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75화]
“여기가 저희가 사는 곳입니다.”
예찬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은연한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여기 건물 전체를 우리 은거지로 만들었지만, 전부 다 쓰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는 강의실 건물 문을 열어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창문이 가득한 건물인데다 내부를 가득 밝힌 촛불과 등불 덕분에 구름으로 가득 찬 서울임에도 내부를 전부 볼 수 있었다. 안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2층짜리 침대와 컴퓨터용 책상을 개조해 만든 침대가 놓여 있었다. 얼핏 보면 마치 군대 생활관 같았다.
“유사시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되도록 우리는 같이 지냅니다.”
“아늑하네요.”
아영이 둘러보며 말했다. 빈말이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그러했다.
미라 같은 감염자들이 사는 곳인데도 쾨쾨한 냄새도 나지 않는 데다, 뽀송뽀송한 이부자리와 건물을 쭉 둘러싸고 빛을 밝히는 촛불과 등불 덕분에 정말 말 그대로 아늑한 느낌이었다.
“여러분들 온다고 좀 켜놨습니다.”
멋쩍은 듯이 예찬이 말했다.
베르가 설교인 척 말을 늘어놓는 중이라 감염자들 대부분이 1층 예배당에 몰려있었다. 덕분에 아영은 아무런 제지 없이 이곳저곳 둘러보는 게 가능했다.
물론 거기에 자신들에게 큰 호감을 가진 예찬에게 이곳에 대해 소개해달라고 부탁한 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신이 난 예찬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그녀에게 이곳을 안내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 말고 화장실과 식료품을 저장하는 창고, 그리고 무기들을 모아 둔 무기고가 있습니다. 1층에는 뭐 이미 보셨겠지만, 예배당이 있고요.”
“화장실도 사용이 가능한가요?”
아영의 말엔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그럼요, 당연히 가능하지요. 원래는 수도가 막혀 있었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준비했습니다. 5층에 물탱크가 있는데….”
예찬은 감염자가 되기 전엔 공병 출신이었고, 그전에도 여러 사역(보도블록 쌓기, 정화조 청소, 시멘트 치기 등 자신 있게 소개했다.)을 해보았기 때문에 온갖 공사에 익숙했다.
“먼저 물탱크로 쓸 거대한 통을 마련합니다.”
그는 아영이 지루해할까 봐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해 나갔다.
“그 통을 5층에 연결한 직후 간부 출신인 다른 감염자들과 같이 사용이 불가능해진 상수도관에 구멍을 연결했지요.”
그는 그 용량은 무려 5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온수는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화장실 갈 일은 없어서 그냥 가끔 변기에 앉아있는 사람들만 있고, 진짜 어쩌다가는 몸을 씻는 성도님도 있습니다.”
그는 조금 슬픈 어조로 말했다.
미라들이 변기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거나 씻어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아영은 씁쓸함을 뒤로 숨기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돌렸다.
“무기들도 잘 마련되어 있네요.”
마치 총기보관함마냥 잘 정돈되어 선반에 세워져 있는 뱅스틱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예, 다 저희가 만들었지요.”
조잡해 보이긴 해도 단단하고 위력도 확실하여 유사시에 철퇴로 쓸 수 있다며 예찬은 자랑했다.
“이것 말고 원래 쓰던 무기들도 이곳에 비축된 것을 비롯해서 우리 정찰대가 돌아다니며 전부 긁어모은 덕분에 잔뜩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만, 대부분 이미 사용해버려서 제대로 발사 가능한 건 없습니다.”
마침 잘 되었다.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아영의 자연스러운 물음에 예찬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럼요.”
마치 미취학 아동이 달리기 대회에서 1등한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그는 잔뜩 들떠 있었다.
“우리 교단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같은 사명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니 보여드릴게요. 저희는 사명을 위해 정말 많이 준비했습니다. 이쪽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를 지하실로 안내했다.
전력은 꼭 필요한 곳에서만 사용하는 터라 지하실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매우 어두웠다.
예찬은 비상용 손전등을 꺼내 앞장서서 걸었다.
나름 정리는 해두었으나 교전의 영향인 지 오래된 빈 탄피나 잡동사니들이 복도 좌우로 치워져 있었다. 예찬은 그곳을 지나 지하실에서 가장 큰 방의 문을 열었다.
손전등으로 비춰지는 빛을 통해 엄청난 양의 탄약 상자들이 보였다. 천장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본 아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키웠다.
군에서 사용하는 5.56mm 탄약을 비롯해 7.62mm 링크탄, 12.7mm, 대공포로 사용하는 20mm 등 각종 구경의 탄약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대부분이 개봉도 하지 않은 신품 상태였고,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중하게 잘 관리한 것 같았다.
거기다 지하인데도 불구하고 환기가 잘 되는지 습도가 없고 서늘한 덕분에 탄약이 망가질 일도 없어 보였다.
“굉장하죠?”
아영이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있자 예찬은 낮은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원래 주둔했던 여단이 1달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중령님 말로는 급히 퇴각한다고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문을 회복하게 되는 날, 이곳은 우리 교단의 중간 보급기지가 될 겁니다. 식료품도 최대한 모으긴 했지만 유통기한이 슬슬 걱정되긴 하지요.”
그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아영이 한 곳에 잘 쌓아 둔 K2 소총을 꺼내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K2]
내구도:65%
품질:중하
탄약:5.56×45mm NATO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개발하고 S&T 모티브에서 생산한 돌격소총.
너무 오래 사용하여 공이가 닳아버리고 강선이 심하게 마모된 상태.
“이게 우리의 가장 큰 걱정거리입니다.”
그가 말했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너무 오래 사용해서 강선이 닳아버리고 공이도 닳아버렸습니다. 일부는 부러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격발이 불가능하지요.”
비록 망가졌다곤 해도 수가 꽤 많았다. 어림짐작해서 1천 정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고장이 아니라 부품 교체만 하면 사용이 가능할 거 같은데… 수리쯤은 할 수 있어.’
이것들이 전부 고쳐지고 교단인들의 손에 전부 총이 쥐여질 것이라 생각하자, 그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
아영은 K2의 장전 손잡이를 당겨보았다.
예찬과 알림글이 알려준 대로 공이는 닳아서 사용이 불가능했지만, 그녀는 임기응변으로 총기들이 격발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닳아버린 K2 공이를 가져다가 K1에 장착하면 격발이 될 것 같은데.’
그러면서 그녀는 K1의 수량과 K2의 수량을 확인했다.
K2 공이가 K1보다 길기 때문에 예전에 군대에서 사고 하나가 터진 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 그녀는, 현명하게도 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K1의 수량은 K2보다 적었고, 대략 3백 정쯤 되는 것을 확인한 아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것들을 쏘아보았다.
“엄청납니다.”
아영은 총기를 내려놓았다.
“그렇죠? 6년 동안 준비한 것입니다.”
예찬은 별로 아영의 안색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교단에서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네요.”
“아마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이 정도 양이면 엄청난 거잖아요.”
두 사람은 자연스레 탄약상자에 엉덩이를 두고 쭈그려 앉았다.
“바깥 상황은 어떻습니까? 밖은… 여전히 안 좋나요?”
“어떤지 알고 있습니까?”
“상황이 많이 안 좋고, 수도권을 제외한 다른 지방에서 수도권 사람들을 배척한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금 상황이 딱 그렇지요.”
예찬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짝 마른 몸에 어깨가 축 처지니 너무나도 볼품이 없었다.
“감염자들의 치료는….”
“지금 천사께서 보이신 것 말고는 아직 발견된 것이 없지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부에선 그걸 모르나요?”
“네.”
예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울산은 어떤가요?”
그 말에 아영은 예찬의 고향이 그곳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 경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토는 안전합니다. 다만, 가끔 서울 방벽을 넘은 괴수들이 사람들을 잡아먹는 일은 있습니다. 아주 예전의 일인데, 설악산에서 둥지를 만든 괴수 사건이 한 번 있었지요.”
“하긴, 와이번들은 하늘을 날 수 있으니 방벽을 넘기 쉽겠지요.”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울산에서 괴수 관련 사고가 났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아영의 위로의 말에 예찬의 입가에 아마 미소라고 부를 만한 어색한 표정이 떠올랐다. 예찬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머뭇머뭇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저, 원래 무교였습니다.”
“지금은 아니지요?”
그 말에 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그리고 구원을 믿습니다.”
마치 이단심문관 앞에서 신앙을 증명하는 마녀 용의자같이, 그는 과장된 어조와 제스처를 취했다.
“다만,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바로 천국으로 간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 있는 성도님과 전우들에게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제 가족들이 지금 이렇게 추한 모습을 가진 저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르겠고요.”
아영은 예찬이 고해성사 같은 진심을 토로하며 무언가 부탁하려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진실을 알고 있는 그녀 입장으로선 마음이 묵직해졌다.
“문으로 가기 전에 가족들을 만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역시 치료를 받아도, 피부색이….”
“회색 섞인 커피색의 피부를 가진 아들이라도, 만약에 살아 돌아왔다면 싫어할 부모가 있을까요?”
“그렇겠지요?”
예찬은 쓴웃음을 지으려고 했던 것 같지만, 눈앞에 보이는 감염자는 입만 딱딱거릴 뿐이었다.
안면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터였다.
“그러면, 다른 것도 구경해보실까요? 굉장한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기대되네요.”
그다음에 보여 준 것은 온갖 폐물들과 고가의 시계 등이 보관되는 창고였다.
“혹시 몰라서 나중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해서 챙겨두었습니다.”
예찬은 아영이 흥미를 가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아영에겐 전혀 중요치 않은 것들이었다.
“굉장하네요.”
성의 없는 답변과 함께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잠깐 그녀가 초임 장교 시절부터 눈독들이던 명품 밀스펙 시계를 보며 머뭇거리긴 했으나 역시 금방 지나쳐 버렸다. 원하면 몇 개 가져도 된다고 말하던 예찬은 그녀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자 약간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들고는 앞서가는 아영을 제치며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아마 이것을 보시면 더더욱 놀라실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3중으로 잠긴 자물쇠를 풀었다.
탄약고도 2중으로 잠겨있었는데 여기는 3중이니 더욱 중요해 보일 법도 하지만, 아영은 예찬이 또 보여준다는 것이 아까와 같은 귀금속 같은 것이겠거니 하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되네요.”
그녀는 별로 기대하지 않은 형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매우 엄숙하게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나오는 눈 부신 빛에 아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다가 이윽고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그것들을 보았다.
천장 가득, 발을 디딜 틈도 없이 잔뜩 쌓인 드래곤하트들이었다.
보관 방식은 검거나 불투명한 비닐봉지 혹은 진공포장팩으로 난잡했으나, 그 안에 빛나는 찬란한 불빛은 가려지지 않았다.
“정말 굉장하죠?”
예찬이 물었다.
아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드래곤하트만 바라볼 뿐이었다.
석민이 말한 대로 이들이 드래곤하트를 따로 모아둘 것이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굉장합니다.”
그녀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오자 예찬도 그제야 안심했다.
“어떻게 이걸 다 구한 것입니까?”
“그야, 여기에서 지내면서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밖에서 비싸게 거래된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좀 더 ‘자세하게’ 알려드릴까요?”
자세하게가 매우 노골적이었다. 아영은 생각보다 이 인간이 엉큼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