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65화]
“왕…십리요?”
그 말에 중령 감염자가 실망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문으로 가려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기대에 보답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바짝 마른 미라 같은 얼굴들이라 표정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실망하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역력해서 이들을 속여야 하는 석민과 아영의 마음도 불편했다.
“교단과 연락이 끊긴 지 몇 달 되어서…. 교단에서 사람을 파견한 줄 알았습니다.”
“교단이라면 천국의 문 교단 말입니까?”
석민의 말에 감염자 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뼈마디 소리가 노골적으로 났다.
“그렇습니다. 혹시 그들 소식을 알 수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저희는 교단 사람이 아닌지라 알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주변에 앉아있던 다른 감염자들이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교단인도 아닌데 어째서 천사님과 그리고 사명을….”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다.”
석민이 말했다. 아영이 먼저 거짓말을 한 이상 그도 거기에 맞춰서 말해야 했다.
“우리는 교주를 알지 못하지만, 계시를 받아 움직이는 중입니다. 왕십리로 가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저 간악한 용이….”
석민은 그 말을 할 때 낯간지러움을 느꼈다.
왜 이쪽에 빠진 인간들은 쓰지도 않은 단어를 사용하며 고문체를 쓰는 거지?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온갖 주문을 걸어놓아서 왕십리로 접근하는 것이 너무 어렵더군요.”
너무 일방적으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석민은 일단 이들이 교단의 사람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기 싫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들이 교단과 상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석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접근하지도 않았을 텐데.’
“혹시 그 사명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석민이 말했다. 탄식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렇다. 말할 수 없다.”
베르가 말하자 주변에 있던 탄식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의 사명이 빨리 될수록 지금과 같은 일이 빨리 개선될 수 있음을 너희는 알라.”
석민과 아영의 말보다 베르의 말이 더 무게감 있었다. 감염자들은 공손하게 경청을 했지만 바로 납득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상합니다. 신의 전령이시여.”
“무어가?”
군복을 입은 다른 감염자가 나서서 말을 하자 베르는 매우 거만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희는 여태껏 교주님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교주가 말하는 계시를 들었습니다. 그 계시는 저희 같은 불쌍한 어린양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주는 우리를 이끌 유일한 선지자라고….”
“교주가 너희에게 그렇게 말했었나?”
베르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되물었다.
‘새끼, 거짓말은 진짜 잘하네.’
석민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전에도 그렇고 어디서 저런 말을 배운 거지?’
단순하게 국어사전이랑 백과사전을 읽어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감히 교주의 말과 나의 말을 저울질하는 건가?”
천사의 말에 그 군인 감염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군종병인지 군복에 십자가 무늬의 오바로크가 달려 있었다.
신실한 신도이겠지.
“나와 이들이 가는 길이야말로 구원의 길임을 명심하거라.”
베르가 말했다.
“또한 지금 너희가 자의로 나에게 말하는 것은 매우 방종한 짓임을 알라. 이는 마지막 방종이라 말하겠다.”
그 말에 감염자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너희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길을 안내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기뻐하라, 나는 너희의 몸을 치료할 수 있는 구원을 전할 것이다.”
“예?”
베르는 그들에게 의료기구를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서울시립대에 의과대학은 없어서 준비 못 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천사가 말하기 무섭게 어디서 구해왔다.
석민과 아영은 몰랐지만, 베르가 하는 방식은 천사장 오르곤이 했던 방식과 유사했다.
의료기구들을 받은 천사는 석민과 아영을 보더니 명령을 내렸다.
“혈액을 기부하라.”
그의 말에 따라 석민과 아영은 언짢은 얼굴로 수혈을 해야 했다.
이왕 속이는 거 제대로 해야 해서 베르를 상전처럼 모셔야 했던 것이다.
석민의 혈액형은 B형이었고 아영은 O형이었다.
그는 자신의 날개에 있는 깃털을 뜯어 혈액에 담갔다.
그 후 과학관 1층에 마련된 예배당에서 축성의 기도, 석민의 보기엔 대충 거룩한 의식의 흉내로 보이는 사기극을 벌이곤 혈액이 담긴 링거병을 들어 올렸다.
“이 피를 수혈하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너희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다만, 나는 너희에게 바로 수혈하고 싶지는 않구나.”
“어째서입니까?”
그 말에 중령 감염자가 물었다.
“너희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않는가?”
“아.”
베르의 말에 그자는 그제야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그들이 감염자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옷을 껴입고 있긴 했지만, 대부분 겨울옷도 아닌 데다 한 겹만 걸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수혈 받고 싶지 않단 소린 아니었다.
한 감염자가 손을 들며 베르에게 다가왔다.
“자비롭고 존귀하신 분이시여, 신의 신실한 종인 제가 간청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자는 팔이 하나 없었고 또 배를 괴수에게 뜯어 먹혔는지 찢어진 뱃가죽과 썩고 오그라든 내장이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
“저는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만, 죽지 못해서 살고 있습니다. 제 가족들 또한 제가 보는 앞에서 죽어서 저는 살아남더라도 가족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였으나 감염자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그 수혈을 받으면 저는 필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하니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여태껏 죽지 못해 살아왔습니다. 혈액형도 B형이니 수혈을 받으면 인간으로 돌아올 것이고 자연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형제님.”
“구원이 다가오고 있는데 어째서 그러십니까?”
“아무리 구원이 좋다고 해도 저로선 어쩔 수 없습니다. 가족들을 다 잃었습니다. 이렇게 볼품없이 추하게 살 바엔 인간답게 죽고 싶습니다.”
그것을 들은 다른 감염자들이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그녀는 완고해 보였다.
“방주를 타고 가신다면 구원을 받으실 텐데요.”
“지금 이런 모습은 악마의 저주라는 걸 모르시는 것입니까? 지금 죽으시면….”
‘교단 놈들이 대충 어떤 말을 했는지 알 것 같군.’
석민은 씁쓸한 입맛을 느끼며 그들의 논쟁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동조하는 몇몇 감염자들이 나타났고 토론은 길어졌다.
난데없이 죽는 게 낫다는 쪽과 죽으면 안 된다는 쪽이 나뉘어 언쟁하니, 석민과 아영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서로를 보았다.
저게 사실이라면 분명 수혈을 받자마자 그녀는 죽게 될 것이다.
베르는 대화를 그만하라는 의미로 거꾸로 잡은 창을 바로 세우고 창대를 바닥에 세 번 찍었다.
쿵, 쿵, 쿵 소리와 함께 감염자들의 대화는 멈췄다.
“자연사를 원하는가?”
베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건 자결이 아니니, 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베르가 말했다. 그는 생각보다 이 땅에 있는 유일신 종교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문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만이 구원은 아니지만, 네 영혼이 천국으로 당도하는데 다른 이들보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괜찮은가?”
“감내하겠습니다.”
여자가 외팔인데도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너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나의 전달이 진실임을 알리겠다.”
“감사합니다.”
석민과 아영은 그 감염자가 수혈을 받는 장면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수혈을 받은 감염 여성의 피부가 점점 생기를 띠고 눈동자가 없어 휑하던 눈두덩에서 눈알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머리카락이 자라거나 피부의 색이 돌아오진 않았다.
생기를 되찾은 여자는 고통의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환부와 잘린 팔 단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기껏 넣었던 피가 나오는 꼴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듯했다.
고통의 비명을 간신히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여자는 미소를 지었고, 이윽고 얼굴이 평온에 물들었다.
“감사합니다.”
곧 여성은 영원한 안식에 빠져들었고, 다른 감염자들은 말없이 그 모습을 그저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하나하나 눈에 새기겠다는 듯이.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한 동료가 죽어서 슬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죽을 수 있다.
아니, 그것보다 이 말린 육포가 아닌 인간으로서 되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기쁘게 만드는 듯했다.
감염자 하나가 죽은 여자의 시신에 군용 담요를 덮어 주었다.
시신을 덮기 무섭게 따뜻한 피가 담요에 배어 나왔고 추위에 금세 굳어버렸다.
석민과 아영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서 죽은 자에게 조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신의 사자이시여, 그리고 선택받으신 분들이시여.”
감염자들은 다시금 허리를 숙였다.
새로운 글자는 나오지 않았다.
조건
석민과 아영은 잔뜩 기대를 했지만, 그들에게서 그다지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순 없었다.
“저희도 수많은 시간 동안 준비를 해왔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구옥희라고 소개한 중령 계급장을 가진 감염자가 말했다.
“왕십리 전역에 용의 주문이 걸린 것을 압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어있고요.”
그 말에 석민과 아영은 베르를 보았고, 베르는 목석같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베르는 산 자들만 드래곤의 주문에 적용이 된다고 했는데, 저들의 말은 달랐다. ‘드래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들은 적용되나 보다.’라고 석민은 알아서 판단했다.
“그러면….”
“하지만, 그것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무어라?”
베르가 매우 지엄한 목소리로 꾸짖었고 그 목소리에 감염자들이 두려워 목을 움츠렸지만,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저놈의 무어라라는 단어는 어떻게 안 거야?’
석민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우리는 천국의 문 교단의 신도들입니다. 교단에선 우리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같이 방주에 타기 위해 협력해왔으며 교주께서 우리를 위해 수많은 설교와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개척한 루트는 그들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다. 이건 너희와 나의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나와 이들이 가는 길은 구원의 길이라 하였건만, 감히 나와 토론을 하거나 협상, 요구를 할 셈이냐?”
잔뜩 노한 목소리로 베르가 말하자, 감염자들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었다.
“이들이 수행해야 하는 사명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너희의 구원과 관계가 있다. 진정으로 방해를 할 셈이냐? 이들을 방해할 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