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이트 오브 서울 166화 (166/226)

[게이트 오브 서울 166화]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구옥희 중령이 말했다. 단호하게 거부를 하니 석민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베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대신 석민이 일어나서 물었다.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가 개척을 해놓은 루트는 한 번은 어찌 쓴다 해도 위험성이 높아서 다시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께 길을 알려드리면 지난 수년간 준비했던 길이 쓸모가 없어지게 됩니다.”

구옥희 중령의 말을 들어도 석민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베르의 말이 거짓이든 어쨌든 우리가 가는 길이 구원이라 했으니, 저들 입장에선 우리를 도와주는 게 좋은 것 아닌가?

‘같은 믿음이라도 다른 종교라고 저러는 건가?’

아니면, 베르의 말이 거짓인 것으로 판단한 건가?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 하길 바라는 것 같군요.”

석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해 보니 이들의 신앙심이 깊다 해도 자신들을 희생하기 싫어하는 듯했다.

하긴, 저들은 이곳에서 생존을 위해 매일 목숨을 걸며 살아왔고, 그 누구보다도 계산적이고 냉정하게 이득손실을 따질 존재들이었다.

베르는 저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부활을 선물한 듯했지만, 본인 입으로 말했듯이 지금 인간으로 되돌아가 봤자 하등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처음엔 감동했음에도 시간이 좀 지나자 그다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 생각지 않는 듯했다.

“그래, 무엇을 원하십니까? 한 번 들어봅시다.”

석민이 말했다. 그는 거만하게 어깨를 쫙 펴고 등받이에 등을 깊숙하게 기댄 채 다리도 쩍 벌렸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통신기, 그러니까 휴대폰이 고장 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주님과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고 있지요. 여러분이 가진 휴대폰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그건 불가능합니다.”

사적인 정보가 너무나도 많이 담긴 그들의 휴대폰을 줄 순 없었다. 하물며 정부에게서 지급받은 비화폰을 넘길 순 더더욱 없었고.

무엇보다도 바로 휴대폰을 줘서 백은호와 통화라도 연결되면, 그들의 거짓말이 들통 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해 줄 수 없었다.

아니, 적어도 바로 줄 순 없다고 해야 했다.

그렇기에 석민과 아영은 휴대폰이 없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쓰던 휴대폰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영의 말에 구옥희 중령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더니 오래된 종이상자에서 아주 오래된 휴대폰을 꺼내서 그녀에게 넘겼다.

그것은 오래된 2G폰으로 만지기 무서울 정도로 낡은 데다 잔기스가 많았고, 원래의 도색도 벗겨져 있었다.

그것을 본 아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서 이런 골동품을.’

그녀는 폰을 석민에게 넘겼고, 석민도 어이없단 표정으로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석민이 보기에도 이건 완전 고대 유물이었다. 사태 이전을 기준으로 봐도 오래된 구식이었고.

막 녹색 액정에서 컬러 휴대폰이라고 광고하던 시절의 물건이었다.

“충전을 계속 시도해보았는데 어찌 된 것인지 몰라도 망가졌더군요.”

구옥희 중령이 말했다.

목소리로 추정해 보건데 그는 혹시 아영이 그것을 고쳐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듯했다.

그들은 교단과 연락을 하기 위해 선풍기와 자석, 그리고 자전거를 이용해서 만든 발전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과 연결된 콘센트가 달린 보조배터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 덕분에 그나마 최근까진 교주와 연락할 수 있었지만, 고장 난 뒤로 지금까지 그 원인을 찾지도, 고치지도 못한 채 연락이 끊긴 것이다.

“대체 휴대폰은 없습니까?”

아영의 물음에 그들은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대부분 망가진 것들이고, 이 휴대폰 말고는 멀쩡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감염자가 말했다.

아영은 발전기와 보조배터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래된 2g폰이 망가진 것이 분명했다.

아영은 휴대폰 배터리가 망가진 것으로 판단했다.

‘배터리만 교체를 하면 될 듯한데.’

하지만, 멀쩡한 배터리가 여기에 있을 리 없었기에, 아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혹시 이것에 대해서….”

“공구가 있으면 보기 편하겠지만…. 글쎄, 조금 무리일 것 같은데.”

석민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자, 구옥희 중령은 다시 입을 열었다.

“수리가 힘드시다면.”

그는 이젠 별로 기대도 하지 않은 눈치였다.

“다른 것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수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그것이라도 해야 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좀 내려가면, 전농동 사거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휴대폰매장들이 많이 있는데 신형 휴대폰도 팔았지만, 구형 휴대폰을 팔던 전자 상가들도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서.”

“이 기종과 맞는 배터리를 구하면 되겠네. 그러면 길을 알려준다는 것입니까?”

그의 말에 구옥희 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쉬워 보이긴 하지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석민이 말에 아영도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을 전부 둘러보았다.

본인들이 감염자니 주눅들 이유도 없건만 어깨를 움츠리는 그들을 보니 이 진지한 대화가 사뭇 우습게 느껴졌다.

“당신들 정도 되는 실력이면, 충분히 그쪽에 갈 만도 한데, 뭔가 거기에서 서식하고 있나 봅니다? 뭡니까, 그건?”

“일부러 숨긴 건 아닙니다.”

구옥희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괴수들을 잘 아십니까?”

“잘 압니다.”

“잠시만 설명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의도로 그러는 거지? 석민은 아영을 보았고 두 사람은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잠시 고민에 빠진 직후 석민은 드레이크와 와이번에 관해 설명을 해나갔고, 마지막엔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석민은 의도적으로 드래곤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구옥희가 말했다.

“그 드레이크 중에 티라노사우루스마냥 두 발로 서고키는 대략 4미터쯤 되는 종류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두 발로 서서 다니는 드레이크?”

석민은 반문하듯이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런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생각을 해보니 회기역에서 만났던 털이 달린 드레이크도 여태까지 본 적이 없기는 한데.’

하지만, 그는 그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키가 4미터쯤 되면 꽤나 높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없습니까?”

“머리가, 상당히 좋습니다. 일반적인 괴수로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그 정도는 드래곤을 상대해 보았으니 상관없었다.

“그것 말고는요? 숫자는 어떻게 되고 따로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영이 물었다.

“숫자는 딱 3마리입니다. 성체 2마리와 새끼 1마리입니다.”

드레이크나 와이번처럼 무리를 짓는 것도 아닌데 고작 3마리로 이런단 말인가? 석민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것들은 특이하게도 전농동 사거리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사거리? 길 한가운데에 둥지를 틀고 있다고요?”

그것은 절대로 드레이크의 습성이 아니었다.

드레이크들은 둥지를 최대한 숨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무리라던가 와이번들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4족 보행이 아니라 2족 보행인 것도 그렇고 무리가 아닌 일가족인 것도, 길 한복판의 둥지까지, 전부 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뭐 하는 것들이지?”

석민은 작게 혼잣말마냥 중얼거렸다.

“그것들은 우리 감염자를 사냥하고 그러진 않지만….”

감염자 하나가 말했다.

“자기들 영역에 들어오는 건 전부 죽이려고 들기 때문에 수많은 우리 전우들이 죽었습니다.”

전우라, 석민은 잠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가 그들이 민간인 복장을 한 자들보다 군복을 입은 자들이 더 많은 것을 본 직후 납득했다.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몰라도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드론을 준비하도록 하지요.”

아영이 말했다.

드론은 그들의 임시 은거지에 두고 왔기 때문에

다시 가지고 와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아영은 드론 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감염자들과 좀 떨어진 상태에서 따로 화면을 보았다. 감염자들은 석민과 아영 주변을 맴돌며 그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럼 어디 한 번.”

아영은 드론을 감염자들이 말한 남쪽으로 움직였다.

전농동 사거리 근처는 대부분 폐허였다. 남아있는 건물들도 반쯤 무너진 상태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으며 더 심한 건물은 내력기둥만 덜렁 남아있기도 했다. 길은 온통 건물 잔해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길의 흔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석민은 이곳 주변에 생긴 크레이터와 수많은 포탄의 파편들을 확인했다.

155mm 포탄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만들 수 없었다.

“아주 콩가루로 만들었구나.”

그러면서 그는 인상을 썼다.

포탄을 한 수백 발은 쏟아부은 것 같았다.

돌무더기가 저렇게 잔뜩 있으니 아무리 그들이라도 쉽게 지나갈 수 없을 테고, 잘못하다가는 드레이크랑 맞붙기 전에 찰과상만 입을 것 같았다.

콘크리트와 벽돌 파편 속에 깨진 유리와 콘크리트 골조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영향 때문인지도 몰라도 해당 지역은 검거나 회색빛이 더 강했고 뚜렷한 원색은 보이지 않았다.

저런 곳에서 괴수들을 상대로 빠르게 도망치는 것은 무리일 듯했다.

“여기가 전농동 사거리입니다.”

아영이 말했다.

생각보다 거리가 꽤 가깝게 느껴졌다.

석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조종기 화면을 보았다. 사거리는 딱히 건물들의 잔해가 별로 남지 않았고, 이상하게 돌무더기를 원형으로 쌓은 것 같은 구조물이 보였다.

마치 새 둥지마냥 만들어져 있었는데 크기가 어찌나 큰지 사거리 전체를 둥지로 만든 것 같았다.

와이번 둥지라던가, 드레이크들의 은신처랑은 아주 달랐다.

공중에서 보지 않는다면, 누군가 석벽을 쌓아서 작은 성채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듯싶었다.

“높이가 대략 2, 3미터쯤 될 듯싶네.”

석민이 말했다.

‘그래서, 그 괴수들은 어디에 있는 것이지?’

아영도 같은 생각인지 그녀는 드론의 고도를 천천히 올리면서 드론에 내장된 카메라를 돌렸다.

“잘 안 보이는데.”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카메라를 계속 돌렸다.

둥지인데 정작 둥지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석민은 고개를 들어 아직도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감염자들에게 물었다.

“새끼는 크기가 얼마쯤 됩니까?”

“크기가 우리보다 크거나 조금 작습니다.”

그런데 둥지 안에 없다?

무언가 이상했다.

“드론 고도를 조금 낮추고, 둥지 안을 살펴보자.”

석민의 말에 아영은 카메라를 돌려서 둥지 안쪽을 살폈다. 둥지 안쪽도 역시나 회색 돌무더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석민은 그 안쪽을 살펴보다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회색 무더기 속에서 반짝이는 듯 한 한 쌍의 호박색 눈동자를 본 것이다.

“이런.”

석민은 일반 드레이크마냥 비늘로 가득한 작은 괴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