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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오브 서울 185화 (185/226)

[게이트 오브 서울 185화]

“지금 당장 하라는 건 아니니까. 혹시 그 일이 많이 힘들면, 한 번 고려해봐.”

“…그럴게.”

시선을 돌린 채 평소 혜원의 성격과 다르게 조심스레 꺼낸 말에 석민은 딱 잘라 거절할 수 없었다.

대충 대화를 마무리한 둘은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그러나 생각이 복잡해진 석민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예전부터 종종 느끼긴 했지만 혜원은 안정적인 가정을 원하는 것 같았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결혼을 바라는 듯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말할 리 없었다.

하지만, 석민으로서는 매우 큰 부담이었다.

그래,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적어도 이 일을 하는 동안 그는 절대로 안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지만, 당장 내일 길을 걷다가 뒤통수에 총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천년만년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엔 동의한다.

언젠가는 그만둬야 할 것이다.

‘혜원의 말대로 사명이 끝나면 더 이상 못… 아니,  안 하는 것이 낫겠지.’

그는 자신의 옆에서 잠든 그녀를 보았다.

그날 하루 일이 피곤했는지 그녀는 눕기 무섭게 잠들었고, 미약하게 코도 골았다.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이 여자랑?

혜원은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필요 이상으로 석민을 몰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뭘 가지고 확신하고 이렇게 서두르는 거지?

석민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하다가 그는 라이터를 도로 내려놓았다. 옆에 자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리 무의식적으로 담배부터 찾다니.

‘이참에 끊을까?’

그는 자신의 담배를 내려 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

이틀의 시간이 지난 후, 석민은 짐을 챙기고 일어났다.

“빨리 온 것만큼 빨리 나가네?”

혜원의 푸념에 석민은 혀를 낮게 찼다.

“서울 쪽 일을 빨리 끝내려면 빨리 가야지.”

그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이야기한 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서울 쪽 일 마무리 지으면 오래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을 거야.”

그 말에 혜원의 얼굴이 활짝 폈다.

사실 아침 일찍 나가는 것엔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바딤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다.

점심에 그를 만나고, 오후에 안전가옥으로 돌아가 정비를 한 직후에 다시 서울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방탄복이랑 총들, 잘 쓸게.”

혜원은 석민을 위해서 각종 구경의 철갑소이고폭탄을 작업시간 내내 만들어 주었다.

시간을 잡아먹는 작업이어서 석민까지 도와야 했지만, 그녀 덕분에 여분의 탄약들을 챙길 수 있었다. 대신 그의 짐은 상당히 무거워졌다.

“차량 대절이 필요할 텐데.”

실제로 그가 바리바리 싸 들고 준비한 것들은 대충 눈으로만 훑어도 300킬로그램은 넘어 보였다. 그 무게를 차지한 대부분은 탄약들이었다.

석민이 일반인을 넘어선 힘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그것들을 다 짊어지고 경기도를 배회할 순 없었다.

“이미 준비했어.”

예전 같았으면 용석을 이용해서 움직였겠지만 이젠 불가능했기에 석민은 어쩔 수 없이 차량을 렌트해야 했다.

“음? 어디?”

자기가 아는 신뢰 깊은 업체를 소개해주려던 혜원은 이미 석민이 준비했다고 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야.”

석민은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알아낸 렌트 업체를 보여주었다. 혜원 입장에선 처음 보는 업체였다.

‘요즘 차 빌려주고 차를 도로 훔쳐서 물건이나 보상금을 갈취하는 사기꾼들이 많은데 괜찮으려나.’

그녀는 걱정이 앞섰지만 석민이 잘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넘겼다.

잠시 후 약속된 시간이 되고 차량이 당도했고 석민은 차량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령증을 작정했다. 1.5톤짜리 트럭이었다.

“확인했습니다.”

렌트가 업체 사원이 석민이 건넨 수령증을 확인하고 현금을 챙겼다.

혜원은 자신의 가게 문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혹시 양아치나 깡패들이 운영하는 업체인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추위 때문에 방한복을 덕지덕지 껴입은 사원의 겉모습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석민이 인수하는 차의 차량번호에 육이란 단어가 적혀있었다. 날조한 차량번호로 도시 곳곳에 있는 검문소를 피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군 소속 차량은 검문을 하지 않는다는 약점을 노린 것이었다.

차량을 인수한 직후 석민은 짐을 실었다.

“도와드릴까요?”

렌트직원이 다가와서 말했고, 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직원의 시선이 잠시 석민의 손목을 차지하고 있는 시계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석민은 족히 60킬로그램은 되는 짐덩어리들을 번쩍번쩍 들어서 옮겼다. 그 모습에 혜원은 만약 싸우게 된다면 때리지 말고 총을 들거나 크레모어로 협박해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순식간에 짐정리가 끝나고 석민이 혜원에게 다가왔다.

“다음에 봐. 아! 그리고 잘하면 이번이 마지막으로 가는 것일 수도 있어.”

그래서 더더욱 각종 구경의 탄약을 최대한 많이 챙긴 거기도 했다.

석민의 말에 혜원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입맞춤을 한 직후 헤어졌다.

석민이 차를 몰고 떠나자 혜원은 문을 닫으며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어두운 가게 속에서도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그것만으로도 혜원의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귀걸이도 마음에 들고 목걸이도 마음에 들었지만, 석민의 예상대로 역시 반지를 받았으면 참 좋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너무 밀어붙였나? 뭐,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지도 알겠지.’

좋은 것과 별개로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그것들을 살펴보다가 이내 일을 하기 위해 시계를 풀어서 케이스에 넣었다.

***

석민이 모는 차는 용인으로 향했다.

용인엔 동대문처럼 과거에 한국에서 일하던 러시아인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구역이 있었고, 한국에 주둔하는 다국적군 소속 러시아군도 1개 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근래에 한국과 미국은 러시아와 국제적으로 사이가 좋지 못하고 유럽에서 일련의 사태가 벌어진 이후로는 이들은 국군과 정보부대 그리고 동맹국 미군의 심한 감시를 받았다.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차를 주차한 석민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이미 석민을 기다리던 바딤이 있었다.

바딤은 석민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왔다. 석민도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할 이야기가 많을 거야.”

“네, 그렇죠. 얼마 만이죠? 6년 만인가요?”

“이제 7년이 되었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과거를 회상하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었다.

***

“무기를 싣는 것 같다고?”

렌트카 업체를 운영하는 김서환은 방금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부하직원의 말에 목소리를 낮추고선 물었다.

“거기에 무기판매상이 있었나? 아니, 무기판매상에서?”

“네, 사장님. 자세하게 보진 못했지만 차 가득 상자들을 실었습니다. 총도 몇 자루 있는 것 같지만, 대부분 탄약이 분명합니다.”

“대충 무게가 얼마나 될 것 같은데?”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마 1톤 정도 나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서환은 그 부하직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톤 단위로 탄약을 취급하는 민간무기상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1.5톤짜리 트럭에 싣는 거라면 족히 수백 킬로그램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혜원이 예상하던 질 낮은 부류들로, 차량을 빌려주고 그것을 도로 훔치거나 의도적으로 사고가 나게 조작을 해서 차량 보상비로 돈을 뜯어내는 놈들이었다.

이런 일을 통해 차량에 실은 화물을 뺏고는 되팔아서 제법 쏠쏠한 차액을 챙겼다.

게다가 조작된 육군 번호판이 달린 차량을 렌트하는 자들 또한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놈들이 많아서 대놓고 항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 그 차량 위치가 어디지?”

그의 물음에 차량을 관리하는 경리가 자기네 회사 차량들에 달린 GPS가 표시되는 지도프로그램을 켰다.

“용인에 있습니다.”

그 말에 김서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애들 2명 데리고 가서 그 차량 가져와. 외국 군부대가 주둔하는 곳이라 경찰이라든가 군인들이 많으니 조심하고. 최대한 조용히 가져와. 뭐, 문제가 벌어져도 총 쏘는 일은 없겠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총에다가 소음기 달고 가고.”

그 말에 사원들이 회사 내에 있는 무기보관함에서 작은 권총 3자루와 소음기를 챙겼다.

***

맛있는 식사가 끝이 난 후 과일 안주 세트에 초콜릿, 코냑을 곁들인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바딤은 마개를 열고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사태 이후로 우리 부대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지. 사상자가 너무 많았어. 그런데도 내 조국은 내게 훈장 쪼가리도 안 주고 날 제대시켰어. 우리 전우들도 다 흩어졌고 말이야. 그래서 연락이 되는 친구들이 없어.”

그의 말에 쓸쓸함이 크게 묻어나왔다.

“난 내 조국을 사랑하고 내 모국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인정하지 않았어.”

“지금 다 그렇지요. 이건 전쟁이 아니니까.”

석민도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중랑구에서 있었던 일은 너무 불행했죠.”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자, 그는 혀를 낮게 찼다.

“그때, 우리 몇 명으로 들어갔었지? 너 말고 그놈이랑 합쳐서.”

“저와 그… 재민이라는 놈까지 다 합쳐서 30명이요.”

“그 새끼는 병신이었는데.”

“네, 뭐 맞아요. 병신이었죠.”

석민은 꼬냑을 원샷한 후 안주로 파인애플을 집어 먹으며 대답했다. 바딤은 재민을 떠올리는지 초콜릿을 원수처럼 아그작 씹어댔다.

이름도 가물거리는 그 친구는 석민처럼 길잡이 역할을 하기 위해 배치된 예비역 병장으로, 겁이 많고 무능력해서 어떻게든 군대에서 빠지려고 별짓을 다하던 놈이었다.

정신을 차리려는 것인지 바딤은 물을 주문해서 마시고는 울화를 가라앉혔다.

“그 친구, 뭐 했더라? 괴수한테서 숨겠다고 아스팔트 바닥을 야전삽으로 파려다가 손모가지 날렸지?”

“그거 일부러 한 거였죠.”

“그래, 그랬지.”

바딤은 혀를 낮게 차며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혼자 낙오돼서 한 입 거리가 됐고.”

“우리 안 좋은 이야기는 그만하죠.”

이미 죽은 사람 욕 해봤자 좋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석민은 이 주제는 그만 말하고 싶었다. 썩 좋은 추억도 아니었다.

“그래, 그러자.”

하지만 바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탄식을 내뱉었다.

“군대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석민은 이 사람과의 만남을 지금 약간 후회했다.

과거에 명석하고 무자비하면서 자기 부하들을 잘 챙겨주던 유능한 분대장은 어디 가고, 신세한탄만 하는 노병이 앞에 있었다.

“바디크, 어쩔 수 없잖아요.”

석민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모두 살아남은 것은 바디크 덕분이었어요. 다들 당신한테 감사하고 있어요.”

“정확하겐 네 덕분이었지.”

그 말에 석민은 살짝 어깨를 으쓱거렸다.

“누가 훈련시켜 준 덕분이죠.”

“아니, 너는 이상하게도 그때 정말 대단했어.”

“누가 많이 때리고 윽박지른 덕분이죠.”

석민은 러시아와 합류한 뒤 바로 투입되는 대신, 몇 달간 러시아군의 악명 높은 구타와 가혹 행위가 섞인 훈련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걸 가르친 인물이 바딤이었다.

“그땐 당신을 정말 죽이고 싶었는데…. 지금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냐? 정말 도움됐어?”

“네.”

“하지만 난 너한테 한 손으로 소음기를 망가트리는 훈련은 가르친 적은 없는데.”

“그건, 그냥 제가 힘이 센 덕분이죠.”

석민은 두루뭉술하게 말을 넘겼다.

“너는 그때도 참 이상한 놈이었지.”

바딤은 새로 술을 따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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