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74화]
“나중에 이걸 줄 수 있지.”
“그게 뭔데?”
“정부에서 준 비화폰이야. 여기 안에 온갖 것이 담겨 있어. 암호라든가, 기밀이라든가, 정부쪽 사람들이랑 나눈 대화를 전부 저장해 두었어. 이것 하나만 너희가 확보해도 꽤나 이득이겠지?”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받는다면, 그래. 우리한테는 이득이겠지.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는? 뭐야? 무기 공급이랑 정부 동향의 대가가 에너지 쪽이라면 그건 다른 대가를 지불해야겠지?”
“아니, 대가는 없어.”
석민이 말했다.
“대가가 없다고?”
이렇게 싸게 정보를 넘긴다고? 알렉산드라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라, 의심부터 불쑥 솟았다.
“약점 잡히는 것보다 이득이잖아? 너도 괜한 정사비디오 만들려고 몸 굴릴 필요 없고.”
그녀는 물부리를 내려놓았다.
“아니, 돈이라든가 그런 것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알렉산드라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너는 절대로 무사하지 못해. 그래, 너는 생각이 있다고 했지. 그게 뭐지? 이야기해 봐.”
“솔직히 말하자면… 계획은 있지만, 아직은 완벽하게 생각해두지 않았어.”
“뭐라고?”
알렉산드라는 갑자기 이 사내가 꽉 막힌 등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지금….”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야.”
“솔직한 건 참 좋지. 하지만, 지금 그렇게 솔직한 것은 보통 등신이라고 하지.”
알렉산드라로서는 석민을 아주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퇴로도 안 만들어 놓고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닌 것쯤은 알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사명을 완수하고 정부와 등지려고 하는 거지? 솔직히 말해서 너희 나라는 많이 어렵잖아? 내가 너희 나라 국민이라면 네 대통령이 하는 행동에 동의할 것 같은데. 그 행위를 해서 네가 얻는 이득이 뭔데? 왜 그러는 거야?”
석민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아영을 비롯해서 혜원에게조차.
“진심으로 말해.”
알렉산드라가 재촉했다.
석민은 민망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평소의 자신의 모습과 다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난… 그냥 예전이 그리워.”
그 말에 알렉산드라는 인상을 썼다.
“예전이 그립다고?”
“어.”
석민은 잠깐 다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경기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강요받고 있지. 태양을 못 본 지는 몇 년이나 흘렀고. 아니, 그나마 나는 최근에 밖에 잠깐 나갔었지. 대통령 만나러 한 번 경기도를 나갔었거든.”
그는 잠깐 상념에 잠겼다.
“여름의 더위와 햇빛의 따뜻함, 뜨거움을 못 느낀 지 너무나도 오래되었어. 예전에 한국의 습한 불볕더위는 정말 싫었는데, 이젠 그리워. 주말 한가로운 오후의 낮잠도, 한강공원에서 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 보내는 휴식, 봄에 피는 벚꽃을 보고 싶어.”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서울 방벽을 넘어오는 괴수들 때문에 대피하는 것도 지겹고, 악화된 치안에 길 가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지겨워. 더러운 일을 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이러는 거야.”
알렉산드라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위선자라고 할지도 모르지. 나는 총을 들고 이 악화된 사회를 이용해 먹고 사는 놈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
“…고작 그게 전부야?”
잠시 후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응.”
그녀는 그게 진심이라 판단했다.
“내가 널 너무 다르게 보았네.”
그녀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애국자가 아닌 것쯤은 알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돈은 맞긴 하지.”
석민이 말했다.
“아영이 찾아오기 전까지 내 인생은 그저 죽지 못해서 사는 거나 다름이 없었어. 목표가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이제 아니야.”
의외지만 석민의 말은 알렉산드라에게 적잖은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래, 샤샤?”
알렉산드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은 요동쳤으나 그렇다 한들 자신은 러시아에서 파견된 훈련받은 요원이었다. 감동은 감동이고 일은 일이다.
이곳으로 파견 온 뒤 알렉산드라도 여름이 그리웠다.
뜨거운 햇빛,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백사장.
한국으로 파견되기 전엔 고향의 백사장에서 예쁜 수영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살을 태우는 것을 즐긴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시사철 구름만 잔뜩 낀 추운 서울에, 그것도 지하에만 갇힌 듯 살고 있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흰 피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창백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리움과는 별개로 감정적으로 이 일을 결단할 수 없었다.
석민이 솔직한 마음을 보였다 해도 그 또한 감정적이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굴렸다.
답 없이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자, 조바심이 난 석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날 도우면 너희 입장에선 좋게 될 거야. 협조만 잘하면 국가의 기밀정보를 넘길 수 있게….”
“그만.”
알렉산드라가 그의 말을 막았다.
생각을 마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도 매우 차갑고 비겁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지만, 그렇게 매정하진 않아.”
석민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기밀정보를 받는다는 것은 없던 일로 하지.”
“뭐?”
그 말에 석민은 눈을 치떴다.
“너한테 협조만 해도 네 말대로 우리나라에겐 큰 이득이니깐 필요 이상 관계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 국가의 정보를 팔아버리는 건 진짜 큰 반역이니깐, 그냥 도와줄게.”
“포섭을 하려면 약점을 가져야 하는 게 너희 기본 방침 아니던가?”
“그건 맞긴 하지만, 최악을 가정했을 땐 우리와 연관 없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난 아직 못 믿겠어. 네 말을 전부.”
그 말에 석민의 얼굴이 바짝 긴장에 들어갔다.
“무슨 의도가 있는 게 아니야.”
그녀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네가 성공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이니까. 너희는 숫자도 적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아. 포섭에 성공해도 우리와 많이 긴밀해진 상태에서 네가 만약 실패하면 우리만 새 되는 거지. 네 말대로 나도 위험해지고. 너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의 방첩부대는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악명이 꽤 높거든.”
석민은 그녀가 의도적으로 말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지만, 네 말은 날 감동시키기 충분했어.”
알렉산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쪽 선반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열고선 안에 있는 리모컨을 조작했다.
어딘가에 숨겨진 녹화기나 카메라의 전원을 내리는 게 분명했다.
역시 그게 있었다.
석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 한번 해봐. 문밖으로 나가면 경비가 장비를 줄 거야. 내가 너한테 큰 위해를 가했으니 사죄의 의미로 주는 것으로 하지.”
“고맙군.”
석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민?”
알렉산드라가 나가려는 그를 불렀다.
“왜?”
“전에 널 속이려던 건 대단히 미안해.”
그 말은 진심으로 들렸기 때문에 석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석민의 시선이 이제야 알렉산드라의 몸에 닿았다. 그걸 느낀 그녀는 아직도 그가 아쉬워한다는 것에 속이 쓰렸다.
“어차피 안 속았는데, 뭐. 애인 없었으면 바로 속았을 거다.”
“그래? 이번엔 진짜로 아무것도 없는데, 몸 좀 녹였다 갈래?”
그녀가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상의 단추를 풀며 브래지어에 가득 담긴 풍만한 가슴과 골을 보이며 물었다.
“손도 아직 안 녹은 것 같은데. 게다가 고생해서 몸도 더럽잖아? 저쪽에 샤워실 있어 씻고 가. 여기 따뜻하고, 나도 있고. 좋지 않아?”
“아니.”
석민은 잠깐 ‘갈등’했지만, 낄낄거리면서 문밖으로 나가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일이 다 끝나고 나서도 생각나면 다시 권해 봐. 눈요기 잘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쓸데없이 윤리의식 강한 놈.”
알렉산드라도 투덜거리면서 리모컨을 다시 조작했다. 그녀는 오늘 방에 있었던 대화를 전부 삭제했다.
⌜상관만 잘 만났어도 아주 훌륭한 꼭두각시가 되었을 텐데. 저런 사람일수록 그게 아주 큰 약점이라고.⌟
그녀는 러시아어로 혼잣말하면서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쉽다.⌟
그녀는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통해 석민에 대한 불확실성을 지울 수 있었다.
포섭에 필요한 4가지 요소는 MICE라 불리는데, 돈(Money), 이념(Ideology), 타협(Compromise), 자존심(Ego)이다.
돈과 타협, 자존심엔 석민이 해당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만의 이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안 이상 포섭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다.
‘제대로 된 포섭은 아닌 것 같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알렉산드라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정장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는 속옷 차림으로 전신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누가 안다면 너무 자뻑이란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미인계를 위해 가꾼 외모가 아님에도 자신이 봐도 너무 멋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점을 이용해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보았다. 몸을 살짝 꼬며 매혹적인 포즈도 취해보았다.
‘와, 씨. 이걸 안 걸렸단 말이야?’
그녀는 인상을 팍 쓰면서 짜증이 솟구쳤다.
옷에 맞지 않은 임무를 했으니 이 꼴이 난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옛 상관에게 화가 났다.
자칫 잘못하다가 모든 일을 그르칠 뻔했다.
***
“와, 씨. 무기 때깔 좋네.”
호텔 말리나에서 나오기 무섭게 석민은 긴장이 풀려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들린 무기를 어깨에 메고는 뱅스틱을 고쳐 잡았다.
살다 살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성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는 처음 보았다.
이성의 매력에 대한 호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욕구, 성의 매력이었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내면에 있는 욕망을 태우게 만드는 그런 여자라고 석민은 생각했다.
“저것도 훈련받은 건가? 예뻐야지만 미인계를 하는 건 아니지만, 저 정도 되니 미인계를 넘어서 좀 심하네.”
조금만 더 같이 있었어도 사명이고 혜원이고 뭐고 홀려서 순한 어린양처럼 끌려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 그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나가려던 석민의 손을 붙잡았다면, 전과는 다르게 지금은‘하는 수 없이’ 끌려갔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갈까? 좀만 쉬어도 되지 않을까?’
내면의 본성이 그렇게 의견을 말했다.
지금 당장도 아쉬운 생각으로 가득했고 석민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수없이 참은 인내 덕분에 기력을 소모했더니 담배가 당겼다. 그러나 이미 밖으로 나온 뒤인지라 참아야 했다.
“내가 어떻게 저 여자의 마수에서 벗어난 거지?”
그는 키득거리면서 무기를 쥐고 계단을 따라 올랐다.
아까 하던 대화 덕분인지 몰라도 석민은 서울의 폐허 속을 걸으면서도 여름의 푸른 하늘과 백사장을 생각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여자가 혜원이 아닌 알렉산드라였다.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알렉산드라는 아슬아슬하게 중요한 부위만 가려진 빨간 비키니를 입고서 자신의 손을 이끌고 해변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함께 수영을 하고 멋진 리조트 발코니에서 술잔도 기울이며, 느긋하게 함께 침대를 구르는 상상까지 이어졌다.
불가능한 일이고 안 된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마음 한편엔 상상은 개인의 자유란 생각도 슬그머니 머리를 들어 올려, 상상은 끝이 없었다.
그에 이 가혹한 추위와 역경도 봄눈이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싸늘한 바람 사이로 들려오는 드레이크들의 울음에 금세 상상은 멈춰야 했다.
석민은 급히 근처 폐허 속으로 몸을 숨겼다. 몸을 숨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견 크기 정도 되는 드레이크 5마리가 그가 있던 자리에 오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아, 제기랄.’
석민은 자신의 소매에 냄새를 맡아보았다.
알렉산드라에게서 맡았던 진한 향수 냄새가 몸에 살짝 묻어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향기를 태워 괴수들을 끌고 왔기에, 처음부터 이 냄새를 바로 알아챌 순 없다 해도 잔향은 눈치챈 것 같았다.
아무리 드레이크가 개코라 해도 이 상황은 너무했고, 알렉산드라 향수도 너무했다.
‘역시 파리지옥 같은 여자야.’
알렉산드라가 들으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낙인을 찍으며 다시금 현실로 돌아갔다.
‘잘못하다 빠지면 끝장이지. 내 인내심에 상을 주고 싶구만.’
그는 마음을 추스르며 평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괴수들을 주시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이크들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리면서 다가왔다.
‘망했다.’
기껏 받은 탄약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몸을 천천히 빼면서 도망치기 위해 움직였다.
그의 머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뱅스틱을 쓸 수도 있겠지만, 재장전하기 어려운 데 반해 괴수는 5마리였다.
교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