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50화]
그렇지 않아도 이승철은 콘크리트 톱이 들어있던 가방을 전달한 도발에 이를 갈고 있었는데, 의뢰받은 타깃이 아니면 살인을 하지 않는지라 그냥 이름만 곱씹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 타깃이 되어 나타나니 아니 기뻐할 수가.
그러나 이승철은 본격적으로 계약을 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석민을 죽일 순 없었다.
아무리 사적인 원한이 있더라도 함부로 방아쇠를 당길 생각은 없었다.
돈벌이도 중요했다.
이쪽 업계에서 하는 일은 당당한 일이 아니니 의뢰받고 돈 떼먹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때문에 그는 함부로 총을 꺼내는 대신, 박재만과 연락이 될 때까지 기다리며 저들 뒤만 밟았다.
적어도 선금은 받아내야 계약 성사다.
만약 박재만이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면 이미 석민과 아영이 차에 접근했을 때 공격을 받았을 테지만, 이석현 때문에 박재만은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원래 성격이라면 박재만이 한번 전화 안 받은 시점에서 이미 거래가 취소되었겠지만, 어떻게든 석민을 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는 관대하게 기다렸다가 결국 거래를 성사시켰다.
이승철은 창가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뜨거운 커피와 샌드위치를 즐기며 계약금 1천만 원이 들어온 내역을 확인했다.
이승철도 계속 호텔 입구만 주시하며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아무리 그곳을 주시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입구를 들어갔다 나오는 모든 차량의 사람들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1시간 뒤 호텔로 들어가는 택시 뒷좌석에 탄 혜원을 놓쳤다.
대신 이미 다른 곳을 감시할 계획을 잡아두었다.
그는 이 타깃에 대한 모든 정보를 교구장 박재만에게 전달받았다. 또한 석민이 어느 가게에 자주 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마침 자신도 자주 애용하는 가게였고, 그곳 사장과 석민이 제법 특별한 관계인 것도 파악했다.
그는 그 근처에서 기회를 엿볼 것이다.
솔직히 오늘 간 곳이 석민과 아영의 본거지라 생각하지 않았다.
경기도의 지형을 빠삭한 그는 그 근방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거환경을 떠나서 인프라가 전혀 안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은신하며 살더라도 최소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필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곳엔 그런 것들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쉽게 추리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들이면 저들의 진정한 은거지를 알아낼 수 있을 테고, 그럼 일은 쉽게 풀릴 것이 분명했다.
이승철은 석민을 쉽게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최소 자신의 모든 악감정을 풀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했다.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고 끔찍한 죽음을 그에게 선사할 생각이었다.
그의 두 눈에선 광기와도 같은 웃음이 나왔다.
이승철
그날 혜원은 석민이 있는 호텔로 찾아왔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석민을 꼭 끌어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석민은 부담스러웠으나, 말 대신 같이 안아주었다.
둘은 그대로 서로의 체온을 위안 삼아 밤을 보냈다.
다음날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호텔 조식을 먹고, 스파도 즐겼으며, 운동도 함께 했다.
심지어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호텔 디너도 즐겼다.
“아직도 이런 곳이 경기도에 있을 줄은 몰랐어.”
혜원은 섬세하고 우아한 손짓으로 고기를 썰면서 말했다. 신기하게도 평소 거친 언행과 달리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석민은 손으로 폭립을 뜯다가 힐끗 혜원을 쳐다보고는 손에 묻은 양념까지 쪽쪽 빨아 먹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그런 듯했지만, 석민도 그에 관해 따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을 즐길 뿐이었다.
그렇게 밤이 되고, 전에 했던 농담을 현실화하려는 것처럼 뒹굴었다. 그들은 다음 날 저녁이 될 때까지 객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3일째 아침이 되는 날, 혜원은 침대에서 석민에게 속삭였다.
“같이 동거하지 않을래?”
부끄럽고 쑥스러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해놓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갓 잠에서 깨어나서 눈을 뜨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석민은 그녀의 말에 좀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다.
“동거라고?”
“…싫냐?”
“응.”
순식간에 튀어나온 단호한 대답에 혜원이 화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석민을 쳐다봤다. 이렇게 빠른 시간에 얼굴이 붉게 변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석민은 말을 이었다.
“거기 살면 맨날 중식만 먹을 것 같단 말이지. 아야.”
어이없고 허탈한 숨을 내쉰 혜원이 분노의 옆구리 찌르기를 시전했다. 석민은 몸을 비틀었다.
“이유가 겨우 그딴 거냐?”
“아, 이유가 그거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
석민은 차마 그녀에게 자신의 상황을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박약한 뇌에서 짜낸 변명이었다.
“맨날 중국요리 아니면 치킨만 먹잖아. 얼마나 느글거리는데, 어떻게… 아이쿠!”
이젠 옆구리에 손가락이 아니라, 주먹이 들어갔다.
“내가 맨날 중국요리만 먹는 줄 알아?!”
빽 소리 지르던 혜원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 석민과의 데이트들을 떠올려봤으나, 틀린 말은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렇단 말이지?”
혜원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그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였다.
“그러면 내가 요리해 줄게. 아, 물론! 중식이 아니라 한식 같은 것으로.”
어떻게든 뜻을 관철시키겠단 혜원의 의지가 보였다. 애초에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기에 더 이상 내뱉을 변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석민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별수 없나?’
“알았어. 그러면 나중에 그렇게 할게.”
나중에라고 했지 구체적으로 언제라고는 안했다.
“정말?”
평소라면 단어 선택에 꼬투리 잡았을 그녀가 여태껏 본적 없었을 정도로 활짝 웃으며 기뻐하자, 석민도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까지 지극정성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혜원은 팔을 뻗어 그를 껴안았다.
“고마워라.”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석민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혜원이 자기의 지갑에서 황금색 카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야?”
“뭐긴, ‘우리 집’ 출입 카드.”
우리 집이라는 말의 무게에 석민의 마음 한편이 불편하게 삐거덕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 우리 집이라는 개념은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낯설고 어색한 기분에 혜원이 필요 이상으로 관계를 빠르게 진척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석민은 아직 그렇게까지 그녀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연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그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뭐, 그래도 동거하면 서로 더 빠르게 심화과정으로 알게 되겠지.’
석민과 혜원은 조식을 먹은 후, 호텔 로비에서 꽉 끌어안아 서로의 체온을 새기고는 헤어졌다.
그녀를 위해 택시를 불러주고 뒷좌석까지 열어서 태워준 후,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석민은 휴대폰을 꺼내서 아영에게 전화를 했다.
“이쪽으로 와줘.”
-거기가 어디인데요?
막 잠에서 깼는지 낮게 잠긴 아영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주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
이승철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근 3일간 혜원의 건물을 감시 중인데, 겨우 그 시일도 참지 못해서 계속해 전화해대는 박재만 때문이었다.
-왜 미행했을 때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매우 정중한 어조였으나 명백한 질책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은 적 없었던 이승철은 짜증이 났다.
“내 방식대로 한다고 했을 텐데? 게다가 공격을 못 한 건 전화를 안 받은 너 때문이지, 나 때문이 아니야. 그리고 계약을 했을 때 기한 제한이 없었고.”
그래도 박재만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평소엔 예의를 지켜 말했으나, 잔뜩 화가 난 이승철은 노골적으로 반말을 했다.
그는 박재만이 코너로 몰리든 말든 별 상관없었다.
그의 관심사라곤 오로지 사람을 죽이고 막대한 돈을 받는 것뿐이었다. 목표가 이루기 힘들수록 성취했을 때 오는 만족감이 컸기에, 그리고 죽어가는 목표가 살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에 쾌감을 느끼기에. 그는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승철의 목소리가 점점 안 좋아질수록 박재만 또한 목소리가 흔들리고 끝없이 땀을 흘려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힐 순 없었다.
교주의 진노가 그에게 덮치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대원을 잃었고 사도대의 대원인 박선우도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적은 잡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다곤 하나 분노한 교주에겐 그저 하찮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 행동은 교단에선 결국 죄악에 지나지 않았다.
‘1주일 이내로 결과를 가지고 와! 안 그러면….’
교주가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박재만은 두려웠다.
아무런 말을 안 하니 오히려 더 최악만 상상하게 되었고, 꼬인 그의 성격과 섞이면서 더욱 초조해져 갔다.
-이틀 안에 끝내지 못하면 줄 돈은 없는 줄 알아. 그땐 돈 줄 사람이 죽어있을 테니깐.
이승철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앉아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힘에 못 이겨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가서 넘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먹고사는 것은 중요했다.
“…이 일은 잊지 않지.”
-그러던지.
통화가 끝난 직후 이승철은 이를 갈며 혜원의 가게를 보았다. 말쑥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내면의 감정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광기에 가까웠다.
원래 목적은 언젠가 혜원의 가게를 찾을 석민을 찾아서 추격하고 그의 은거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승철은 순간 가장 쉬워 보이는 방법을 떠올렸다가 주저했다.
분명 혜원은 석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납치해서 석민을 끌어들이면 혜원과의 관계로 영원히 쫑이었다.
혜원이 자신을 배신했다 생각했던, 석민과 악연이 생기게 만들었던 사건으로 이미 그녀와의 관계가 많이 틀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녀만큼 좋은 무기와 탄약을 빠르고 안전하게 구해주는 가게는 없었고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는 혜원과 이 이상으로 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웬만하면 그녀를 빼놓고서 석민과 아영을 처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그는 잠시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겨우 4천만 원을 벌자고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격인데.’
뭐, 자신에게 있어서 혜원은 무기 조달 외엔 아무런 가치가 없긴 했다.
아쉽지만 거기까지였다.
생각을 마친 이승철은 행동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의 눈은 매우 단호해지고 무표정해졌다.
이승철은 권총과 마취제, 구속구가 담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관찰한바 혜원은 점심을 먹으러 1층 중화식당에 간 상태였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서 휘파람까지 불며 매우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이때가 아니면 그녀를 노릴 기회가 없었다.
혜원은 점심 먹을 때가 아니고서는 가게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내일을 기약해야 했다.
그나저나 타이밍 한 번 예술이라고 이승철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