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이트 오브 서울 171화 (171/226)

[게이트 오브 서울 171화]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랜만에 안내글이 두 사람에게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으면 조금 기쁠 만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수 없었다.

“얼른 떠나자.”

석민은 몸을 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빠르게 재촉했다. 그의 군장과 옷은 찢어져 완전 넝마가 되어있었다.

총성을 비롯해서 온갖 소음과 불꽃이 일어났으니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피 냄새 또한 진하게 나고 있었다.

석민은 단검을 꺼내서 방한복의 피 묻은 부분을 잘라냈다. 솜과 거위털이 다시 휘날렸다.

안에 입어두었던 내복을 빼고는 대부분의 옷을 자르게 되었다.

아영과 예찬이 석민이 크게 다친 줄 알고 부축해주려 했으나 석민은 손사래를 쳤다.

아직은 움직일 만하기도 하고, 살아있는 시체인 예찬에게서 부축을 받고 싶지 않기도 했다.

차별이라기보다 본능적으로 껄끄러웠다.

“가자, 가자.”

“총은 어떻게 된 거죠?”

아영이 물었다.

석민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혜원에게서 산 좋은 총이었는데,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그는 시립대 방향으로 걸으면서 구겨지고 부러진 총기를 들어보았다.

[SVDK]

내구도: 0%

품질: 하하

탄약: 9.3x64mm

러시아에서 생산한 대구경 저격총,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저격총으로 타격하기 힘든 목표물을 처리하기 위해 Взломщик연구소에서 개발하였다.

분노한 괴수에 의해 뒤틀리고 구부러져 수리가 불가능한 상태.

이 총이 이렇게 망가졌으니 서울에서 가지고 다닐 무기가 단 하나도 없게 되었다.

‘세상에, 완전 망했어.’

총탄을 최대한 많이 챙기기 위해 총기를 한 개만 챙긴 것이 무리수였다.

잔뜩 챙긴 9.3x64mm 탄환만 완전 쓸모없게 되었다.

“총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죠?”

아영이 다시 물었다.

“뭐 어떻게 된 거겠어. 한방에 안 죽으니까 이 꼴 난 거지.”

석민이 말했다.

그는 자기가 잃어버렸던 뱅스틱을 주워서 50구경 탄환을 끼웠고 아영은 그것을 보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50구경 탄환 6발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고마워.”

무기가 없는 이상 이것이라도 써야 했다.

“베르, 너는 괜찮아?”

예찬이 있는데도 석민이 격 없이 부르자, 그것을 들은 예찬은 저도 모르게 적잖은 감동을 느꼈다.

“괜찮다.”

인사를 건넨 베르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주문을 외우는 동안 시선을 끌어줘서 고맙군.”

석민은 그에 별것 아니라는 듯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처음엔 껄끄러워하던 것과 달리 베르는 괴수를 잡는 데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했다. 함께 적을 해치우는 경험은 전우애 비슷한 애정이 싹트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관계에 신뢰의 싹이 텄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정으로 물들어갔다.

도움

혜원은 오랜만에 익숙한 얼굴이 CCTV화면에 찍히자 미소를 지으며 하던 일을 멈추고 손님맞이를 준비했다.

손님맞이라고 해봤자 쇳가루나 화약 가루가 묻은 커버올을 털고 장갑을 벗은 것뿐이었다.

회원카드에 의해 육중한 강철문이 열리고, 이윽고 그녀의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외국인이었다.

그는 여타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나, 두 눈은 파랗고 피부는 희었다. 특색만 보면 외국인이나, 두 눈두덩은 깊지 않았으며, 눈썹도 옅었다.

서글서글하고 인상이 좋은 남자였지만, 몸은 근육질에 볼엔 칼자국까지 있었다.

“바딤 페트로비치 김.”

혜원이 말했다.

그렇게 이름이 불린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김혜원, 오랜만이야.”

표준어를 쓰고 있지만, 억양이 이북 사투리에 가까운 한국어가 나왔다.

“구하기 힘들다더니?”

그녀는 공구를 선반 안에 넣었다.

“전화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바로 온 걸 봐서 금방 구했나 보네?”

혜원의 말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잔뜩 굳은 얼굴로 양 겨드랑이에 끼고 온 2개의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혜원은 창구를 통해서 그것을 건네받고는 손바닥을 비비며 헤헤거렸다.

“ASh-12.7?”

“ASh-12.7.”

무심한 목소리가 바로 대답했다.

혜원은 그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박스를 열었다. 그녀는 마치 선물 받은 아이처럼 기쁜 얼굴로 총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무게가 6킬로는 족히 넘은 총기였던 지라 혜원은 살짝 인상을 썼다.

무게가 이 정도로 나갈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구하기 힘들다고 했는데.’

혜원은 장전손잡이를 당겨서 조준을 해보았다.

총기에 달린 캐링핸들 때문에 조준경을 달면 꽤나 조준을 높게 잡아야 할 듯싶었다.

‘뭐, 그건 석민이가 알아서 하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아쇠를 당기고 총기를 내려놓았다.

“신품이 맞네? 역시 물건 구하는 것은 확실하다니깐. 그런데 네가 직접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인 거 같은데, 무슨 일 있나?”

“물량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직접 가지고 온 거지 딱히 이유는 없어.”

바딤이 말했다.

업무차 대화이기도 하고 무뚝뚝하기로 악명 높은 러시아인이라 그런지 그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람이나 차량을 구하는 것도 돈이지. 게다가 이것은 전에 말했듯이 함부로 유통하면 안 되는 거라서.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겠지.”

그러면서 바딤은 양해를 구하지 않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걸 주문할 줄은 몰랐군. 우리나라 쪽도 그렇지만 여기 한국에서도 이걸 쓰는 사람이 생긴다면 꽤나 논란이 될 텐데.”

논란이 될 수준인가? 혜원은 자기 나름대로 납득을 한 직후 되물었다.

“그만큼 소음효과가 좋다는 말인가?”

“예전 소련이 해체되었을 때 몇 정의 VSS가 레드 마피아들에게 흘러가서 좀 문제가 되었었지. 체첸 시가전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기도 했고. 이건 그것의 위력을 더 강화한 거라서 유효사거리 내라면 저지력이나 화력이 좀 더 쓸 만하겠지.”

비록 석민이 쓰던 VSS보다 유효사거리가 100미터 모자랐지만, 그녀는 이게 석민에게 도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탄환 선택도 다채로웠는데 아음속탄 말고도 탄속이 소총 수준으로 빠른 초음속탄을 쓸 수도 있고, 저지력이 뛰어난 중량탄과 웬만한 장갑차의 측면도 뚫을 수 있는 철갑탄도 있었다.

그 말은 즉 이것만 가지고 다니면 따로 탄속이 빠른 무기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VSS보다 강화된 버전이라고 하니 마음에 드네.”

다만 무게가 VSS보다 두 배 이상 무겁기 때문에 혜원은 석민이 꺼려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여기서 VSS를 취급했었나?”

그때 바딤이 질문을 던졌다.

“아니, 그걸 쓰던 놈의 총이 너무 오래돼서, 고치는 것보단 새로 사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이왕이면 더 좋은 게 좋잖아.”

“총을 어떻게 하면 그 꼴이 되지? 고칠 생각이 없다면 나한테 팔지 그래?”

고장 난 거라도 소음기 달린 아음속 저격총이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바딤은 안 그런 태를 내려고 했지만 살짝 흥분한 기세로 물었다.

“아니, 그건 내 소유가 아니라서 팔지 못해.”

혜원이 말했다.

“험하게 다룬 것이 아니라 노후화가 심해서 벌어진 거야. 팔기엔 내가 총 주인이라도 애매해.”

“그런가…. 그런데 2정이라.”

“신세 진 사람들이 있거든.”

그녀는 이상하게 취조당하는 기분이 들어 다시 업무 내용으로 돌아갔다.

“방탄복은?”

“구했지만, 일단 가지고 오지 않았다.”

“탄약은?”

“구했다. 대략 1만 발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겠지? 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무기라더니 많이도 구했군.”

말만 구하기 어렵다고 하고는 창고에 박혀있던 것을 전부 가지고 온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이 들자 매서운 눈초리가 절로 포장용 종이박스를 훑었다. 총 자체는 새것은 분명했지만 박스는 오래된 게 맞았다.

악성 재고를 판 게 분명했다.

박스갈이를 안 했으면 감쪽같이 속았을 테지만, 바딤은 그러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바가지 당하는 것은 오랜만이지만, 이건 장사하려고 구하는 물건이 아니니깐.’

그래도 바가지는 바가지인지라 속상한 마음에 그녀는 담배를 꺼내서 물려고 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하지만, 잡다한 게 많아서 원하는 탄종으로 구해다 주는 게 아니라서 알아서 잘해야 할 거다.”

“뭐, 그 정도는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일단 총값이랑 탄창값은 지금 지불하기로 하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 나왔지만 그녀는 군말 없이 지불했다.

“탄약과 방탄복은 배달받고 상태를 확인한 직후 지불하도록 할게.”

“좋아. 그것들은 내일 중으로 배달하도록 하지. 이제 용무는 없나?”

“바티그, 오랜만에 만났으니 질문 좀 하지.”

바딤의 애칭으로 그를 부르자 바딤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난데없이 친한 척했나 싶지만 혜원은 오랫동안 그에게 궁금했던 것이 있었기에 약간의 민망함은 뒤로 밀어두었다.

“얼마든지.”

“원래 VSS를 사용하는 사람은 이걸로 괴수를 몇 마리쯤 잡았다고 하던데, 그게 가능하나?”

“지근거리라면 가능하긴 한데, 100미터 이내가 아니면 힘들어.”

바딤은 인상을 썼다.

“사실 5탄(5.56mm나 5.54mm)이나 7탄(7.62mm)으로 괴수들을 잡을 순 있지. 하지만, 5탄들은 괴수들에 대한 저지력 문제 때문에 수십 발을 맞았는데도 괴수들이랑 같이 죽을 때가 있지. 그래서 가장 좋은 게 7탄인데 나토탄 같은 소총탄 버전은 탄약도 많이 못 챙기고 반동이 심해서 쓰기 힘들지. AK탄환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소리가 크면 주변의 괴수들이 전부 몰려드니까, 소음기에 아음속탄을 쓰는 게 좋지. 그러면 9x39mm가 제일 좋다. 예전에 이곳으로 파병을 왔을 때 그것을 썼다. 그것을 쓰면 다른 괴수 무리의 시선을 끌지 않고 처리할 수 있었거든.”

그는 옛 생각을 떠올리는지 눈의 초점이 일시적으로 흐리멍덩했다.

“…여하튼 누구인지는 몰라도 현명한자군. 하지만, 그만큼 용감한 자일 거야. 아까 말했지만, 100미터 이내에 사격을 가해야 확실하게 보낼 수 있거든.”

“그래?

혜원은 매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쓰는 사람이 꽤나 유능한 사람인가 보군?”

“어, 꽤나 괜찮은 놈이야.”

“흥미롭군.”

바딤이 말했다.

“흥미 가지지 마. 내 사람이니까.”

바딤은 잠깐 상념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 이름을 왠지 알 것 같아.”

“정말로?”

혜원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장담하건대 VSS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지. 가진 자들도 서울수복작전 때 우리가 버리거나 두고 간 것들을 주운 게 전부야.”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겨우 그것으로 추리가 가능하다고? 혜원은 눈을 치떴다.

“어디 한번 말해봐 누구일 것 같은데?”

“죽은 줄 알았는데. 너와 만났다니 그것 참 인연이군. 이 나라는 역시 좁아.”

답을 질질 끄니 혜원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최석민이, 맞지?”

바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은 혜원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

“운이 아주 좋았어요.”

아영은 석민의 옷을 벗기고 물티슈로 그의 몸을 닦으며 말했다.

“깊은 상처는 하나도 없다니. 두꺼운 방한복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요.”

대부분 긁힌 상처들이라 대일밴드만 붙이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 정도면 스탯의 영향으로 반나절 만에 흉터 없이 다 나아져 있을 것이다.

“그래? 정말로 괜찮은 거야?”

다른 곳과 달리 제법 깊은 상처를 입은 팔의 이빨 자국을 석민이 걱정스레 살피자 아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상처를 보았다. 그곳엔 이미 깨끗한 거즈가 감싸인 상태였다.

감염자들이 가지고 있던 군수품이었다. 미래의 성전을 위해 비축해둔.

“아, 새끼 놈에게 물린 이빨 자국 말인가요? 적어도 괴수한테 물려서 광견병에 걸렸다는 말은 못 들었으니까요. 그것보다 중요한 건….”

하나뿐인 석민의 방한복이 찢어져 있었고, 군장도 망가졌다. 제일 중요한 건 무기가 망가졌단 사실이고.

아영은 조심스레 현 상황을 이야기했다.

“무기가 망가진 이상…. 더 이상은….”

“아니야.”

석민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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