없이 그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곳을 지나자 나타난 건 더 커다란 터널이었다. 이게 무엇인지 그들은 단번에 깨달았다.
“5호선 지하철.”
아영이 멈춰 있는 지하철의 보라색 선을 보며 중얼거렸다.
석민은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던 지도를 상기하며 대답했다.
“이대로 철도를 따라가면 분명 왕십리역이야.”
표식은 전동차에 있었고 왕십리 바로 전 역인 마장역 방향으로 화살표가 보였다.
목표가 코앞이란 생각에 그들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워졌다.
지하수로 인해 터널의 5분의 1이 얼음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추위도 뒤로한 채 그들은 매우 빠르게 마장역 쪽으로 걸었다.
곧 어두컴컴한 승강장에 도착했다.
드래곤이 걸어놓은 주문은 이상하게도 좌우 승강장에 장벽처럼 걸쳐 있었다. 때문에 승강장을 오를 수 없어서 그대로 철도를 따라 올라가야 했다.
중간 중간 추가적으로 걸려있는 주문을 피해 걸어야 했지만, 서울 폐허 위를 걷는 것보단 나았다.
‘구옥희 중령이 가는 길이 어렵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나 보네.’
석민은 낮게 혀를 차며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이야.”
아영이 베르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곧 도착이란 말에 베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석민도 잠깐 시선을 베르에게 돌렸다가 다시 앞서 걸었다. 베르와의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한편으론 드래곤이 걸어둔 주문이 이렇게 쉽게 무력화되는 게 우스웠다.
‘빌어먹을 도마뱀 자식이 짜증나게 주문을 걸어둬서 고생 좀 했지만 이젠 아니야. 통쾌하게 뛰어 넘어주지.’
그렇게 생각하며 석민이 한 걸음 떼는 순간, 철퍽하고 물소리가 났다.
바닥이 깊었다.
“뭐야?”
자칫 잘못하다가 앞으로 빠질 뻔 한 석민이 얼른 뒷걸음질 쳤다.
바닥에 고인 지하수 얼음이 무슨 빙산의 모서리마냥 끝나 있었다.
눈앞의 통로는 물이었다.
게다가 앞에서 불어오는 공기는 따뜻했고 썩은 내가 났다.
“뭐야? 저기는 왜 이래?”
“문의 중심부는 원래 이렇다.”
석민이 놀라며 묻는 질문에 베르가 답했다.
“중심부는 가장 안정적이어야 하기에 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거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지만 석민과 아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베르는 아무렇지 않게 그 물속으로 들어갔다. 대충 추정하건대 물의 깊이는 1미터 40쯤 되는 것 같았다.
석민과 아영은 방한복을 착용하고 있어서 물에 젖으면 안 됐다.
석민이 장갑을 벗어 물에 손을 넣어보았다. 바로 옆에 얼음이 있는데도 물은 따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얼음은 녹지 않았고, 모서리는 날카롭게 각이 서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과학이 모두 무너지는 기분이야.”
석민이 힘없이 중얼거리며 어떻게 이곳을 지나가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아영이 옆에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수 없잖아요? 벗어야죠.”
“야.”
“돌침대에선 아무렇지 않게 말해놓고 그럴 거예요?”
너무 덤덤하게 받아치니 오히려 석민은 더 민망했다.
“아니, 그것과 이건 다르지.”
“아무튼 젖은 옷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벗어서 장비와 옷을 전부 머리에 이고 지나가야죠.”
“어쩔 수 없군.”
낮게 한숨을 내쉰 석민은 몸을 돌려 옷을 벗고는 방탄모만 남겨두고는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채 짐들을 정리했다.
그는 민망함을 감추며 방탄조끼를 쟁반 삼아 물건들을 전부 올려놓고선 물가로 갔다.
“나 먼저 갈게.”
석민은 아영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물속에 들어갔다.
발밑에서 무언가가 계속 밟혔다.
“베르, 앞장서서 가줘.”
“알았다.”
천천히 베르가 앞으로 나아가자, 석민이 그 뒤를 따랐다.
수심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가슴에까지 찼던 물이 이내 키를 넘어 다리가 닿지 않을 정도까지 되어, 결국 수영을 해야 했다.
석민은 장비와 옷이 젖지 않도록 팔을 위로 최대한 올려 발로만 수영을 했다.
‘물이 왜 이렇게 깊은 거야?’
석민은 지하도에서 항상 지하수가 고이기 때문에, 도시에선 펌프로 물을 퍼낸다는 사실을 몰랐다.
다리로만 몸을 계속 띄워서 앞으로 나가는 일은 꽤 중노동이었다.
일반인이라면 아마 금방 지쳐 나가떨어졌을 테지만, 그나마 석민은 스탯이 있어서 무식하게 강행할 수 있었다.
대략 30분쯤 지나자 다행히도 승강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승강장에도 달락달락 물이 차 있었지만, 종아리 정도였다.
스크린도어 문을 강제로 열고 먼저 승강장으로 오른 베르가 석민의 팔을 잡아 건져냈다.
“이런 세상에.”
그는 승강장 가득 쓰러진 시체들을 보았다.
일부는 백골이었으나, 대부분 제대로 썩지 않고 물에 불어터진 채로 있었다.
어두워서 검은 물이 아니라 시체 썩은 물이었다. 왜 썩은 내가 났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게다가 이제 와서 보니 발밑에 무언가 계속 밟히던 것들은 희생자들의 시신들이었다. 물속에 썩거나 잔뜩 분 시신들을 맨발로 밟았던 것이다.
석민은 헛구역질을 겨우 참고 또 물이 입 근처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조금 무거운 몸을 이끌고서 계단 방향으로 걸어 올라갔다.
따로 수건을 챙기지 않아 방한용 내복을 수건으로 사용했다.
다행히 머리는 젖지 않았다. 공기가 상대적으로 따뜻해서 추위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승강장 쪽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나자 그는 다시 짐을 챙기고 계단 위를 올랐다.
물기를 닦았지만 그래도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눈에 지하철 매점이 보였다. 그는 벗은 몸 그대로 다가갔다.
난리가 났을 때 주인이 그대로 도망갔는지 문은 닫혀있지 않았다. 석민은 판매용 냉장고에서 물을 찾아냈다.
최소 몇 년은 묵었을 테지만 물이라서 썩은 것 같지는 않았다.
석민은 그것들을 전부 챙겼다.
“아영?”
“네.”
어느새 이쪽으로 넘어왔는지 계단 쪽에서 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석민은 고개를 돌려 그쪽으로 생수통 2개를 던졌다.
그리고는 생수통의 뚜껑을 열어서 그것을 몸에 부었다.
비누 같은 것은 사치일 것이다. 화장실로 간다면 혹시 비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걸 찾을 시간은 없었다.
생수로 몸을 닦은 석민은 다시 내복으로 물기를 닦은 후 옷을 입었다.
방한복을 입기 무섭게 더위가 느껴졌다. 공기의 냄새는 아주 역하지만, 봄바람처럼 포근했다.
혐오스러움과 따뜻한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그는 방한복을 벗었다. 준비를 마친 그는 발라크라바도 쓰지 않고서 옷들을 한곳에 잘 두었다.
“난 준비 됐어. 올라와.”
잠시 후 아영과 베르가 올라왔다.
“물 고마웠어요.”
아영의 말에 석민은 그저 살짝 미소만 짓고는 벽 쪽에 붙은 지하철 안내도를 확인했다.
여기는 지하 3층이었다. 3개의 노선들이 환승하는 역이고 5호선이 가장 깊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되겠군.”
지독할 만큼 어두운 지하철 터널은 무슨 던전 같았다.
일반인이었으면 앞으로 걷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물을 건너기 위해 제법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배고픔이 느껴졌다. 석민은 주머니를 뒤져서 초콜릿 바를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문의 위치는 바로 머리 위에 있어요.”
아영이 말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베르를 보았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문 앞까지만 베르와 함께하고는 그의 뒤통수를 칠 예정이었다. 이제 그들을 가로막는 주문도 없었다.
쓸모를 다한 개는 솥에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아직 퀘스트 업데이트가 없었다.
역 위로 올라간다면 업데이트가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서 베르에게 더 캐물어 봐야 대비가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문은 어떻게 닫… 아니, 열려고? 무슨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석민은 헛기침으로 말실수를 가렸다.
그런 석민의 행동을 베르는 그다지 수상하게 보지 않는 듯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서 의식을 치러야 한다.”
“그래?”
그 대답에 석민은 자연스레, 그가 하늘에 있으면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아무리 사격을 잘해도 하늘에 있는 천사를 잡아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베르가 하늘에 올라가 버리면? 대공포를 끌고 와서 쏘지 않는 이상 잡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지금 죽일까?’
석민의 오른손이 천천히 내려가자, 아영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힐끔 석민을 보았다.
베르는 왜 그런지 이해하진 못했으나, 긴장된 기류가 자신들 사이로 흐른다는 건 알았다.
그때, 석민은 아영과 눈을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에 아영이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라고 눈짓했다.
‘나도 알아.’
석민은 오른손을 다시 올려 그대로 팔짱을 꼈다.
그렇지 않아도 드래곤을 잡으려면 베르의 도움이 필요했다. 베르 없이 둘이서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거 어쩌지?’
석민은 잔뜩 인상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