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72화]
“아직 물러날 수 없어 1주일을 지내기로 했는데. 게다가 이제 그 괴수들 처리했으니 저들이 통신기기를 복구하려고 할 테고, 그러면 우리에게 시간이 남지 않아.”
석민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며 말했다.
감염자인 예찬이 근처에 있는데다가 주변이 적막했기에 자칫하다가는 말이 샐 수 있었다.
그나마 이들의 주목을 받지 않고 은밀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베르 덕분이었고, 베르는 이 열성적인 신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하지만, 아영은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석민에게 손짓으로 제지했다.
“잠깐만요.”
아영이 그의 말을 제지하고선 무전기를 꺼내 라디오 기능을 켜 주파수를 클래식 채널로 바꾼 뒤 음량을 올렸다.
“말씀하세요.”
“하여튼 간에 이대로 서울에서 나갈 수 없어. 우리가 뿌린 괴수의 피와 시체 때문에 해당 지역의 휴대폰 가게나 전파상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니 아직은 시간이 있어. 군장이나 군복 같은 건 여기서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의외인 건 그 신형 화강암 패턴의 디지털 군복이 여기서 아주 훌륭한 위장 능력을 보이더라고.”
이들은 군복과 야상, 깔깔이 말고도 군용방한복까지 충실하게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저들의 반응을 보면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들이 잔뜩 쌓인 창고를 보여주며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말해주었다.
“그것도 맞춤으로 말이지.”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무기가 없는데요.”
아영의 물음에 석민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호텔 말리나에 가 볼 거야.”
“…그야 거기에 무기가 있기는 하겠지만, 샤샤가 무기를 줄까요?”
“응. 줄 수밖에 없어. 그 여자, 나한테 약점 잡힌 게 있거든.”
그는 아영에게 굳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약점이요?”
“응, 그런 게 있어.”
석민은 알렉산드라가 자신에게서 정보를 얻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순간 제법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무기를 얻을 순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런 곳에 호텔을 만들어 두었는데 무기가 없을 리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베르와 같이 있어. 나 혼자 다녀오지.”
“혼자 다녀오시겠다고요?”
아영이 놀라 되물었다.
“반나절, 아니 12시간만 주면 가능할 거야. 혼자 다녀오겠어. 뱅스틱도 1개면 충분해.”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나요? 같이 가시죠. 총도 없으신데.”
“네 탄약을 낭비할 필욘 없지. 그리고 최대한 조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일 생각이니까 걱정하지는 마. 상봉역, 망우역 쪽으로만 도착하면 전동자전거가 있으니까, 그걸 이용해서 단번에 다녀오지.”
그는 이미 결심을 굳혔기 때문에 아영으로서는 별다른 설득을 할 수 없었다.
“너는 남아서 조사 좀 해줘.”
석민은 더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조사요?”
“이 사람들이 비축한 군수품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봐. 그리고 이 사람들이 무얼 숨기고 있는지도.”
“군수품은 그렇다 치고 숨기고 있다뇨?”
“무언가 좀 이상해.”
그가 말했다.
“전에 드론으로 영상을 볼 때 그놈들 아주 능숙하게 드래곤하트를 채취하던데, 여기선 보이지 않아. 그리고 군수품도 그래. 여단 전진기지라고만 알려졌는데 여단산하 부대치고는 군수품이 너무 많아.”
자세하게 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여기에 쌓인 것이 여단 전체가 쓸 만큼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가지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냥 느낌이긴 하지만, 이 사람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충분히 친해진 것 같으니까 그 사람들이랑 이것저것 이야기 나누면서 한번 떠보거나 여기를 탐방해 봐. 분명 무언가 있어.”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아영은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지만, 일단 석민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좋아, 그러면 이 이상 다친 곳은 없지?”
“네.”
석민은 옷을 다시 차려입었다.
“수고했어. 내일 아침에 바로 다녀오도록 할게.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부터 하지.”
***
-귀하의 보고서는 잘 보았어.
신임 극동지구 정보담당자로 취임한 남자가 말했다.
-먼 곳에서, 그리고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고생이 많군. 내 전임자의 말도 안 되는 임무를 한다고도 고생했고.
알렉산드라에게 말도 안 되게 미인계를 보채서 일을 그르치게 만든 전임자는 다른 지구로 발령받았다.
-감사합니다.
알렉산드라가 대답했다.
-이번 파견이 처음이지?
-그렇습니다. 이번이 첫 해외파견입니다.
알렉산드라는 혹여 라도 자신이 초짜로 보일까 걱정됐다. 하지만, 상관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가?’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게 그대로 들려왔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해는 해줘. 내 전임자는 미인계로 재미 좀 보았었거든.
알렉산드라는 쓸데없이 전임상관의 업적을 듣게 되었다.
영국 상원의원을 미인계로 구슬렸다든가, 독일의 누구를….
알렉산드라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래, 그래. 그래서 이제 새로운 지령은 언제 나오는 거야?’
아무리 상부에서 서부지구보다 극동지구를 중시하지 않는다지만, 신임으로 온 남자도 그다지 유능해 보이지 않았다.
‘유능해 보였으면 날 여기에 두지 않았겠지.’
요즘 세상에 직파 간첩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이러지 않는다.
요즘은 현지인을 포섭하거나 최소한 직파라도 현지인과 비슷한 동양인을 보내지, 슬라브계 백인인 자신을 보내는 건 생각 없이 작전을 진행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알렉산드라는 한국의 방첩부대들에게 잡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몸을 살짝 떨었다.
-그래서, 앞으로 하려는 일은 가능성이 큰가?
-아직은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관계의 재구축 단계라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나?
-목표가 지난 일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다행스럽게도 알렉산드라의 보고는 이 새로운 상관에게 먹히는 듯했다.
-그가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데?
-적어도 한국 현 정부의 약점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은 절대로 그들 제도 하에서 일어나기 힘든 행위입니다. 이 사실이 제대로 된 증거와 함께 양지에 알려지면 크나큰 스캔들이 될 것이고 정권이 무너질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비록 다른 나라 밑에서 일한다 해도, 자국민을 몰래 사살해서 묻어버리는 행위였다.
그것 말고도 천사에 관해 보고를 해야 했지만 알렉산드라는 아직은 이르다 생각했다. 교차 검증이 된 것도 아니고 단순하게 단수의 자백만 들은 것이라서 불안한 점이 많은 정보였다.
상부는 확실한 정보만을 원했다.
-그렇단 말이지.
화면 속의 상관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면서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곧 입을 열었다.
-좋아, 일은 그대로 진행해. 하지만 1달 이내에 포섭이 불가능하다면 제거해야 할 거야. 그자들은 우리나라의 이익을 방해하고 있어. 그냥 둘 수 없다.
한 달 이내에 포섭이 불가능하면 제거하라.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외 다른 것은? 필요한 지원이 있나?
-…서울에서 목격되었다는 천사와 경기도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사이비 교단에 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타깃이 그들과 매우 큰 적대관계를 형성 중이고, 사이비들이 그들을 찾고 있습니다.
-…알았다 그 외 다른 건?
-없습니다.
-그럼 새로운 지령을 내리지.
-무엇입니까?
-얼마 전에 12.7mm 아음속 탄환을 쓰는 우리 무기가 서울에 반입되었다는 첩보를 입수했는데,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알아봐. 오래전에 분실된 병기가 분명해. 누구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면 무기가 어디로 유통 중인지만이라도 알아내. 가능하다면 그 무기들을 회수하고 싶군. 돈을 쓰든 훔치든 알아서 하게.
소련이 해체되고 특수부대가 사용하는 아음속 저소음병기가 마피아나 민간에 유통이 되어서 잔뜩 고생했던 그들 입장에선 이는 매우 신경 쓰이는 정보였다.
그러나 이런 건 알렉산드라의 일이 아니었다.
-경기도 지역 담당이 따로 있을 텐데요?
-경기도 지역의 우리 정보망이 최근에 한국 방첩기관에 추격을 받는 중이라 잠적하거나 철수한 상태다. 따로 인력을 경기도에 배치하라는 것은 아니고, 그곳으로 무기 쓰는 자들이 많이 몰리고 있으니 그들 무기만 알아보면 돼. 무리한 명령은 아니지?
-그렇습니다.
-좋아, 다음 연락은 따로 전문을 보내지 통신 종료.
암호화된 통신의 전원을 내린 직후 알렉산드라는 통신실을 나왔다.
그녀가 나오기 무섭게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가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최석민이라는 사람이 사장님을 찾는데요.”
“그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라고 한국 속담을 중얼거리며 그녀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작은 손거울을 꺼내서 화장과 머리 상태까지 살핀 뒤 석민이 기다리고 있는 호텔 라운지로 걸음을 옮겼다.
상부에 보고한다고 정장 차림에 평소와 다르게 화장이 연했다.
석민이 진한 화장을 싫어했단 걸 떠올리며 그녀는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근래 헌터들이 강북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호텔 말리나는 중간 휴게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거에 넓은 호텔은 심하게 붐비지 않았다.
석민은 호텔 바에 혼자 앉아서 보드카 한 병을 시키곤 홀짝이고 있었다.
강추위에 시달린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있었고, 손도 살짝 동상에 걸렸는지 상태가 좋지 못했다.
알렉산드라는 순간적으로 빠르게 눈알을 굴려서 그의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평소에 사용하던 방한복과 군장은 어디 가고 깨끗하나 오래된 국군 군복에 낡은 군장을 차고 있었다.
“총기는 하나도 없고 조잡한 뱅스틱을 가지고 있더군요.”
경비가 귀띔해 주었다.
“뱅스틱?”
알렉산드라는 그게 무엇인지 몰라 잠깐 동안 경비의 설명을 들어야 했고, 모든 것을 파악한 직후 석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조잡한 병기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아, 왔군.”
석민은 그녀가 앉을 수 있게 옆의 의자를 밀어주었다. 평소보다 매우 친절한 행동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피차일반 그게 서로에게 이득일 테니깐.”
“오랜만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런 거라니, 조금 섭섭하네.”
알렉산드라는 아쉽다는 투로 말했지만 석민이 꽤나 곤혹에 빠진 걸 알 수 있었다.
“강북으로 가서 괴수들과 싸우다가 무기를 잃었거든.”
그가 언성을 낮추며 말했다.
“그래서 무기 좀 구할 수 있을까? 또 괜찮다면 방한복도 구했으면 좋겠네. 이건 따뜻하지가 않아.”
“무기를 잃었다고?”
석민씩이나 되는 사람이 무기를 잃었다는 사실에 놀란 알렉산드라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여기가 무기를 파는 곳이 아니라는 건 알아. 그러니 값을 높게 쳐주지.”
“아, 그렇단 말이지?”
알렉산드라는 석민이 권하는 보드카 잔을 자신의 앞쪽으로 밀어 넣고 거미같이 기다란 손가락을 탁자에 톡톡 두드렸다.
지금으로서는 석민이 불리한 입장이니 자신이 쉽게 요리할 수 있겠지만,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갑질하다 반감을 사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긴 했다.
“무기 정도는 구해줄 수 있어. 군장도 마찬가지. 그리고 방한복도.”
이곳도 그다지 여유가 있다곤 못해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를 위해 제공해 줄 용의가 충분했다.
“다만 알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
“…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티라노같이 생긴 새로운 괴수의 둥지를 공격했고 이렇게 된 거야.”
석민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보드카를 한 입 더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종이었는데 꽤나 강력하더군. 일반적인 드레이크가 아니기 때문에 임의로 랩터라는 이름을 붙였어. 크기는 티라노만 하지만, 생긴 건 랩터랑 똑 닮았거든. 아무튼 새끼를 가진 놈들이라 필사적으로 덤벼서 그런지 강했어. 생명력도 엄청나서 머리와 목에 SVDK를 몇 발 갈겼는데도 죽지 않더군. 그리고, 이 꼴이 난 거지.”
“그래?”
알렉산드라는 석민이 오히려 막힘없이 말해 놀라웠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에 SVDK가 혹시 있으면 그걸 줄 수 있나?”
“미안하지만 그건 가지고 있지 않아. 나는 오히려 네가 그걸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운데.”
그건 엄청나게 마이너 한 무기였고, 러시아에서도 특수부대에서나 사용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그게 어떻게 여기에 흘러들어왔는지, 알렉산드라로선 캐묻고 싶었다.
“돈을 안 받는 건 잘 알아.”
석민이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무기를 잃었을 때 서울 밖으로 나가서 새 걸 사가지고 왔겠지만, 현재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서 나가는 것도 여의치가 않아.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시간이 생명이거든.”
“시간이 생명이라….”
알렉산드라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간격이 더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