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78화]
“조심해서 넘어와.”
그는 간신히 신체를 구멍에서 빼낸 직후 체중을 최대한 분산시키기 위해 몸을 바닥에 밀착해 기어서 움직였다.
그가 자리에서 벗어나자, 아영이 먼저 몸을 움직여서 건물을 뛰어넘었다.
석민과 달리 그녀는 가볍게 착지할 수 있었다. 바닥이 무너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석민으로서는 약간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이거, 살을 빼야 하나.”
“아뇨, 지금 딱 보기 좋은데요, 뭐.”
아영은 그렇게 말하며, 석민의 곁으로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석민보다는 편하게 걸었으나 그래도 솟아오른 곳엔 그녀도 발을 두지 않았다. 그쪽을 잠시 빤히 보던 아영은 조심스레 움직이는 석민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저쪽 근처로도 가지 마세요.”
“그럴게.”
석민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아무래도 이 건물은 엄청 오래된 것 같네요. 높은 건물도 아닌데 무량판 구조라니.”
“무량판?”
그가 물었다.
“아, 그 있잖아요. 무너진 삼풍백화점의 건축 양식으로 유명하죠. 물론 무량판은 아무런 죄가 없고, 부실 공사에 부실 관리로 인해서 무너진 사고지요. 저 바닥이 솟아오른 거 보이죠? 건물이 무너지기 하루 전에 저런 현상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녀는 지루하게 길만 오가는 참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잡담을 하고자 한 듯했지만, 이미 안 좋은 경험을 했던 석민으로서는 불안감만 높이는 말이었다.
“빨리 지나가지.”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감염자들이 얼른 손짓으로 길을 가리켰다.
언제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멀쩡하게 서 있던 전봇대에 두꺼운 나일론 밧줄로 연결해서 만든 사다리였다.
“레이디 퍼스트.”
석민의 말에 아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먼저 내려갔고 곧이어 석민도 따라 내려갔다.
“너가 건축 쪽을 잘 알 줄은 몰랐네.”
“군대에서 조금 배우거든요.”
“조금? 아, 폭파 주특기 같은 거 때문인가?”
“네, 뭐. 비슷합니다.”
이미 건물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바짝 긴장했던 마음도 순식간에 풀렸다.
이윽고 감염자들이 내려오던 것을 지켜보던 석민과 아영은, 전봇대의 금속사다리를 따라 내려오던 예찬이 미끄러졌는지 비틀거리며 떨어지려 하자 당황해하면서도 그를 받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게 안전히 석민의 품에 당도한 예찬 덕분에 석민은 저도 모르게 살아있는 시체를 안게 되었다.
“어이쿠, 고맙습니다.”
무게가 너무나도 가벼워서 입고 있는 방탄복과 헬멧이 더 가벼울 것 같았다.
“조심하라고.”
석민은 무심하게 말하며 예찬을 내려놓았다.
다른 감염자들도 예찬이 괜찮은지 살폈다.
아영의 눈에 다른 감염자가 들어왔다.
그자는 예찬이 사고를 당할 뻔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주 경계가 아닌 서울 시립대 방향의 상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촉이 좋은 아영은 그가 무언가 명령을 기다리고 있단 걸 눈치챘다.
그녀는 석민의 팔을 손가락으로 쿡 찌른 후 손짓으로 그자를 가리켰고, 석민은 잠깐 그를 주시하는 것으로 살폈다.
그자는 마치 무슨 신호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 사이 베르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아래에서 보진 못했지만, 석민이 주의를 준 대로 바짝 긴장을 하며 이동을 하는 통에 조금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아래로 내려올 땐 날개만 활짝 펴고 마치 낙하산처럼 활강을 하면서 내려왔다. 저 거대한 신체가 깃털마냥 가볍게 내려오니 신기했다.
“다음 길은 어디야?”
석민의 물음에 돌아온 답은 뚜껑이 열린 맨홀이었다.
“정말 이러기야? 베르는 어떻게 지나가라고?”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김 병장이라고 불렸던 감염자가 말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은 건물들이 완벽하게 무너져서 산처럼 쌓여있었고, 그냥 지나가기엔 척 봐도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베르의 주문을 통해 보았을 때 드래곤의 주문이 벽처럼 막혀 있었다.
“지하에 최소한 토굴은 만들어 두었습니다. 단지 입구만 좁은 것뿐입니다.”
석민은 맨홀 쪽에도 표시가 보이자, 그걸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걸 지나가기엔 거의….”
그때, 펑 하고 소리가 났다.
석민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보았다. 하늘에 빨간 신호탄이 올랐다. 아영이 총을 고쳐 잡기 무섭게 주변 감염자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총을 조준하기도 전에 뱅스틱들이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무기 버려.”
***
교단 산하의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연설을 녹화 중이던 교주 백은호는 평소보다 신경질적이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연설이었다. 그에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심혈을 기울인 백은호의 연설문을 그의 거친 목소리와 말투에 맞춰서 거듭 수정해 나갔다.
긴장한 백은호가 편하게 연설할 수 있도록, 안정을 취하도록 도와야 했다.
“아냐, 이게 아니야. 다시.”
이젠 손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수정했음에도 백은호는 다시를 외쳤다. 슬슬 열성적인 성도들이라도 마음이 지쳐갔다. 교주의 마음에 들 때까지 휴식도 없이 작업이 계속되어갔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백은호는 휴대폰이 울렸다.
백은호는 휴대폰을 들었고 발신자를 확인하기 무섭게 녹음실에서 나왔다.
“30분만 쉬도록 하지.”
무려 4시간 만에 휴식을 하게 되자, 안에 있던 교인들은 한숨을 쉬며 등받이 의자에 등을 깊게 묻었다.
교인들을 뒤로하고 교주는 기도실로 들어가 휴대폰을 받았다.
“그대들이 무사하니 다행이다.”
교주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랫동안 서로의 근황만 묻던 그의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미소로 가득했다. 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가 부드러웠고 감정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사라졌다.
“…천사가 말인가?”
그렇게 되물을 때까진 그는 그다지 크게 심각한 상황이라 생각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앞이 아닌 다른 이들 앞에서 나타난 건 의외였지만, 천사들이 서울에 가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던 바여서 그다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천사가 사람들을 데리고 문으로 간다? 심지어 2명?
‘설마?’
백은호는 너무 식겁한 나머지 감염자가 된 이후로 느끼지 못했던 오한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지금 그들이….”
백은호는 열던 입을 다시 다물고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치료법을?”
그러더니 그는 저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그것은 함정이야! 그놈들은 우리의 적이고, 그 천사는 타락한 배신자다! 당장 그들을 막아!”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방음이 잘 되어 있는 기도실 밖으로까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사도대 대원들이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백은호는 전화를 끊고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하마터면 준비도 완벽하게 끝나지 않은 지금 당장 성전을 치르자고 할 뻔할 정도로 말이다.
***
“이놈!”
베르가 소리쳤지만, 베르에게조차 뱅스틱이 겨누어졌다. 여차하면 석민과 아영을 바로 찌를 것 같은 기색이었기 베르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뭐하는 거야?”
석민은 인상을 가득 쓰며 물었다.
“저 신호탄은 뭐지?”
“조용히 해. 이 적그리스도야.”
석민의 관자놀이에 뱅스틱을 겨눈 감염자가 말했다.
“적그리스도?”
그 말에 석민은 더욱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이 새끼들이 이용할 건 다 이용하고 이런 식으로 뒤집어씌우겠단 거야?”
“허튼소리 하지 마.”
김 병장이라 불린 감염자가 말했다.
“아니, 김 병장님? 이게 무슨?”
그들과 같이 있던 예찬은 놀라서 석민과 김 병장을 번갈아서 보았다.
“구 중령님의 의심이 맞았어.”
김 병장이 말했다.
“교주님과 연락이 되면 바로 알아본다고 하셨지.”
아영도 인상을 쓰기 시작했고, 석민은 짜증 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발라크라바에 얼굴이 가려졌다 해도 충분히 자신의 감정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김 병장은 단호하게 석민을 노려볼 뿐, 심적으로 아무런 미동이 없자 석민은 속으로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억울한 척해서 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가 문제였던 거지?’
오랜 경험을 통해 그는 일단 이들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성을 되찾아라!”
베르가 소리쳤다.
“저들은 선택받은 자들이다.”
천사가 단호하게 소리를 치니 그들이 살짝 움찔거렸다.
아무리 자신들의 상관인 구옥희에게 사전에 명령을 받았어도, 모든 선후 사정을 아는 게 아니었다. 단순하게 석민과 아영이 의심스러우니 교주를 통해 알아보겠다고 한 것만으로 천사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천사가 천사가 아니라 타천사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천사가 저렇게 나오는데 혹시 자기들이 잘못 아는 게 아닌가?
석민의 행동보다 천사의 질책이 그들의 단호함을 무너트리고 자신의 행동에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마지막 경고다.”
천사는 창대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베르에게 뱅스틱을 겨누고 있던 감염자가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지금 적대행위를 멈춰라. 그렇게만 하면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해주겠다.”
“김 병장님,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찬이 말했다.
“구 중령님께 따로 들은 게 있습니까? 그러면 어째서 제가….”
석민은 시원찮게 별 효과가 없는 연기와 대화에 싫증이 나버렸다.
좁은 길을 따라 기어 다닌 것도 짜증이 나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정체를 들킨 것을 비롯해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거만하고 거슬리는 베르의 목소리까지.
‘길 아는 놈 하나만 남겨두고 다 죽여야지.’
이렇게 생각을 마친 석민과 아영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아영도 그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총알을 쓰기엔 너무 아까웠고 거리도 너무 가까웠다. 석민은 단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생각을 마친 그는 마침 감염자들이 베르의 말에 주목을 하고 있자, 그대로 고개를 돌려서 관자놀이를 향하고 있는 뱅스틱을 피해 잡아 들어 올린 뒤 단검을 뽑아 들었다.
놀라서 지르는 비명이 그대로 들려왔다.
감염자는 뱅스틱을 힘으로 다시 뺏으려 했으나 말라비틀어진 그들이 스탯을 찍은 석민을 힘으로 억누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석민이 잡은 부분의 뱅스틱이 그의 손자국과 똑같이 구겨졌다. 그리고 그대로 잡아 빼냈다.
“뭐야.”
순식간에 손에서 빠져나간 뱅스틱을 보고 감염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거꾸로 잡은 석민의 단검이 그자의 목 좌측을 찔러 들어갔다. 몸엔 군복에 방탄복까지 챙겨입고 있었으니, 한방에 찌르기엔 그곳이 제일 적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자의 목이 갈대처럼 쉽게 꺾였다.
그와 동시에 아영이 움직이고, 베르 또한 다른 감염자들의 뱅스틱을 손으로 낚아챘다.
베르를 겨누고 있던 감염자도 쉽게 뱅스틱을 빼앗겼다.
“아!”
아영이 빼앗으려 했던 뱅스틱을 가진 감염자는 기민하게 뒷걸음쳐서 아영을 겨누고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그자는 위협을 주기 위해 큰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덕분에 석민의 눈에 띄었다.
석민은 그자의 가슴을 노리고 빼앗았던 뱅스틱을 던졌다.
가슴에 뱅스틱이 박히기 무섭게 격발되면서 폭음과 약간의 불꽃이 일어났다. 감염된 병사의 방탄복은 지근거리에서 터진 뱅스틱의 탄환을 보호해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