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92화]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래곤을 상대할 때 쓰려고 준비한 것이었다.
“내 AK를 가지고 와줘.”
그 말에 아영은 석민의 짐가방에 결속되어 있던 AK-203을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안엔 이미 유탄이 장전되어 있었다.
석민은 그것을 집어 조준했다. 예전에 보았던 포물선이 나타났고, 주저 없이 유탄 발사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퐁! 하고 유탄은 날아가 오르곤의 발 앞에 착탄했고, 곧 폭발했다. 오르곤은 그 충격으로 뒤로 크게 튕기듯이 넘어갔다. 타격이 컸는지 오르곤은 숨을 헐떡이며 뒤로 기었다.
아영은 오르곤의 투구를 노리고 총을 쏘았다. 총성이 울리고 오르곤의 투구 이마 가리개가 깊게 파였다.
아영은 장전손잡이를 당겨 다시 탄환을 약실에 넣은 뒤 같은 자리를 노리고 쏘았다. 순간, 고개를 돌린 오르곤 때문에 탄환이 바닥에 박혀 튕겨져 나갔다.
그 사이 석민은 주머니에서 유탄을 꺼내 새로 장전했다. 거리는 대략 120미터쯤 되었다.
아영이 다시 한발 쏘자 맞았던 자리에 다시금 탄환이 박히면서 더 깊게 움푹 파였다. 찌그러진 투구 덕분에 오르곤의 이마가 조여들었는지 그는 급히 투구를 벗어 던졌다.
상체를 다시 세운 오르곤을 노리고 석민은 유탄을 발사했다. 유탄이 날개에 맞으면서 신관이 작동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저놈의 날개는 무슨….”
석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AK-203을 내려놓고 다시 ASH-12.7을 들었다. 아직 7.62탄환을 소모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유탄도 아껴야 했다.
오르곤은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반대편에 무너진 다리 바닥면에 등을 부딪쳤다.
저 자리에서 나오려면 날거나 옆으로 피해야 했다. 그때면 빈틈이 생길 것이라고 본 석민과 아영은 가만히 조준을 하고 기다렸다.
사면초가에 놓이게 된 오르곤은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서 주변을 살피며 좌우로 고개를 돌려댔다.
그 또한 자신이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행동하기를 주저했다. 결국 다시 주문을 외우려하자 석민과 아영이 동시에 사격을 가했다.
석민은 의도적으로 오르곤의 날개로 가려지는 신체가 아닌 벽면을 쏘아서 깨진 탄환의 파편이 그에게 튀게 만들었다. 제대로 유효타를 먹이긴 힘들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오르곤을 동요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결국 어떻게 해도 상황을 모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오르곤이 날기 위해 날개를 활짝 펴고 날갯짓을 했다. 그러나 좁은 장소와 더불어 상처 입은 날개는 4쌍 중 2쌍만이 움직였다.
특등사수나 다름없는 아영은 스코프를 통해 오르곤의 갑주에 보호되지 않는 틈새, 어깨를 노리고 쏘았다.
대략 20미터쯤 오른 오르곤의 신체가 우측으로 크게 흔들거리더니 그대로 추락했다. 그러나 떨어진 방향이 좋지 못했다. 바로 드래곤이 주문을 걸어 놓은 곳이었다.
오르곤의 신체가 통과하면서 주문의 벽과 함께 추락한 상가의 유리창이 부서졌고, 함정이 발동되었다.
주변이 괴성으로 가득 차더니 골목과 건물에서 순식간에 감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아영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저격총을 다시 자신의 가방에 결속시키고는 가방을 멨다. 그리곤 석민의 가방도 잡아서 건넸다. 석민은 가방을 챙기며 상황을 주시했다.
갑자기 나타난 감염자들은 오르곤이 추락한 방향으로 아우성을 치며 노도같이 달려들었다.
석민은 얼른 천사의 얼굴에 박힌 단검을 뽑아서 피 묻은 그대로 칼집에 넣어 챙겼다.
“빨리 지나가야 해.”
전투의 영향 덕분인지 그들이 있던 중랑철교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듯했다.
그들은 급히 무너진 다리를 건넜다.
이때까진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다.
단지 다리를 건넌 뒤 무너지지 않은 고가 지하철도를 올랐다. 오르곤의 생사여부는 뒤로하고 일단 철도를 따라 회기역으로 달릴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이 첫 걸음을 떼는 순간 눈앞에 새로운 알림글이 떴다.
[잠든 용이 깨어났습니다.]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그들은 서로를 보았다.
잠든 용
한때 남산타워가 자리 잡았던 산 정상 부분에 바위처럼 보이던 용의 눈꺼풀이 꿈틀 움직였다.
길고 긴 수면 동안 잠들어 있던 주문이 발동되었다. 주문은 드래곤의 귓가에 자신을 건드린 자가 천사라 불리는 ‘놀잇감’이자 먹이라고 속삭이듯 읊었다. 용의 눈이 스스륵 떠지면서 주홍빛의 쭉 찢어진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의 시야가 닿는 곳곳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도 따라왔다. 마치 손전등처럼.
눈을 뜬 용은 낮게 기지개를 켜면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신체에 시동을 걸었다. 주변으로 흙이 먼지를 일으키며 부스스 떨어졌다.
용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공기를 빨아들이고 냄새를 모았다.
잠든 사이 쌓였던 서울의 온갖 냄새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용은 주문이 발동된 방향을 쳐다봤다.
먼 거리와 건물들에 가려져서 때문에 눈이 좋은 용이라도 석민과 아영을 발견하진 못했다. 뒤섞인 냄새로 그들이 있다는 자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뒤집어쓴 짙은 천사의 피 냄새만이 풍겨왔다.
용은 간만에 천사를 포식할 생각에 입을 쩌억 벌리고는 크게 괴성을 질렀다.
그 포효와 모습은 서울 전체와 방벽에 주둔한 군부대, 오랜 시간 남산을 감시하던 관측 드론의 렌즈와 청음기를 통해 감지되었다.
드래곤은 느릿하게 날개를 한 번 펄럭여본 뒤 주변이 바람에 부서지고 휘날려가는 걸 즐거운 눈으로 훑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
“세상에.”
귀가 울리고 오금이 저릴 정도로 엄청난 괴성에 놀란 석민과 아영은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그들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달렸다. 예전에 괴수들과 전투를 벌였던, 버려진 전동차 아래로 몸을 숨겼으나 3쌍의 눈동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당장 나가.”
헌터들 중 하나가 권총을 석민의 미간에 조준하며 속삭였다.
“그래, 알았어. 바로 가지.”
석민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얼른 거기서 기어 나왔다. 아영 또한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석민이 내민 손을 잡고서 기어 나왔다.
“달리자.”
결국 그들은 다시금 회기역을 향해 달렸다.
회기역에 당도할 때까지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그들은 자꾸 무겁게 어깨를 누르는 짐들까지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죽을 만큼 달렸다.
그들이 승강장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떼기도 전에 쿵! 하고 땅울림이 크게 일어났다. 그들은 재빠르게 승강장에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였다.
중랑철교에 도착한 드래곤은 막상 기대하던 천사가 보이지 않자 실망했는지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그러다 주변에 천사들의 시체와 교전의 흔적이 보이자, 주변을 수색하기 위해 코를 킁킁거리며 움직였다.
“움직이지 마세요.”
아영이 텍티컬 잠망경을 꺼내 주변을 살피려던 석민에게 주의를 주고 입을 다물었다.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거리가 제법 되었는데도 드래곤의 숨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드래곤은 주상복합 건물을 자신의 앞발을 휘둘러 박살내고 오르곤이 떨어진 곳을 확인했다. 안에는 그것의 권속인 감염자들만 가득할 뿐, 오르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위험을 넘기고 몸을 숨긴 듯했다.
극도의 굶주림을 느낀 드래곤은 감염자들을 앞발로 한 움큼씩 잡아서 그대로 입에 쑤셔 넣었다.
“끼에엑!”
잡힌 감염자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미약하게 반항을 했지만, 그저 그의 한 입 거리로 사라질 뿐이었다.
드래곤은 바짝 마른 육포 쪼가리가 아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육이 필요했다. 이윽고 죽은 천사들의 시체를 혀로 핥고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쫓더니 회기역 사이에 버려진 전동차를 앞발로 쳐서 쓰러트렸다.
“으아악!”
그 밑에 숨어있던 헌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총을 쏘았지만 드래곤은 그대로 입을 벌려 그들을 덮쳤다. 으드득 소리와 함께 헌터들은 한 입에 사라졌다.
우적거리며 간만에 맛본 생육의 맛이 제법 마음에 든 드래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문에는 아무런 이변이 없었다.
다시 수면에 들지에 대해 고민했으나, 주문에 이변이 감지되었고 제법 시간도 흘렀으니 자신이 기다리던 때가 당도한 것이라 생각하고는 둥지에서 대기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이에 낀 뼈를 툭 뱉고는 날개를 기지개 켜듯 펼치고 하늘로 치솟았다.
날갯짓 한 번할 때마다 지상엔 거대한 돌풍이 불었다.
둥지로 돌아가는 길목에 한 무리의 드레이크를 발견한 드래곤은 눈을 번뜩였다.
즐거운 듯 괴성을 지른 드래곤은 드레이크를 향해 하강했다. 용의 타깃이 된 드레이크 무리가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석민과 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라니트보다 몸집이 1.5배쯤 더 나가 보이는 용이었다.
“그 빨간 비늘 봤어?”
군데군데 검회색 각질이 잔뜩 붙어있었지만, 베르의 환상에서 봤던 그 드래곤이었다.
“네, 봤어요.”
아영은 한숨을 쉬었다.
드라니트를 잡긴 했었지만, 저 드래곤에 비하면 드라니트는 아성체이거나 일반적으로 수컷에 비해 몸체가 작은 암컷인 듯했다.
석민과 아영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드래곤을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천사와 교전하고 묻은 피 덕분에 드래곤의 후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석민과 아영은 가방을 꺼내서 빈 탄창에 탄약을 채웠다.
난리통에 탄창을 몇 개 잃어버렸다. 가뜩이나 발수가 부족한 20발짜리 탄창인데 탄창을 잃어버리자 석민은 쓰라린 기분을 느꼈다.
그는 탄창에 탄약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천사도 별거 아니네.”
그 말에 아영도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깨어났으니 더욱 조심해야겠어요.”
드래곤과 교전을 각오하고 무기들을 준비한 것인데, 막상 마주치고 나니 전의가 훅훅 떨어졌다.
“얼른 가자, 베르가 기다리겠어. 아마 저 드래곤 때문에 잔뜩 놀라 있을 거야.”
“그러죠.”
“그러고 보니까 지금 몇 시지?”
석민의 물음에 아영은 휴대폰을 들었다. 따로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후 2시 45분이요.”
석민은 사주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아영이 무엇을 보고 대답하는지 몰랐다.
아영은 시간을 대답하고도 약간 흠칫했다. 분명 자신은 폰을 꺼두었다. 그런데 어느새 휴대폰은 다시 켜져 있었다.
잠시 폰을 바라보던 아영은 조심스레 전원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이 일을 굳이 석민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고, 자신이 폰을 껐다고 착각했나,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
실제로 베르는 크게 놀란 상태였다. 그는 시립대 지하 무기고에서 웅크린 채 석민과 아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용이 깼어.”
“무슨 일이 있었나?”
베르가 말했다.
“우리가 전에 지나갔던 다리에서 네 동족들과 싸웠어.”
그 말에 베르는 잠깐 무표정으로 석민을 바라보았다.
“그래, 오르곤을 빼고 전부 죽였어.”
석민은 말라붙은 피딱지들은 툭툭 털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도 몰라도 피딱지들은 매우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들을 전부?”
“어.”
석민은 피곤함에 그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왜? 꼽아?”
천사에 이어 드래곤까지, 석민의 신경줄을 박박 긁어내리는 일들이 이어지자 석민은 날카로워져 있었다. 동족의 죽음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의 행동에 화가 나려했다.
“아니, 필요한 희생이었다.”
그가 말했다.
“다만, 이해해줘라. 그들은 내 동료였다.”
“…아, 그래.”
담담한 대답과 양해를 구하는 말에 석민의 짜증은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오히려 미안해졌다.
베르가 이렇게 답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동료들과 다른 뜻을 걷기로 했을 때 모든 것을 각오하고 나왔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동료들을 죽였을 것이다.”
“…정말로요?”
아영이 물었다.
“그래, 이는 진실이다.”
말만으로 베르를 완전히 믿을 순 없지만, 여태껏 보지 못했던 굳은 얼굴로 말하니 지금으로썬 석민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으니 여러 가지 준비했어.”
석민과 아영은 챙겨온 총기와 탄약들을 가방에서 꺼냈다. 베르는 그것들을 보면서 약간 질린 듯한 경탄을 내뱉었다.
천사들은 보통 인간들이 사용하는 총기류의 무기는 사용할 줄 몰랐지만, 그렇다고 그 위력까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특히 베르는 석민이 챙겨온 RPG-7은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정도만 있으면 되겠지.”
석민은 신뢰로 가득한 눈으로 열압력탄두와 대전차탄두를 바라보았다. 성능이 의심스럽고 보관 상태도 형편없어 불발만 잔뜩 일어나는 북한제 짝퉁이 아니라, 혜원이 구해 준 러시아제 정품이었다.
그는 이걸 4발 챙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