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82화]
“그러면 지금 이렇게 쓰고 가면 된다 이거지?”
“네, 차라리 그게 나을 거예요.”
석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습관적으로 자신의 오토바이 키를 챙겼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오토바이는 이미 버린 지 오래되었다.
이동수단이 없는 것에 다시 한숨을 쉬자, 아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참에 하나 장만하시는 게 어때요?”
“뭘? 새 오토바이를?”
그녀는 석민이 1종 보통 면허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물론 보통 석민이 구매하는 오토바이의 경우 다른 소유자 이름으로 등록된 이른바 불법 오토바이였기 때문에 구하긴 힘들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거 어쨌든 뭐든 새로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오토바이보단 역시 차가 좋겠지요? 오토바이 불편하지 않아요? 이 추위 속에서 오토바이 타는 것만큼 고역이 없을 텐데요.”
그 말에 석민은 진지하게 고민에 들어갔다.
확실히 오토바이보다 이 날씨에는 차가 좋았다.
그리고 이렇게 혜원에게 갈 때 개인차량이 없으면 너무 불편하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 따라 새로운 운송수단을 구매하는 게 좋은 선택으로 느껴졌다.
“한번 알아봐야겠네.”
“그렇죠?”
“응. 아무튼 내일 돌아오도록 할게. 너도 내일 오는 거지?”
“네.”
“무기들 중에 따로 사 올 거 있어?”
아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뇨, 탄약이 부족한 건 아니어서요.”
“좋아, 알았어. 다녀올게.”
석민이 현관문을 나간 직후 아영은 커피를 타고선 소파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
그녀는 그동안 석민과 있었던 작은 불화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직업서부터 사소한 하나하나까지.
석민은 분명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명예로운 군인인 그녀의 기준으로서는 확실히 모자라고 더러운 사람이었다.
그녀 또한 전투나 임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잔인한 행동을 했고 또 하고 있지만, 석민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기에 약간 어설픈 행동을 할 때가 있는 석민보다 능숙하게 행동할 때가 많았다. 또 사격 자세는 그녀가 더 우수했다.
그렇지만, 거의 대부분 지휘를 하는 것은 그였고 자신은 그저 보조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을 해보니 그것은 팀의 리더로서 팀을 이끌던 아영으로서는 굴욕적이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너무 앞서나간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도리질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생각이 따라오자 아영은 쉽게 생각을 떨치지 못했고, 이내 부당함을 느꼈다.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아영이 헌팅트로피 창을 열지말지에 대해 망설이다가 곧 마음속으로 헌팅트로피 창을 외쳤다.
그런 직후 그녀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바짝 마른 인간의 미라화된 머리가 진주목걸이마냥 줄줄이 꿰여서 걸린 아주 기괴한 모습이었다.
[생존자들]
드래곤의 광역주문의 약한 영향인가, 아니면 변덕 혹은 무관심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권속에서 풀려난 생존자들.
구원을 바랐지만 거짓된 믿음에 속아 헛된 희망을 품으며 내일을 기약했다.
아영은 신경질적으로 창을 닫았다.
알림글을 보기 무섭게 예찬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녀는 울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군인 신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군인이던 그들의 말로는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던 아영은 다시 창을 열었다.
수많은 머리들 중, 아영의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유독 고통스럽게 찡그린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잔뜩 주름진 눈에서 눈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
석민은 택시의 문을 닫으며 흥얼거렸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그는 혜원을 깜짝 놀라게 해주기 위해 선물을 준비한 채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서 그녀에게로 가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전리품으로, 감염자들이 모아두었던 귀금속 중에서도 포장을 뜯지 않은 1캐럿짜리 다이아가 박힌 귀걸이와 목걸이 세트, 그리고 금장 롤렉스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는 비록 과거에 붙은 가격표이지만, 무려 7,000만 원짜리로, 남녀세트로 되어있었다.
지금이라면 얼마에 팔릴지 가늠도 안 되는 물건이었다.
포장을 한 번도 안 뜯은 덕분에 몇 년 동안 방치되었음에도 번쩍거렸다.
석민은 그 물건들이 단번에 마음에 들었고, 동시에 혜원이 떠올랐다.
그는 혜원의 집으로 가는 길에, 시계점에 들려서 배터리를 새것으로 갈아 끼우기로 했다.
누구라도 탐이 날 만큼 좋은 물건이라 시계점 주인의 눈이 탐욕으로 물든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석민은 시계를 바꿔치기할까 봐 자신의 눈앞에서 배터리를 교체해 달라고 해야만 했다. 덕분에 시계는 잘 굴러가고 있었다.
또 어찌 보면 나이 든 사람들이 쓸 법한 디자인이기도 해서 약간 걱정이긴 했지만, 그는 분명 혜원이 마음에 들어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또 새로운 고민거리가 떠올랐다. 반지를 주지 않았다고 그녀가 실망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었다.
혜원의 적극적인 행동은 가끔 석민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 흥얼거리면서 그녀의 가게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근래에 부르지 않게 된 노래였다.
“…피 튀기며, 취한 채로 울부짖어라, 늑대같이 친애하는 나의 조국이여,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추모가?”
석민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목소리의 억양이 표준어가 아닌 동북 방언이나 외국인의 억양이 묻어나왔다.
석민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숙이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따라 걸어갔다.
혜원의 가게에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래선 안 되는 행동이었건만, 석민은 개의치 않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노래를 하는 자는 이윽고 모퉁이로 사라졌고 노랫소리는 이제 한국어가 아닌 러시아말로 들려왔다. 이윽고 석민도 모퉁이로 발을 움직인 순간, 권총이 그의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꼼짝 마.”
소음기가 달린 권총이었고, 여차하면 바로 석민에게 발사할 태세였다.
“천천히 손을 들어.”
석민은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시킨 채 양손을 들었다가 왼손으로 권총을 잡아 쥐었다.
쇠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석민의 행동에 상대가 급히 권총을 뒤로 빼고 다시 석민을 겨누려고 했지만, 그사이 품에서 권총을 꺼낸 석민이 먼저 총을 겨누었다.
석민의 손아귀에 들어간 총은 빠지지 않은 채 그 안에서 으스러져 총구가 막혀버렸다.
그에 놀란 상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대로 발사하면 총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찌그러진 총에 놀랐던 상대의 눈은 석민에 닿고서 더 크게 뜨였다.
“너…!”
바티크가 총을 내려놓자 석민도 천천히 권총을 내려놓았다.
“바티크.”
“석민.”
두 사람은 서로를 보다가 이윽고 서로를 껴안았다.
“오랜만입니다.”
경계심이 사라지고 얼굴엔 반가움의 미소가 가득했다.
“힘이 더 강해졌네? 엄청나.”
그는 강철로 만든 자신의 소음기 달린 권총을 흔들어 보였다가 이내 소음기를 떼 내고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곳에서 당신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들어가지 들어가. 여기 내 거래처이거든.”
바티크가 묵직한 가방을 보이며 말했다.
두 사람이 같이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바딤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석민의 등을 두드렸다.
***
“뭐야, 두 사람. 정말 친한가 보네? 같이 여길 오다니?”
혜원은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리며 들어오자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예전에 서울에서 작전할 때 러시아군인들 길잡이 역할을 했는데, 그때 알게 된 사람이야. 거진 모든 훈련을 이분한테 배웠어.”
약간 흥분한 어조로 대답하는 석민의 말에 바딤은 낄낄거렸다. 웃을 때마다 그의 얼굴 주름이 깊게 잡혔다.
“그때 눈물 많던 코흘리개가 벌써 이렇게 컸어.”
그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풍부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몇 년간 거래를 해온 혜원은 새삼 그도 이런 감정들을 가진 존재라 깨달으며 놀랐다.
“김혜원이 VSS이야기 할 때 네가 생각나서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네. PMC 일한다고? 뭐, 정확하겐 킬러겠지?”
“네, 맞습니다.”
석민이 말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의 직업을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 꺼렸지만, 바딤 앞에서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 이건 네 것이겠네?”
바딤은 자신이 가지고 온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묵직한 풀 바디아머가 나타났다.
“제 것이라고요?”
석민의 물음에 혜원은 낮게 혀를 찼다.
그를 위해서 깜짝 선물을 하려고 한 것인데 바딤이 선수 치니 서프라이즈는 물 건너간 것이다.
“내가 너 주려고 마련한 거였어.”
자신의 망한 이벤트로 살짝 짜증 실린 어조로 대꾸했으나, 석민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온통 바딤에게 가 있었다. 신뢰 가득한 두 사람의 의식에 혜원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한국에는 얼마나 있으셨습니까?”
“아직 1주는 안 되었어.”
“그렇군요. 혹시 다른 사람들은?”
그 말에 바딤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나 혼자야. 군에 나왔거든.”
“그렇군요.”
석민의 관심이 바딤에게로 쏠리자 혜원은 뾰로통했으나, 지금은 끼어들 타이밍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귀를 기울여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석민보다 먼저 혜원의 상태를 알아챈 바딤은 대화가 길어질 것 같자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지금은 아닌 것 같으니까. 혜원, 물건 확인해줘.”
석민이 그의 휴대폰을 받아 전화번호를 등록하는 사이, 혜원은 방탄복을 받아서 확인한 직후 영수증과 함께 현금을 그에게 내밀었다.
“좋아, 다 확인했어.”
“그러면 나중에 보도록 하지.”
“살펴 가세요.”
석민은 등을 보이며 나가는 바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곤 그가 나가고 나서야 혜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활짝 웃어 보였다.
“바딤 형님이 거래처였어?”
“어, 그렇긴 한데….”
“세상 참 좁네. 바딤이랑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
석민은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레 그녀의 가게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일정보다 빨리 온긴 했지만, 잘 지냈어? 선물이라니, 마침 잘됐네. 서울에서 꽤나 크게 곤혹을 치러서 군장이랑 무기 좀 새로 사야 했는데.”
사랑으로 가득한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손길이 양어깨에 느껴지자, 뾰족했던 혜원의 마음이 금세 사라진 건 당연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방탄복이랑 무기야.”
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2개 박스를 가지고 왔다.
“ASH-12.7이라고 들어봤어?”
“ASH-12.7?”
석민이 생소한 무기에 반문했고, 혜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가 쓰던 VSS가 완전히 망가져서 고치는 것보다 새로 마련하는 것이 좋아 보였어. 그래서 이참에 마련했고.”
그녀는 박스를 직접 뜯어서 석민에게 내밀었다.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석민은 미소만 지을 뿐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ASH-12.7]
내구도: 100%
품질: 상상
탄약: 12.7x55mm
칼라시니코프 사에서 생산한 불펍식 전투소총 아직 한 번도 사용을 하지 않아 상태가 매우 좋다.
“좋아 보이네.”
석민은 장전손잡이를 당겨보고 방아쇠를 당겼다.
특이하게 조정간이 2개였다.
하나는 안전과 격발, 다른 하나는 반자동, 자동사격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석민이 총을 살펴보는 사이에 혜원은 12.7mm 아음속탄을 꺼내서 보였다.
“9x39mm보다 강력한 12.7x55mm탄이야. 이거면 괴수들을 처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거야.”
석민은 그 탄환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