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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오브 서울 186화 (186/226)

[게이트 오브 서울 186화]

“안경 끼고 살도 많이 쪄서 고작 100미터도 못 뛸 것 같이 생긴 뚱보였는데, 우리들만큼 근력이 좋았지. 근육은 하나도 없고 지방 100퍼센트인데도 말이야.”

그 말은 누가 들었다면 불쾌해하고 모욕적인 언사라 치를 떨 법했지만, 석민은 바딤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그냥 넘겼다.

확실히 지금은 많이 빠졌지만 바딤은 그땐 근육질 덩어리였고, 터프했으며, 인상적인 리더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부하들보다 앞장서서 싸웠다.

욕도 잘하고, 직설적이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그런 다혈질이었지만, 전장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믿고 따를 만큼 괜찮은 사람이기도 했다.

석민이 그간 해온 수많은 아이디어들은 그의 입을 통해서 전수받은 것들이 많았다.

그는 단지 자기를 스페츠나츠라고 소개했지만 아마 어디 정보부대 쪽에서도 일했을 것이고, 알고 보면 지금도 그쪽에서 일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탁월한 신체능력 덕분이라고 하죠. 그래서 지금은 무기상을 하시는군요. 적어도 PMC를 하실 줄 알았는데.”

“잠깐 했었어.”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인지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소말리아 놈들 덕분에 해상보안 쪽으로 수효가 있어서 거기로 갔는데, 경쟁업체가 저가 공세를 하는 덕분에 망했지. 무장도 형편없고, 우리 회사도 돈을 아끼겠다고 훈련받은 대원이 아니라 인도인이나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인들을 사용했지. 지들은 군대에서 몇 년간 복무했다고 우기지만 AK장전손잡이도 제대로 당기지 못하는 그런 쓰레기들로 말이야.”

아, 바딤이 왜 이렇게 신세 한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놈들 때문에 월급이 3분의 1로 줄었다고.”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무기상 일, 괜찮지 않아요?”

“돈이야 나쁘지 않게 벌기는 하는데,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니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하지. 아, 정말 그립군.”

오랜만에 추억 회상하면서 회포나 풀 생각이었는데, 바딤의 불평회가 돼버렸다.

슬슬 짜증이 오르는 석민의 얼굴도 슬그머니 구겨졌다.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1시 30분.’

1시간 반 동안 맥주에 보드카, 코냑까지 마셨다.

물론 대부분은 차를 끌고 온 석민 대신 바딤이 마셨다. 석민은 아쉬운 마음에 맛만 본다고 딱 3잔 마신 상태였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매우 위험할 수 있지만, 스탯의 영향으로 전혀 취하지 않는 석민에게 3잔은 간의 기별도 안 갈 정도의 알코올이었다.

이 좋은 남자가 어쩌다가 이렇게 망가졌는가? 석민은 안타까운 심정이 되었다.

아무튼 불쾌한 감정을 애써 숨기며 그는 바딤을 이끌고 식당을 나왔다.

바딤은 조금 취해서 그런지 피곤해 보였지만, 만취된 상태는 아니었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다.”

“저도요.”

추억은 추억으로 두는 게 좋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석민은 실망이 컸다.

“너, ASH-12.7 쓸 때 조심해라.”

바딤의 말에 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제, 무소음 병기이니까 그렇죠?”

“맞아, 러시아에서 찾으려고 할진 모르겠지만, 여기 한국도 그런 것에는 제법 민감하게 반응을 할 테니까.”

하지만 석민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빈토레즈를 써 왔지만 잡히거나 감시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서울에서나 쓸 것 같으니까.’

그들은 서로 담배를 물었다.

석민은 바딤이 문 담배를 눈여겨보았다.

영국산 고급담배인 555였다. 예전에는 러시아산 필터도 없는 싸구려 담배만 태운 사람이었는데, 이젠 고급 담배를 피울 만큼 돈은 잘 버는 듯했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역시 뼛속까지 군인인 건가?’

“차 타고 왔냐?”

바딤은 자신의 방한복 지퍼를 내리며 물었다.

“네, 파란색 포터요.”

낌새를 감지한 석민은 근처 차량 유리를 통해 주변을 살폈다.

“손님이 있네.”

“그래요?”

석민도 바딤처럼 자연스레 방한 잠바의 지퍼를 내리면서 주차장을 흘긋 쳐다보았다.

말라깽이 남자 하나가 차량 근처에 서성이면서 주변을 살피다가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더니 문을 열었다. 심지어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석민은  혀를 낮게 찼다.

저 개자식의 배후가 렌트회사라는 걸 바로 눈치챘던 것이다.

“여기 계세요.”

“아니, 같이 가지.”

두 사람은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면서 빠르게 걸어갔다.

석민은 잠바 기단을 옆으로 젖히고 권총을 빼낸 직후에 그자를 겨누었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린 그자는 석민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품속에 손을 넣어 무기를 꺼내려다 석민이 걸음을 멈추자, 얼른 양손을 들었다.

석민도 여기서 총소리를 내면 안 되는 것을 잘 알았다. 아무리 식당 지하 주차장이긴 해도 CCTV가 많은 곳이었다.

“나와.”

석민이 총을 흔들며 말했다.

“어차피 못 쏘는 거….”

석민은 그자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붙였다.

반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위협으론 충분했다.

“쏘지 마세요.”

“알았으니까 나오라고.”

석민이 슬슬 뒤로 물러서자 문이 열리면서 그자가 양손을 여전히 위로 올린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미안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자가 조금 크게 말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석민과 바딤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 순간 바딤이 품속에서 기관단총을 꺼냈다.

석민도 설마 그의 품에서 그게 나올 줄은 몰랐다.

생긴 건 우지 기관단총이랑 비슷해 보였으나, 석민은 SR-2라고 불리는 기관단총이라고 판단했다.

“…해서….”

시선을 이쪽으로 끌려고 하는 더럽고 하찮은 수작이었다.

“입 닥쳐.”

석민은 주머니에서 소음기를 꺼내 권총에 끼웠다.

“일행이 있을 거야.”

바딤이 말했다. 그는 그새 술이 확 깼는지 흐리멍덩하고 꼬인 발음이 아닌, 평소의 목소리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곤 잔뜩 경계 어린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네 기준으로 8시 방향, 거리 60미터쯤에 두 남자가 서서 이쪽을 보고 있네.”

석민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듣기만 하면서 조준하고 있는 녀석 뒤로 주차되어있는 차량의 유리창을 통해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분명 이쪽을 주시하는 두 명의 모습이 보였다. 각자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권총을 쥔 것이 분명했다.

“무기 버려. 천천히 꺼내.”

그자는 천천히 손을 넣어서 소음기가 달린 PPK권총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석민은 그것을 발로 차서 멀리 날려버렸다.

“열쇠 내놔.”

그 말에 그자는 열쇠를 내밀었다.

“완전 똑같잖아. 렌트카 업체가 맞나 보네.”

저쪽에선 일이 틀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듯 계속 서성거렸다.

“겁을 줘야겠군.”

바딤이 품속에서 기관단총을 꺼내서 접힌 개머리판을 펴고 조정간을 연발로 두었다.

두 사람은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 바딤이 대놓고 기관단총을 꺼내는 바람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씨.’

석민에게 발이 잡힌 자는 대박칠 거라 생각했다가 오늘 하루 제대로 허탕쳤단 생각에 속이 쓰렸다.

석민은 잔뜩 겁먹은 얼굴을 쏘아 본 직후 입을 열었다.

“그냥 꺼져.”

“안 돼.”

바딤이 말했다.

“저 미련한 놈들이 그냥 왔을 것 같아? 화물이 뭔지 대충 알 거야. 차량을 훔치지 못하면, 바로 신고하겠지.”

“그러면 자기들도 손해일 텐데요?”

석민이 말했다. 바딤은 놀란 표정으로 석민을 쏘아보았다.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예전과 다르게 많이 물러졌군.”

스스로 생각해도 좀 물렁해진 부분이 있었기에 석민은 따로 반박하지 않았다.

“저것들 붙잡아야겠어.”

그가 말했다.

이곳에선 총을 함부로 쐈다가는 정말로 위험해지기 때문에 석민과 바딤, 상대까지도 총을 함부로 쏘지 못했다.

“최소한 네가 목적지에 가는 동안 쓸데없는 방해는 못 하게 해야겠지.”

“괜찮겠어요?”

그 말에 바딤은 기분 좋게 트림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꺼억! 흠, 먼저 출발해. 아, 그리고. 그 방탄복 말인데, 15mm짜리 티타늄판으로 만든 레벨 4짜리 방탄복이니까 잘 사용해라.”

그는 포로로 잡힌 자의 멱살을 잡아 앞으로 세운 후 총구를 2명에게 겨누고 걸어 나갔다.

석민은 그 모습을 보고는 차에 들어가 시동을 걸었다. 실망했던 건 어디로 가고, 예전 모습의 바딤이 그의 뒷모습에 비춰 보였다. 석민은 살짝 미소 지었다.

동료를 방패삼아 이끌고 총을 조준하며 다가가는 바딤을 보고 그자들은 기겁하며 도망가려고 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석민은 차를 몰아 빠져나왔다.

석민의 차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바딤은 냉혹한 눈으로 도망치는 그들을 향해 조준하고 쏘았다.

소음기를 달았지만, 실내에서 소리가 울리는 것은 자명했고 그는 인질처럼 잡고 있던 남자의 등에 총구를 대고 지향사격으로 쏘았다.

총알이 관통당한 남자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해 버렸다.

가슴과 배로 피가 튀어나와

그자의 시신을 팔힘으로 꽉 잡아 버티며 바딤은 총을 쏘았고 총알에 맞은 동료 2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인간 소음기가 된 남자의 시신을 버린 그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몸에서 나온 피가 시냇물처럼 흘러 배수로로 흘러들어갔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총질을 하다니.”

허벅지에 총을 맞은 남자가 발악하듯 소리치며 고통어린 신음소리를 내었다.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지.”

바딤은 비어버린 탄창을 주머니에 넣고 새 탄창을 넣었지만, 소음기를 빼고 총을 안쪽에 넣었다.

그리고 대신해서 나온 것은 20센치 정도 길이의 단검이었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이 새끼야!”

그러거나 바딤은 칼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

안전한 지역으로 도착했다고 판단한 석민은 차량을 주차한 직후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보통 렌트카 업체가 그러하듯, 차량 안에 달린 GPS을 보고 추격해왔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 말은 즉, 차량을 그대로 안전가옥으로 끌고 갈 수도 없다는 소리였다.

바딤에 하는 것을 봐서 렌트카 업체직원들은 반드시 죽었을 테고 그러면 이 차를 오래 둘 수 없었다.

차를 버리고 어디 가서 짐을 옮겨야 할 것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뻔뻔하게 아영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어차피 혼자 쓸 무기도 아니었다.

석민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아영은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 받게.”

반대편에 있는 남자의 말에 아영은 침을 삼키고 휴대폰을 들었다.

“네.”

잠시 후 아영은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

“아뇨, 못합니다. 아직 대전에 있습니다. 예, 예.”

그녀는 상대방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아무든 그렇습니다. 네, 저녁 늦게 갈 것 같아요. 일정을 하루 정도 늦게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 직후 통화를 마쳤다.

“그 남자인가?”

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에 앉은, 신임 안보실장으로 있는 이 남자가 매우 차가운 눈으로 아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통령께서 하시는 극비 일이긴 하지만,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게 마음이 걸리는군. 게다가 국정원장도 못 하는 독대를 한다고? 마치 비선실세인 것 같군. 말 나온 김에 내가 알 수 없는 비밀을 말해 줄 수 있겠나?”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아영을 주시했다.

“죄송할 따름입니다만, 이 임무는 극도의 보안을….”

그는 두껍고 가죽이 단단한 손바닥으로 탁자를 쾅하고 쳤다.

“정보사도 아니고 국정원 소속도 아닌 자가 정보관이란 이름으로 국내에서 무언가 공작원의 일을 하는데, 이걸 모른 척하란 말인가?”

“정보사와 국정원에서 하는 일을 안보실장님이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뻔뻔한 대답에 안보실장, 선호석은 잔뜩 분노한 눈으로 아영의 위아래를 부라렸다.

아영은 선호석에게 조금의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이 사람에게 알려진 것도 없고 대통령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전임자, 국무회의 중 심장마비로 안타깝게 자리에서 물러난 전진석을 대신해서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 그는, 처음엔 자리에 만족하는 듯했으나 시간이 지나 아영의 존재와 그 특권을 알고선 분노하며 탐탁지 않아 하던 이었다.

기회를 봐 아영을 닦달하려던 때, 마침 대통령께 보고를 드리고 나오던 아영을 발견하고는 붙잡아 추궁하게 된 것이었다.

“자네가 하는 일은 정말로 국가를 위해 하는 건가? 사리사욕 없이?”

“전임자분도 그런 질문을 제게 했지요.”

아영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국가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비죽이 웃는 선호석의 표정을 보고서 아영은 앞으로 이 일이 더 고달파지리라는 걸 느꼈다.

전임자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방관하는 입장인 듯했지만, 이 남자는 욕심이 많아 보였다.

“잘 알겠네.”

선호석은 자리에 일어났고 사무실의 커튼을 열었다.

눈부시게 하얀빛이 창문을 통해 쏟아졌다. 아영은 일시적으로 시야가 하얗게 새자 인상을 잔뜩 쓰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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