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41화]
“그냥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석민의 말에 아영은 동의를 했다.
“돌아가는 길에…. 오랜만에 호텔 말리나에 들릴까요?”
여긴 춥고 집은 멀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가깝고 안락한 호텔 말리나에서 기름진 꼬치구이와 맥주 혹은 독한 보드카가 당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에 석민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너도 거기가 마음에 드는구나.”
“뭐, 그렇죠.”
아영은 여전히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호텔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곳이 필요한 곳이란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가자. 베르, 우리 이제 가봐야겠어. 다음에 다시 오지 여기서 대기할 수 있어?”
“얼마든지,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고맙군.”
석민은 그의 말을 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난로 덕분인지, 말리나에서 쉴 생각 덕분인지는 몰라도 벌써부터 한결 힘이 났다.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훈훈하고 따뜻한 공기로 가득한 호텔 말리나에 도착한 석민과 아영은 여장을 풀고 배를 채우기 위해 바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엔 그들의 모습을 보고 흠칫 몸을 떠는 이가 있었다
바로 정석호의 팀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나이퍼 지선호였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전부 당한 이후로 가질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챙겨서 안전하다 여긴 이곳에 왔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자신의 동료들을 처리하던 적이 눈앞에 나타나니 놀랄 수밖에.
아까와 달리 군장도 푼 상태에 헬멧도 쓰지 않았으며, 떡진 머리나 꾀죄죄한 차림새가 퍽 더러웠으나 입고 있는 군복이나 체형을 보건데 자신들의 동료들을 해치운 놈들이 맞았다.
‘분명해. 게다가 2인조이잖아.’
그는 적의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지만, 석민과 아영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날 바엔 사람들로 가득했고, 심신이 피로했던 그들은 평소보다 경계심이 풀어져 있었다.
지선호는 권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호텔 내부에서 화기류를 가지고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엄히 금지하고 있어서 그가 가지고 있는 건 20센티 길이의 단검 하나뿐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호텔이지만, 그는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누가 적의를 가지고 있든 말든 석민과 아영은 소, 닭, 양고기에 야채까지 든 샤슐릭 세트에 꿀맥주를 주문하고는 나오자마자 먹고 마시며 즐거운 목소리로 잡담하느라 바빴다.
“베르가 좀 건방지긴 하지만, 그래도 도움은 되니까 걱정할 것은 없겠어.”
“네, 잘 됐죠. 진짜 말도 안 되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잖아요. 우리가 하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되겠죠.”
베르를 앞에 두고 차마 스탯을 어떻게 찍을지 이야기할 순 없었기에, 마침 새로운 스탯을 어디에 찍을지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때, 지선호는 천천히 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민은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고 아영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아영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할 것을 대비해서 애써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며 매우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복수에 눈이 먼 그는 후환이 두렵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석민의 목을 단검으로 찌르고 아영을 처리할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그의 오른손이 자연스레 단검이 들어있는 외투 안쪽으로 향했다.
거리는 고작 10미터도 되지 않았다. 주변은 손님들로 가득해 시끄러웠다. 그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이려는 순간, 눈앞에 금발머리의 외국인이 나타나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키가 큰 여자가 굽 높은 하이힐까지 신고 있으니 지선호가 오히려 올려다봐야 했다.
“노노노.”
그녀는 혀를 낮게 차며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까닥거리며 흔들었다.
어느새 호텔 경비들이 그의 좌우에 붙어 가슴 쪽 옆구리에 총구를 바짝 댄 상태였다.
“데리고 가.”
지선호는 그대로 끌려갔다.
갑자기 맞은편에서 남자가 경비들에게 둘러싸여 끌려가자 아영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고, 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석민이 몸을 돌려 그쪽을 보았다.
“아, 샤샤!”
그는 알렉산드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난번 일을 생각하면 좀 어색할 만도 한데 석민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김성일에 관한 정보를 준 덕분에 추가적인 신뢰를 얻은 것이리라 알렉산드라는 판단했다.
‘뭐, 다행이긴 한데.’
석민의 시선이 찰나의 순간 알렉산드라의 위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알렉산드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남자들이란.’
석민이 자신과의 관계를 아쉬워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약간 짜증이 났다.
그냥 딱 눈 한번 감고 속아버리지.
‘그러면 요리하기 쉬웠을 텐데.’
알렉산드라는 넉살 좋은 표정으로 자연스레 자리를 차지하려 했는데, 의외로 아영이 직접 의자를 잡아 뒤로 빼주었다.
“어서 와요.”
많이 풀어진 아영이 인사를 건넸다.
아영은 호텔이 마음에 들진 않아도, 필요악임을 인정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자신 또한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없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라가 좀 필요 이상으로 치근덕거리는 여자긴 했지만, 아직 경계할 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고 판단했기에 아영은 약간의 신뢰를 내보인 것이었다.
물론 알렉산드라가 미인계를 쓰다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알렉산드라로서는 자신의 상관에 짜증 났고, 이 상황들이 아쉬웠다.
미인계를 일찍 시도하지 않았다면 이들의 신뢰를 얻고 원하는 정보를 들었을 것이다.
아니 조금만 더 시간을 주었다면 미인계 따윈 하지 않아도….
“오늘은 옷을 평범하게 입었네?”
“흥.”
알렉산드라는 아마색 기다란 코트에 검은색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맨날 추운 옷을 입을 수 없으니깐.”
평소보다 자연스러운 한국말에 아영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알렉산드라가 일부로 조금 어색하게 한국어를 했다는 걸 아영은 알지 못했다.
“피부 관리를 하려면 추운 게 히터 밑에 있는 것보다 나으니까.”
실제로 그녀는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그것은 겨울용이 아닌 가을이나 초겨울에 입는 얇은 코트였다.
“그런가?”
석민은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새 잔을 구해서 그녀에게 맥주를 따라 주었다.
“피부 관리 할 거면 분으로 떡칠하지 말아야지.”
재민한 알렉산드라는 석민이 화장 떡칠한 여잘 별로 선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맥주만 한 모금 머금으며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다들 신나 보이네?”
“어, 조금 어렵게 되었지만, 일이 잘 풀렸거든.”
석민은 맥주잔을 기울였다.
아영 또한 석민이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닌 걸 알기에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잘 풀렸다니 다행이네. 혹시 뭐 얻은 거 있으면 잘 쳐줄게.”
“그러면 나야 좋지.”
많이 풀어진 이들의 모습을 보며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단 말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일이 잘되었다니 나도 기쁘네.”
그녀는 반복적으로 말하며 종업원이 가지고 온 독주를 직접 받아 봉인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잘 풀렸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다만 코끝에서 느껴지는 화약이나 흙먼지 냄새, 차가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 교전과 추위로 제법 고생했단 걸 추론했다.
얼굴 표정도 보면 많이 나른한 것 같았다.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라면 충분히 다시 관계를 구축하고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긴 그녀는, 오늘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알렉산드라는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고 추가적으로 술과 안주를 더 시켰다.
“이건 뭐야?”
석민은 새로 나온 꼬치구이를 보며 물었다.
“양간이야. 아주 맛있어.”
양간을 먹어 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양고기와는 또 다른 진한 고기 향에 아주 부드러운 맛이었다.
그 맛에 반한 두 사람은 평소보다 더 먹고 마셨다.
대략 2시간이 지난 후, 석민과 아영은 기분 좋은 얼굴로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돌려 경비들을 불렀다.
“아까 잡은 사람, 어디 갔어?”
“심문실에 가둬놓았습니다.”
“그래?”
그녀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석민과 아영이 간 방향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심문하지.”
아까 지선호가 행동한 것을 보건데 석민과 아영에게 당한 헌터팀이라 여긴 그녀는 정보를 모으기 위해 움직였다.
심문은 오래가지 않았고 고문이나 협박은 별로 없었다.
자포자기했는지 너무 쉽게 술술 불어서 알렉산드라가 놀랄 정도였다. 덕분에 제대로 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심문실에서 나온 그녀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천사라….’
그녀는 서울에 천사라고 불리는 생물체가 UFO마냥 자주 목격된다는 걸 소문으로 들었었다.
그렇지만, 대게 음모론이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 본 이들은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 우연찮게 천사 이야기를 듣게 되자 그녀는 이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소문이나 일방적인 한 명의 주장으로는 교차검증이 부족했다.
그런데, 석민과 아영이 천사와 함께 행동한다?
‘단순하게 한국 정부 쪽의 일을 하면서 뭔가 다른 일을 하려고 했던 건 알았지만.’
그들은 서쪽으로 길을 개척하려고 했다.
헌터들 사냥은 아니다. 아직 그쪽으로 사냥터를 개척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이걸 파서 그들의 원래 목적을 알게 된다면 자국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저 자는 어떻게 할까요?”
경비의 질문에 그녀는 이어가던 생각을 멈췄다.
“조용히 처리해.”
그녀의 말에 경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권총에 소음기를 끼운 채 다시 심문실로 들어갔다.
지독한 배신
교구장 박재만에게서 두께 1센티 정도 되는 정보문서를 받은 박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박재만은 그를 엿 먹이려고 한 것 같았다.
괜히 문서로 출력해서 준 것도 그렇게 몇 개 중요한 정보를 추려낸 것을 확인하니 고작 A4용지에 1장밖에 안 나올 정도로 쓸모없는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명색에 2인자 소리 듣는 양반인데 너무 속이 좁잖아. 종교인 맞아?’
이딴 서류작업에 거의 하루를 소비하자 짜증이 치밀어 골치가 아픈 나머지 뒷머리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잠시 동안 등받이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 눈을 감고 쉰 그는 다시 의욕적으로 추려진 정보를 읽어 나갔다.
피곤함에 서류를 읽는 그의 눈은 핏발로 가득했다.
‘나이는 20 후반에서 30대 초반, 러시아 군장과 무기를 주로 사용, 실력이 아주 좋음, 살인청부업자, 오토바이를 주로 타고 경기도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
대담하게도 이자는 자신을 추격하는 김성일에게 직접 찾아가 살인을 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실시간으로 안 것인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놈이야.’
김성일은 끝내 박재만에게 석민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박선우는 석민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는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컵에 담긴 물을 마시며 박재만이 마련한 도로 CCTV 캡처 사진을 확인했다.
체격이 꽤나 컸고 어디서 본 사람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단검을 사용하는데 페어번 샤익스라.’
그는 석민이 자신에게 선물해주었던 단검과 같은 것임을 알고 좀 신기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