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이트 오브 서울 151화 (151/226)

[게이트 오브 서울 151화]

석민은 안전가옥에 도착한 후 아영이 내미는 영수증을 받았다.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네?”

그는 소파에 앉은 채 눈살을 찌푸리며 영수증 목록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아영은 안전가옥의 보일러를 켠 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추위 때문에 그녀는 양말을 신은 발을 꼼지락거렸다.

“제대로 된 도장을 하려면 그 정도 돈은 들지요.”

아영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녀는 석민이 쪼잔하게 구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그에게 실망을 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무슨 금칠을 한 것도 아니고.”

석민은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자신의 품에서 현금을 꺼내 건넸다.

아영은 석민이 군말을 하긴 해도 거리낌 없이 돈을 주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고 잠깐 있었던 언짢은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덕분에 말투가 평소처럼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둘이서 3일 동안 호텔에서 지냈나요?”

아영은 자신의 지갑에 돈을 넣으며 물었다.

“응.”

반면 월급이 쥐꼬리만 한 공무원인 아영은 경기도를 빠져나와 오랜만에 세종시에 있는 자신의 친척 집에서 신세 지내야 했다.

그나마 햇빛이 잘 들어오는 충청도 지역이라 오랜만에 직사광선을 맞아보긴 했지만, 호텔 생활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연인인 남녀가 함께 호텔에서 호화로운 3일. 아영은 한 번쯤 자신도 그런 생활을 해보고 싶어졌다.

한, 두 살 차이지만 그녀는 석민보다 젊었고, 옆구리가 시릴 때마다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 없었다.

서울에 벌어진 사태, 군무 수행과 사명의 영향으로 연애를 할 기회가 없던 것도 있지만,

기껏 썸을 타던 이들은 그녀의 높은 눈을 채워줄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이상 심도 깊게 만나질 못했다.

“그 호텔 참 좋은 곳이라 들었는데….”

“응, 좋긴 좋더라. 피트니스도 있고 수영장도 있고 뷔페도 있고 시설도 사태 이전만큼 좋고.”

석민의 머릿속엔 혜원과 지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지나갔고, 순간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바지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을 본 아영이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지에 텐트 생겼습니다.”

“시발.”

석민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고는 다급히 외투로 자신의 하체에 덮었다.

아영을 앞에 두고 민망함과 자신이 저지른 무례한 행동에 아까 전보다 석민의 얼굴이 더 시뻘게졌다.

“스탯을 그런 것에 악용하지 마세요.”

‘자기가 준 것도 아니면서.’

“남이사.”

석민은 창피함을 감추고자 머리를 마구 흩뜨렸다. 씩 웃고 있는 아영을 보니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생각해보니 그들은 수평적인 관계인데, 자신이 묵고 있던 호텔까지 차를 몰고 온 아영에게 미안함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편이를 위한 운전사가 아니다.

그랬기에 석민은 아영이 혜원과 호텔에서 어떻게 놀았는지 궁금해 하는 것을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사적인 것까지 거리낌 없이 이야기해 주었고 잠시 후 너무 필요 이상으로 이야기를 한 것 같다고 후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혜원이 동거하자고 하더라.”

석민은 화제를 돌릴 겸 혜원과의 일을 꺼냈다.

“동거요?”

아영은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나오자 놀라 되물었다.

“응.”

석민은 그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다. 물론 아영도.

“그래서 당연히 거절했겠지요?”

“못했어.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거든.”

그 정도도 유연하게 넘기지 못했단 석민의 말에 아영은 한숨이 나왔지만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다.

“뭐, 사명이 끝난다면 다 나중에는 가능하겠지요. 혜원 씨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봐선….”

자신이 지나치게 오지랖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아영이 입을 닫았지만, 석민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인가?’

아영은 그 말을 되뇌었다.

“그렇지만 사명의 끝을 알 수 없으니까. 난 잘 모르겠어.”

화젯거리가 자연스레 사명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아영은 석민의 무기에서 떠올랐던 문구가 생각났다. 아마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린 것이리라.

“넌 어떻게 생각해? 이 사명. 슬슬 감이 잡히지 않아?”

석민은 허리를 숙이고 아영을 빤히 보았다.

“감은 잡히고 있죠. 우리에게 능력을 준 신일지도 모를 자는, 우리가 저 문을 닫기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네.”

문을 닫는단 말은 즉, 드래곤하트의 안정적인 수급이 불가능해진단 말과 같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제 생각이요?”

아영이 물었다.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싶은 방어기제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언성은 조금 높았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저는 이걸 최대한 늦추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어.”

석민은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지금 국가는 없는 돈을 쪼개서 노후화된 원자력 발전소를 해체하고, 일부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드래곤하트 발전소를 건설 중입니다. 이미 확보된 드래곤하트로는 겨우 발전소 3기가 10년간 가동될 정도라는데… 솔직히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죠.”

“그렇겠지.”

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그걸 늦출 수 있을까? 천사 베르는 문이 점점 불안해지고 있다고 하고 남산에 있는 용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방법이 없지는 않겠지. 드래곤하트가 국가부흥의 유일한 방법이 아닐 테고.”

“그건 아니에요. 석민 씨.”

아영이 말했다.

“사태 이전엔 그래도 어느 정도 세계 경제에 영향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지분을 잃었고, 그 빈자리는 다른 나라가 차지했죠. 우리가 다시 그걸 찾을 방법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에너지 쪽을 차지하는 것이 낫다는 건가.”

“에너지 쪽은 자립만 할 수 있다면 기회가 생기리라 보는 거죠. 뭐, 솔직히 저는 경제는 잘 몰라요.”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일개 군인이라 뭐라 단정 지어 말할 순 없지만, 여하튼 대통령님은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 보고 계시는 것 같아요. 대통령님이 우리의 사명을 알게 된다면 막으려고 하실 거고요.”

“그러니 대통령님 몰래 해야 한다는 것이겠지. 사명을 완수하려면.”

“네.”

침묵이 감돌았고 석민은 긴장했다.

아영은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여지를 두고 이야길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랬다.

그녀는 전달하는 자이고 사명을 위해 석민을 찾아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는 애국자이며 국가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중시하는 자이기도 했다.

아마 그런 점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일 테다.

“선택해야 해.”

석민이 말했다.

“사명? 국가?”

두 가지 경우 다 장단점이 있었다.

사명을 쫓는다면 서울과 경기도를 뒤덮은 망할 구름이 사라질 테고 사계절이 돌아올 것이다. 경기도 사람들은 타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며 서울 또한 재개발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국가 경제는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 있던 나라라 어떻게 될지 추측도 힘들었다.

국가를 위해 사명을 미룬다면 안정적인 드래곤하트 수급이 가능해질 것이고, 그것을 이용해서 외화 유출이 심한 석유가 아닌 새롭고 값이 싼 이 신에너지를 이용해 국가 경제를 제기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은 불안정했다. 뿐만 아니라 천사라는 것들이나 드래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이미 천사들은 사이비 교단을 만들어 자신들의 추종자를 이용해 행동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문이 완전히 열리고 방주가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 뒤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문은 똑바로 닫힐 것인가?

안 닫힌다면 방주를 따라 환상 속에서 보았던 수많은 괴수와 드래곤이 따라 들어오지 않을까?

아니, 문이 제대로 닫힌다 한들 방주가 들어오면 천사들이 이 세상을 식민지화하려고 하진 않을까?

그런 일들을 다 고려한다면 차라리 문을 닫아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석민은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상상력도 빈곤했다. 그런데도 문을 닫는 게 낫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딴 사명 빨리 해치우고 능력 따위 버려버리고 싶었다.

사명을 완수한다고 해서 사라진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석민은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그 사명 때문에 생긴 능력이니까.

눈앞에 보이는 증강현실 십자선은 석민이 굳이 입을 떼지 않았을 뿐, 많은 고통과 불편함을 그에게 부여했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았고, 자신이 게임 속 인물인지 현실 인간인지 분간 가지 않았다. 게다가 시력 스탯을 한 번 더 찍은 이후로 그 정도가 심했다.

밝은 곳에 있을 땐 그나마 괜찮았지만 어두운 곳에 있을 땐 여지없이 초록빛으로 보이는 세상에 짜증이 났다. 그것도 고성능 야시경처럼 말이다.

심지어 상대방의 열상에 따라 여러 형광색으로 밝게 빛이 났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차마 이걸 말하지 못했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이번에 호텔에서 혜원과 하루 종일 뒹굴 때, 혜원은 창피하니 계속 불을 끄길 원했다. 물론 석민은 켜길 바랐고.

불을 끄면 그녀의 얼굴조차도 형광빛으로 물들어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딴 곳으로 흘러간 생각의 줄기를 바로잡고 석민은 다시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

그건 사실이다.

“네가 결정하면 난 따를게.”

그는 사명을 완수하고 싶었기에 분위기로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선택해야 해.”

아영은 눈을 내리깔고 고민에 빠졌다. 석민은 보채지 않고 그저 차분하게 그녀가 답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역시 사명이겠지요.”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명이 더 중요하겠지요.”

석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고 보니 스탯은 찍었어?”

아영은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 힐끗 바라보았다.

[석영, 전달하는 자.]

레벨:17

지구력:5

체력:5

활력:5

시력:5

스탯 1

“야간전 시야가 슬슬 한계인 것 같아서 시력 스탯을 찍을까 생각 중이에요.”

석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경기를 일으키자 아영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너보다 스탯 하나 더 높거든? 부작용이 심해.”

“부작용이요?”

석민은 자기가 겪은 고충을 이야기했다. 그 말에 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딴생각으로 빠지더니 주저 없이 시력 스탯을 찍고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석영, 전달하는 자.]

레벨:17

지구력:5

체력:5

활력:5

시력:4

안 그래도 서울과 경기도는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어두운데, 안전가옥은 창마다 커튼으로 꽁꽁 싸매있어서 어둑어둑했다.

아영은 주변을 살피더니 일어나서 거실 불을 끄고는 석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석민도 형광색으로 밝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건 아니야.”

아영이 말했다. 침울한 목소리에 그 고충을 알고 있던 석민도 음울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방사능에 오염된 사람이 빛나는 거 같아요.”

“에이.”

재수 없는 말에 석민이 불평 섞인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니, 잠깐…. 그러면 3일 동안 호텔에서 밤에….”

“거기까지.”

석민은 얼른 아영의 말을 잘랐다.

아영이 거실의 불을 켜고 두 사람은 뚱한 표정으로 서로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 사이도 아닌 남녀가 저질스러운 농담까지 주고받고 웃어넘기는 건 그만큼 신뢰와 우정이 바탕에 깔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시시껄렁한 잡담이 계속 이어졌을 테지만 소소한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석민은 혜원으로 발신자가 찍힌 번호를 보고 아영에게 양해를 구한 후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훈훈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