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62화]
혜원은 작게 혀를 내둘렀다.
“이딴 것을 써왔던 거야?”
그녀가 보기에 이건 수리한다 해도 다시 서울에서 쓸 상태가 못 되었다. 아니, 강선이 이렇게 심하게 닳은 것을 썼다가는 제 명에 못 죽을 것이다.
수리를 포기한 그녀는 총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잠깐 고민에 빠졌다. 석민에게 적잖은 선물을 해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군장도 말이지.’
그녀는 석민이 가지고 있는 군장을 생각했다.
딱히 문제는 없었지만, 그가 쓰는 방탄복은 구려도 아주 구렸다.
이참에 새로운 방탄복도 마련해 주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 총이 갤 노릴 것 같으니까.’
그녀는 잠깐 짜증나는 눈으로 총기상자들을 쏘아 보고는 수화기를 들었다가 잠깐 고민하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생각해보니 석민의 것만 챙기고 아영에겐 아무런 것도 해주지 않는 건 너무 얌체 같았다.
그녀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았던가.
‘그러면 각각 2개씩 구하지 뭐.’
다시 수화기를 든 그녀는 무기를 구해준 바이어의 번호를 눌렀다. 믿음직한 사람으로 그녀가 신뢰하는 동구권무기를 곧잘 구해주는 남자였다.
“아, 난데. 방탄복 2벌과 소총 2자루를 구하고 싶은데. ASh-12.7라고 알아?”
-…방탄복이야 뭐 구하기 쉽지만, 그건 구하기 좀 힘든데.
바이어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어눌하고 외국인 특유의 악센트가 느껴졌으나,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바이어의 입에서 ‘힘들다’는 말이 튀어나오자 혜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 말은 즉, 돈이 상당히 많이 든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혜원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돈은 얼마든지 주지.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탄약도 최대한 많이 구해줬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뭐, 그렇게 하지. 하지만 확답은 주기 어려워. 러시아제 아음속 총기는 러시아에서도 수출 금지하는 품목이라 빡세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해야 해. 네가 말한 건 FSB(러시아 연방보안국)에서만 사용하는 거야. 정말로 그걸 원하는 건가?
“어.”
-좋아, 알겠어.
통화를 마친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말하긴 해도 그녀가 아는 바이어는 확실하게 물건을 구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 바이어는 대량만 아니면 1주일 안에 무기를 구해다가 주었다.
이 얼마나 확실한 배송 서비스란 말인가?
이 남자가 없었으면 그녀의 사업 능력은 절반쯤 줄었을 것이다.
“좋아, 그러면….”
혜원은 다른 할 일을 위해 움직였다.
그녀는 석민이 쓰는 아음속 저격총탄의 규격이 9x39mm인 것을 알았지만, 그녀가 주문하는 총기의 탄환은 12.7x55mm이었다.
규격이 더 크고 더 확실하게 유효사거리 내에서 적의 방탄복을 뚫을 수 있으며, 저지력은 더 강력했다.
그 말은 즉 괴수들도 좀 더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단 것이다.
‘너한테 부담되기 싫으니깐.’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흥얼거리면서 자신의 작업에 들어갔다.
***
교주가 기도실에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번에 보았던 대천사가 강림했다.
4쌍의 날개를 단 천사가 좁은 기도실에 나타나자 자그마한 기도실이 꽉 찼다.
천사의 날개가 마치 교주를 감싸듯 모이면서 거룩한 빛을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천사는 양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천사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또 실패했구나. 아이야.
“죄송합니다.”
-아이야, 너는 배신자이자 무능한 자구나.
예상했음에도 직접적인 책망에 교주는 저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천사를 볼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너는 해이해진 마음가짐으로 사명을 수행한 결과, 신과 우리의 적들을 도와주었구나. 참회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라.
“…그리하겠습니다.”
교주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낮게 흐느꼈다.
-그리하면서 이곳 지상에서 먼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너에게 내려진 지상 명령이다. 너는 선택받은 자이자 선지자이다.
“맞습니다.”
-너는 너무 많은 걸 보았고, 너무 많이 들었다. 너는 너무나 타락했는데도 선택을 받았다. 네 목숨은 약간의 값어치도 없다. 너는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위에 계신 분의 뜻으로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혹자가 들었다면 천사가 너무 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 의문을 느낄 법하지만, 백은호는 천사의 말에 따라 고개를 기계적으로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명심하거라, 아이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교주를 감싸던 4쌍의 날개가 풀리고 천사의 모습이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백은호는 천사와의 대화를 다시 되새겼다.
적들에 대한 언질이 따로 없었다.
‘성전만 신경 쓰라는 것인가? 그러면 적들은 천사들이 직접 처리한다는 의미겠지?’
교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0년 묵은 응어리가 내려가는 듯했으나, 동시에 그럴 거면 진즉에 천사들이 직접 처리하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큰 뜻이 있겠지.’
그러나 그는 그렇게 판단하며 기도실에서 일어났다.
확실한 건 이제 그들이 적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 그것으로 충분하다.
교주는 안심했다.
적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감염자들도 치료가 가능해졌다.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 그거면 되었다.
교주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과거에 연락이 끊긴 이들과 통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아직 서울에 있었고, 그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줘야 할 것이다.
뱅스틱
석민과 아영은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원래 생각한 것처럼 근방에 있는 대로(왕산로)를 이용해 청량리역 방향으로 가려 했으나, 시조사 삼거리에 있는 드래곤의 주문에 가로막혀 버렸다.
그 주문이라는 벽은 너무나도 촘촘했다.
‘이거 전부 막힌 거 아냐?’
라고 두 사람이 생각할 만큼 많은 주문들이 걸려 있었다.
작은 골목, 건물, 그 사이의 틈새까지 마치 누군가 계획적으로 선을 그어놓은 것마냥 모든 길이 막혀 있었다.
온존하지 않은 건물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을 시도하느라고 그들의 온몸은 찰과상으로 가득했다.
“아니, 이건 애초에 접근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짜증이 난 석민은 투덜거렸다.
중랑철교 때처럼 일부러 함정에 걸리지 않는 이상, 지나갈 수 없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길을 찾겠다고 거의 하루를 소비한 탓에 결국 밤이 되고 말았다. 가장 멀리 이동한 것이 고작 300미터일 만큼 심하게 서쪽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그들은 회기역 근방에 있는 반쯤 무너진 건물 지하실에 임시거처를 마련했다.
해가 떨어진 직후 생겨난 강추위에 그들은 몸을 잔뜩 떨었고 따뜻한 음식을 먹기 위해 전투식량의 발열팩을 활성화 시켰다.
“남은 루트는.”
석민이 설탕을 잔뜩 넣은 커피를 끓이는 동안 아영은 초콜릿 바를 먹으며 휴대폰 지도 어플을 확인했다.
“서울시립대의 캠퍼스 쪽인데.”
그 말에 석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 넓고 큰 부지에 가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괴수둥지가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사태 때 캠퍼스들을 군사거점으로 여럿 사용해서 감염자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어.”
“아니면 버려진 군수품이 있을 수도 있지요.”
버려진 군수품을 모아서 돈을 벌거나 자신이 쓰는 사람들이 있다고 몇 번 들어보긴 했었다. 군수품 이야기가 나오니 석민은 회기역에서 보았던 일이 생각이 났다.
“커피부터 한잔하지.”
강추위 때문인지도 몰라도 전투식량의 발열팩이 시원찮았기에 그들은 커피를 마시며 음식이 따뜻해지길 기다렸다.
“회기역에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요?”
석민의 말에 아영이 놀라 되물었다.
“어.”
“다른 헌터들일까요?”
“아마 그렇겠지?”
“그런데 겨우 뱅스틱 따위로 괴수와 싸울 생각을 했다니 흥미롭네요.”
“뱅스틱?”
석민은 그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의문을 가졌고 아영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막대기 끝에 탄약을 달아서 찌르면 격발하는 방식의 무기인데, 보통은 수중에서 쓰는 무기입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지상에서 못 쓰는 것은 아닙니다.”
“지근거리에서 명치를 노리고 쏜다면 쓸 만하겠네.”
그가 들어본 소리로 추정을 해 보건데 뱅스틱의 탄환은 대충 7.62mm 나토탄 같았다.
“그 정도 탄약이면 괴수를 상대로 괜찮겠네요. 제가 아는 선에선 50구경까지 있는 것으로 알거든요.”
“50구경이라, 그걸로 찌르면 어떤 괴수라도 다 죽긴 하겠네. 지근거리에서 터지면 뭐 아주 쓸 만하겠어.”
음식이 다 익은 것 같자 그들은 전투식량을 먹었다.
“베르, 너도?”
“아니, 나는 괜찮다. 우리는 섭취하는 것을 그렇게 자주 할 필요 없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지만 베르는 음식을 자주 먹지 않았다. 아무래도 1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쯤 먹는 것 같았다.
석민과 아영의 대화는 자연스레 그들에게만 국한되었다.
“쓸모가 있어 보이는 무기이긴 하지만, 결국 그것도 근접 무기이고 접근을 해야 하는데, 숫자가 얼마나 되기에 그걸 들고 다니는 거지? 설마 여러 개를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닐 테고.”
아무리 스탯을 찍은 그들이라도 괴수와 지근거리에서 싸우는 것은 좋아하진 않았기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해 보이는 그런 싸움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명치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순식간에 괴수 밥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그런 놈들이랑은 만나고 싶지 않네.”
석민은 음식을 다 먹은 직후 베르를 보았다.
“네가 보기엔 어때? 우리가 왕십리에 바로 갈 수 있을까?”
“갈 수는 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역시 용의 몰래 접근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군.”
별로 희망적이지 못한 말이 나오자 석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용과 싸워야 한다는 건가?”
그 말에 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꼭 그런 뜻은 아니고, 대비하는 것이 좋을 거란 소리다. 우리가 문에 도착하면 결국 용이 알게 될 테니까.”
베르는 천사들이 문을 열길 용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에 도착하면, 어떻게 문을 제대로 열고 방주를 빼낸 후 다시 문을 닫을 거지?”
“문은 우리가 만든 것이니 우리의 의지만 있으면 닫을 수 있다. 그것은 걱정할 필요 없다. 다만, 드래곤 또한 그걸 노리고 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문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가만히 때를 기다리는 것이지.”
베르는 이어서 문을 만들기 위해 천사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해왔는지 설명했고, 그렇기에 드래곤이 문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것이라 말했다.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것만큼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이 불안전하게 열리고 방주가 지금 끼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쉽게 넘어오지 못하는 것이지, 방주가 빠져나오고 바로 닫지 않는다면 그 입구를 통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엄청난 수의 괴수들이 여기로 들어올 것이야. 내 동료들이 그것을 염려하고 추종자를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야. 문을 통해 엄청난 양의 괴수가 유입될 수 있기 때문에 교단의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입구를 통해 들어올 괴수들을 막을 자들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