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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오브 서울 173화 (173/226)

[게이트 오브 서울 173화]

“무기를 받으면 바로 떠나겠네.”

“맞아.”

“그러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진 않지만 대가를 크게 받아야겠어.”

“약점 잡아서 날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 여자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나와 관계가 잘 풀리면 너로서도 좋잖아? 그리고 내 용서도 받겠지.”

알렉산드라가 새초롬한 눈으로 도발적인 말을 던졌는데, 그 뒤 따라오는 석민의 대답은 더 도발적이었다.

“용서라고?”

알렉산드라가 약간 기가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정보 흘린 거 너잖아.”

석민은 웃으면서 잔에 담긴 보드카를 단숨에 비웠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경기도에서 온갖 못 볼 꼴 다 보았는데, 여기 오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정보가 새어 나갈 데가 없거든. 우정 파크빌의 김성일, 그 인간은 절대로 내 정보를 알 수 없어야 하는데… 그 양반은 어느 순간 알고 있더라? 그 출처는 너 말고 없지.”

알렉산드라는 저도 모르게 탁자를 두드리던 오른손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너무 방심했나? 아니면 너무 노골적이었나.

“되도 않는 미인계 때문에 틀어진 나의 신뢰를 다시 받고 싶었던 거겠지? 그래서 그놈에게 정보를 흘리고는 내가 대비할 수 있게 그가 날 찾고 있다고 경보를 알려주고. 내가 구린 놈이긴 하지만 철저하다고.”

석민은 얼굴표정 하나도 변하지 않는 그녀를 쏘아보았고 분위기를 감지한  근처에 있던 경비들이 천천히 무기에 손을 올렸다.

알렉산드라 때문에 석민을 비롯해서 아영이나 그리고 혜원이 큰 고생을 했지만, 석민은 그다지 악감정은 없었다.

이자는 자기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나는 지금 아주 관대한 조건을 거는 거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악감정 없이 서로 원하는 걸 주고받자고.”

“…지금 당장 여기서 널 잡아갈 수 있어.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고.”

“그렇겠지.”

석민이 가진 무기라곤 고작 단검 하나고 방탄조끼나 헬멧도 없었지만, 라운지에 무장한 인원은 알렉산드라를 포함해 5명이었다.

“잡아가서? 그 뒤로 어떻게 하게? 내 동료가 가만히 있을까? 난 어디 소속이 아니지만 동료는 아니지. 동료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몰라. 그렇지만 이젠 알게 되겠네.”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난번 만남에서 아영이 친절하게 굴지 않았을 테니까.

“같은 동양인이나 포섭한 현지인도 아니고 직파 블랙요원이라니. 아주 훌륭한 먹잇감이 여기에 있으면 국정원이 퍽이나 좋아하겠어. 몇 십 년 전에 이 땅은 민주화가 되었지만, 대공분실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알아? 보안분실이라는 이름으로. 국정원 쪽은 모르겠지만 뭐, 우리 국민한테만 그런 짓 안 하면 되지.”

그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적어도 보안분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알렉산드라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알렉산드라는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크게 동요했다.

“솔직히 말해서 좀 강행군 해야겠지만 진짜 아쉬우면 여길 나가서 경기도로 나가면 그만이야. 서로 싸게싸게 하자고. 난 급하거든.”

“이런.”

알렉산드라는 짜증이 난 나머지 자신의 앞에 있던 보드카 잔을 손으로 쳐 버렸다. 유리잔에 바닥에 떨어지면서 깨져버렸다.

“그게 싫어?”

“아니.”

알렉산드라는 손짓으로 접근하려던 경비들을 물리고 바텐더가 새 잔을 가져오게 했다.

‘솔직해서 좋네.’

석민은 그 생각을 하며 새 잔에 보드카를 따라주었다.

“내가 꼭 꼭두각시가 될 필요는 없는 거 아냐?”

“너 정말 싫어.”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그래?”

석민은 웃으며 반문했다.

“그래, 질문 좀 하자. 진심으로 말해.”

“얼마든지.”

“너 정말 이쪽 업계에서 일한 적이 없어? 왜 이렇게 잘 알아?”

“같이 일하던 러시아 군인들이 그런 걸 잘 알더라고.”

‘그건 뭐하는 놈들이지?’

알렉산드라는 그 군인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킬러 일 하면서 다른 나라 의뢰받았었지? 정부쪽이나?”

“글쎄? 상상에 맡기지.”

‘맞나보네.’

알렉산드라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고 그녀는 허리를 숙이면서 귓속말하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면 잘 알겠네. 네 말이 힘들단 것도 알고 있겠지. 다른 정보부서는 어떤지 몰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포섭된 사람을 거래 관계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러면 지금 니 방으로 가지.⌟

러시아어로 그녀의 말을 자르자 알렉산드라가 얼굴을 치떴다.

⌜원하는 게 섹스비디오잖아? 그렇지? 그것만큼 확실한 약점이 없으니. 약점이 안 잡힌 자는 믿을 수 없다는 게 너희들이지.⌟

너무나도 진지하게 말해서 그가 농담하는 건지, 도발하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알렉산드라는 혼란에 빠졌다.

석민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많지 않지만 1, 2시간 정도는 있을 수 있어. 카메라 돌리고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싫으면 말고.⌟

알렉산드라는 인상을 가득 쓰며 여태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본성과 분노를 가득 담아서 석민을 노려보았다.

그래, 약점이 있어야 포섭된 자가 어설픈 배신을 하지 않는다.

그게 정답이긴 했다.

하지만 약점이라는 것은 그런 비디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가족, 친척, 스위스나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비밀계좌나 본인 명의로 된 계좌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입금이 된 고액의 돈.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저렇게 한다는 거지?’

알렉산드라는 그게 궁금해져 갔다.

그걸 물어보려면 여기서 물어볼 수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알렉산드라는 석민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보드카 잔을 들어서 한숨에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었다.

⌜내 방으로 가지. 이야기 좀 듣고 싶어.⌟

⌜그러지.⌟

석민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그럼 이제 벗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잠근 후에 그가 말했다.

“이왕 하는 거 즐기게.”

“아, 진짜. 놀리지 마.”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알렉산드라는 그의 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원한다면 진짜 벗어주지. 그러고 진지한 대화를 나눌까?”

그녀는 도발적으로 정장 재킷 단추를 풀었다.

“그러던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를 쏘아보며 알렉산드라는 재킷을 벗어 소파에 대충 걸고는 앉았다. 석민은 맞은편 의자에 편히 앉았다.

방 안은 라디에이터를 틀어놓은 덕분에 훈훈했다.

몸에 딱 맞춘 듯 붙는 와이셔츠 사이로 알렉산드라의 굴곡이 드러났다.

평소라면 팽팽하게 당겨진 단추와 셔츠 틈으로 보이는 살에 곤혹을 치렀을지 모르나 오늘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진한 향수의 향기가 석민의 코끝까지 닿아왔다. 반대로 며칠 동안 한 번도 씻지 못한 석민의 몸에선 역한 냄새가 났으나, 알렉산드라는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네가 한 말은 믿겠는데, 그것으로 네가 뭘 얻을 수 있지?”

“안전.”

석민이 말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그가 생각해오던 것이었다.

“내가 지금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실상은 아닌 것도 알고 있지.”

알렉산드라가 말을 잘랐다.

“그래?”

석민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안전이라….”

알렉산드라가 낮게 중얼거리며 물부리에 궐련을 끼우자 석민이 듀퐁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좋은 라이터네.”

“전리품이지.”

그녀는 그 라이터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일종의 경고였다.

살짝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면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정부를 배신하는 행위와도 다름없는 일을 하고 있어서 한국 정부의 보복이 두려우니까 우리를 이용해서 안전을 도모하시겠다?”

이용이라는 말이 거슬리긴 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그거지.”

알렉산드라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코로 담배 연기를 뿜었다.

“후우, 우리가 얻는 건 뭐지?”

“너희 에너지 경제의 걸림돌 제거.”

그게 그렇게까지 가나? 알렉산드라는 의문을 가졌다.

“드래곤하트를 기반으로 하는 발전시설은 이미 가동 직전까지 갔지. 한국에서만 들어선 것이라 아직은 괜찮은데.”

“우리가 하는 일이 끝나면 우리나라는, 아니 이 세상은 드래곤하트는, 다시는 수급이 불가능해지니까.

알렉산드라는 연기를 길게 마셨다.

“아무런 정보가공 없이 정확한 소스를 말해봐.”

“아마 바로 믿기는 어려울 거야.”

석민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저 문을 닫는 거야.”

“문?”

알렉산드라는 처음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석민을 설명을 20분 동안 해나갔다.

문, 교단, 천사의 존재, 그리고 자신이 받은 사명까지.

그는 사명의 끝이 무엇인지 가늠만 하고 확실하겐 몰랐지만, 알렉산드라에게는 문을 닫는 것이 사명이라 말했다.

석민의 이야기를 알렉산드라는 코웃음 치며 물부리에 새로운 담배를 끼웠다.

“참으로 재미있는 소설이네.”

“역시 안 믿을 줄 알았어.”

석민이 다시 불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천사 쪽은 흥미가 가네. 그리고 사이비교단도 말이지.”

“그래?”

석민의 말을 종합해 생각해보자, 딱히 알렉산드라 입장에서 석민과 거래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 정부의 약점은 이미 러시아 측에서도 어느 정돈 가지고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석민과 아영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약점이었다.

확실한 정보자료가 없을 뿐이지.

문을 닫고 에너지의 원천인 괴수가 사라진다면 그것으로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괜히 한국 정부랑 대놓고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우리에게 이득이 텐데 뭐하러 보호해야 한단 말인가?

“정보의 가치치고는 우리는 별로 큰 모험을 할 필요가 없는데.”

이번만큼은 알렉산드라는 비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이건 아니지.’

“한국 정부는 많이 약해지고 경제는 망가졌지만 아직 우리로선 함부로 무시 못 할 나라라서 말이지.”

석민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만약 네가 한 대로 한다고 치자, 우리가 너희를 보호? 이 나라를 떠나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데? 내가 보기엔 너는 이 나라를 떠나서 살 수 있을 인물은 아닌데? 아, 물론 러시아 말 잘하니까 우리나라에서 사는 데 문제는 없겠지. 네가 한국 정부의 공격을 안 받고 이 땅에서 살 방법은 한국 정부의 약점을 쥔 채 사는 건데, 그들이 그냥 널 가만히 둘까?”

그 말에 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할 걱정이 아니지. 그리고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석민이 말했다.

“너무 축약적으로 말했나 보네. 내가 말한 안전은 거창하게 너희가 나서서 내 신변의 안전을 확보해달라는 게 아니야. 다만, 내가 하는 사명을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거지. 그래, 내가 하는 일이 너희로선 가만히 앉아서 코를 풀 수 있는 행위니깐 딱히 나설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나는 아니지. 우리가 문에 가까워질수록 한국 정부에게 들킬 가능성이 매우 높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방해를 받을 거야. 우리가 임무를 성공한 뒤의 보복에 대해선 너희 손 안 빌릴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 다 생각이 있으니깐.”

그렇게 말은 했지만, 석민이 두려워하는 미래가 그것이었다.

자신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범법자였다. 자신들이 받은 임무와 배신을 대놓고 나라에서 떠벌리지 못한다 해도, 자신과 연계된 사람들 모두 법의 심판으로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자신이 하려는 일이 정부 입장에선 큰 배신이었다.

“너희가 협조만 잘해주면 돼.”

“정확히 해야 할 협조는 뭐지?”

“한국 정부 동향을 비롯해서 내가 무기를 마련하기 힘들다면 오늘같이 무기를 공급해주면 돼. 그 정도로는 너희 나라가 배후라고 의심은… 받겠지만, 대놓고 뭐라 하진 못하겠지.”

“그렇다고 너를 포섭하는 게 아니잖아.”

알렉산드라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원래 원하던 일은 너를 포섭해서 너희 정부의 기밀작전이나 자료를 받는 것이었다고.”

“너희가 착한 아이처럼 도와준다면….”

석민은 정부에게서 받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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