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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오브 서울 128화 (128/226)

[게이트 오브 서울 128화]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잔뜩 달아올라서 갈등하던 그 자신의 모습도 같이 생각나 부끄러웠다.

뭐, 어쨌든 그렇게 어설프니 아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라 봤다.

“왜냐하면….”

그때 석민의 휴대폰이 울렸고, 확인하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양반은 못 되는 알렉산드라가의 전화였다.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고, 상대방이 말하길 기다렸다.

***

-……그래서,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그와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난 것은 아니라 예상합니다. 적어도 그쪽은 제가 진심으로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그날은 정기적인 보고를 하는 날이었다. 서면보고 방식이 아닌 영상통화를 통한 보고가 이뤄졌다.

그녀가 영상통화로 말하는 상대는 러시아 극동 지구 정보 담담자이자, 그녀의 직속상관이었다.

대답하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좋지 못했다.

반응은 당연했다. 알렉산드라가 실패한 미인계에 대한 보고를 하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건 네 생각이겠지. 애초에 미인계라는 것은….

그 여자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것을 본 알렉산드라의 속은 조금씩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자네가 그쪽으론 낙제에 가까웠다는 것은 알았지만, 네가 보내준 영상을 보고서는…. 정말 한심할 정도더군.

그 말에 알렉산드라는 분노와 후회, 그리고 부끄러움 같은 감정이 뒤섞여 솟아올랐으나, 애써 억누르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움츠렸다.

석민의 결정이 옳았다.

석민이 우려하고 의심했던 대로 그녀의 방에는 카메라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고, 모든 대화와 화면이 그들 정보국에 전달된 상태였다.

극동 지구 정보 담당자는 석민과 알렉산드라의 성교영상을 확보하지 못한 걸 너무 아쉬워했다.

그것만큼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을 확실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미인계에 젬병인 알렉산드라에게 무리하게 미인계를 시도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그녀였다.

그녀의 상관은 알렉산드라가 비록 미인계 훈련에서 낙제에 가까웠다지만, 알렉산드라는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라 보았기 때문에 성공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런 변명이나 하다니. 게다가 ‘예상합니다.’라니? 언제부터 보고가 예상한다는 말을 쓰게 되었지? 예상은 우리가 하는 거지 자네가 하는 게 아니야.

석민의 마음을 사지 못한 알렉산드라에 대한 질책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도 할 변명거리가 많았다.

‘상대가 일반인도 아닌데, 군사 훈련도 받은 데다 의심도 많은 사람을 타깃으로 주고는 제대로 된 사교 관계도 쌓기 전에 자꾸 보채니 이런 꼴이 난 거 아닙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현명하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상관이 이번 임무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알렉산드라는 지금 미인계를 사용하면 오히려 석민의 의심을 받을 것이며 자칫 실패했을 땐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했었다. 그러나 상관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애초에 그건 자신의 전문이 아니었고, 상관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접근할 생각이지? 우리는 좀 더 긴밀한 사이가 되길 원하는데.

-거래로 관계를 다시 성립할 생각입니다.

-거래?

-그렇습니다.

-어떻게?

-현재 호텔에서 무기와 탄약을 판매 중인데….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말해나갔고, 상관은 듣다듣다 한숨을 쉬었다.

-단순하게 조력자가 되는 것으론 우리 목적에 부합하진 않을 것 같은데.

-아직 완벽한 정보는 아니지만, 그들은 한국 정부에 완전히 충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남자 쪽은 확실합니다.

-확실한 출처가 있나?

-아직은 확실하다고 말씀은 못 드립니다.

그녀는 저쪽에서 또다시 한숨이 나오기 전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나라들에게 고용된 헌터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진정한 목표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것과 대한민국 정부에서 내린 명령이 서로 상반되게 되면 자기들의 목표를 우선으로 합니다. 남자와 군인인 여자 쪽이 그 일로 서로 옥신각신한 적이 꽤나 많습니다. 관련 자료를 보내드릴까요?

자료라고 해봤자 몰래 녹음한 녹취록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주장의 근거라도 보여주어야 상관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알렉산드라의 기대와 다르게 그녀의 상관은 별로 관심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지. 오늘 중으로 보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통신 종료.

하루 보고가 끝난 직후 알렉산드라는 한숨을 쉬며 헤드셋을 내려놓았다.

사람을 속이는 것이 그녀의 일이긴 하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에 걸리거나 인간쓰레기가 아닌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일 심각하게 고뇌에 빠져 산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상부에서 내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을 것은 자명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었다.

최석민은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을 알면 자기네 나라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는데.’

알렉산드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후에 석민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아마 제대로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석민이라도 다시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다 쳐도 선을 둘 테고 공적인 일로만 말을 걸겠지.

‘개인적으로 무언가 큰 도움이 되어야겠지.’

아니면 그녀가 사적으로 도와준다고 그가 인식하도록 만든다던가.

알렉산드라는 지난번 석민과 있었던 일이 생각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끝까지 석민을 속이긴 했지만, 창피하고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난 이런 건 젬병이야.’

하지만, 상념은 깊지 않았다. 알렉산드라는 석민에게서 얻을 기회를 찾기 위해 생각에 빠졌다.

의외로 기회는 금방 찾아왔고, 1시간 뒤 그녀가 석민에게 전화를 거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의 한

알렉산드라가 석민에게 전화하기 몇 시간 전.

박재만에게서 모든 정보를 받은 김성일은 핏발이 선 눈으로 사진 자료를 주시했다.

사진을 주시한다고 해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는 사진을 뚫어져라 봤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무장들이 아니야.’

김성일은 여자 쪽은 시선도 주지 않고 남자 쪽의 얼굴만 계속 봤다.

방 안은 그가 피운 담배 연기로 자욱해졌고 그는 2시간 가까이 시간을 할애하며 자료들을 살폈다.

김성일은 석민이 쓴 헬멧에 주목했다. 아무리 헌터들이 외국산 헬멧을 쓴다고 하지만, 전면 바이저가 달린 헬멧을 쓰진 않는다.

저것을 만든 러시아도 시가전에서 특정한 일을 때 사용하거나, CQB에서나 사용한다.

하지만, 바이저의 특성상 견착 사격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근래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조준경은 물론이고, 도트사이트조차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대충 지향사격만 가능했다.

레이저 포인트가 있긴 하지만, 적외선도 아니고 사람 눈에 보이는 레이저포인트를 쓰겠는가?

‘바이저가 달린 헬멧을 사용하는 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스마트폰의 확대기능으로 석민의 헬멧 바이저 윗부분을 확인했다. 보수를 해놓았지만, 우그러진 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헌터 짓을 한다고 했지.’

그는 서울로 진입하는 입구들을 전부 확인하면 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서울로 진입하는 입구가 그가 아는 것 혹은 드러난 것 이상으로 많기에 그런 방식으로 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자가 언제 서울에 들어와서 나가는지 알지도 못하니까.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진 않았다.

김성일은 헌터들이나 안전한 거주지를 위한 사업을 하고 있었고, 주변 경쟁자 혹은 협력자들과 친했다. 그리고 서울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과도 연락해 거래도 했다.

그는 휴대폰을 들었고 전화 목록에서 전화번호 하나를 찾아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

“그럼, 도와줄 수 있지.”

알렉산드라는 조금 어눌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이미지 파일을 보내도록 하지.

그 목소리에 기분이 나빠진 알렉산드라는 조금 인상을 썼다

원래 그다지 목소리가 좋지 못한 늙은이였지만, 오늘은 유독 평소보다 목이 걸걸했고 가라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를 확인했다. 찬찬히 살펴보던 눈이 점점 커져갔다.

누가 봐도 사진 속의 인물은 석민이었다.

옷과 장비, 그리고 덩치와 자태를 보건데 이들은 석민과 아영이었다.

그녀는 석민과 아영이 헌터들을 사냥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 정부의 고용된 자들을 제외한 특정 국가나 단체, 기업에 소속된 자들을 사냥한 것을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라의 시선이 주변에 쓰러진 시신들에 향했다. 전에 본 적이 있는 군복들이었다.

‘천국의 문 교단이었나.’

-가운데에 총을 단 남자, 누구인지 알아보겠나?

“어. 잘 아는 사람이지.”

알렉산드라는 이 정보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휴대폰 너머로 김성일의 숨소리가 상당히 거칠어졌다. 그녀의 생각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름, 알려줘?”

-그래.

대답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떨렸다.

“이 정보의 값은 얼마나 줄 수 있지?”

-시발.

잔뜩 흥분하고 있던 김성일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알렉산드라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돈을 탐하는 척해야 유사시 김성일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이 밑밥은 매우 중요했다.

-미화로 1천 달러를 주지. 미국 놈들이 경제제재를 하고 있어서 요즘 루블화가 많이 내려가지 않았나? 1천 달러면 큰돈이겠지.

그 말에 알렉산드라는 작에 입으로 바람 소리를 내었다.

“뭐, 그렇긴 하지만, 1천 달러는 많이 싸잖아. 게다가 우리 호텔은 절대로 고객의 정보를 팔지 않는다고. 정보를 알려주는 것 자체가 업자로서 고객에 대한 배신이지. 내가 정보를 주는 건 너와의 좋은 거래와 인연이 오래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라고.”

전화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불편함으로 가득했다.

-그래, 얼마를 주면 되지?

“우리 싸. 9천 달러는 받아내야겠어.”

사실 그것도 너무 적은 수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3천 500.

그는 약간 이를 악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부르자 알렉산드라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가격협상을 위해 일부러 낮게 부르는 것이겠지.

그렇다는 것은 어떻게든 돈을 낼 의향은 있다는 것이다.

“8500.”

-4000.

“7000. 이 이하로는 절대로 안 넘길 거야. 대단히 중요한 일이겠지? 예전부터 찾던 사람, 맞지?

그녀는 자세한 정보는 알지 못했지만, 김성일이 예전부터 원수를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김성일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깐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6000, 그 이상은 나도 감당이 안 돼. 좀 깎아줘. 매우 중요한 일이야.

‘이 인간이 이렇게 비굴하게 나오다니.’

알렉산드라는 석민이 무엇을 했기에 김성일이 비굴하게 나올 정도로 원한을 샀는지 궁금해졌다.

“좋아, 그렇다면 그러자.”

-좋아.

알렉산드라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돈이 입금된 것을 확인했다.

“좋아, 녀석의 이름은….”

알렉산드라는 석민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었다.

-다른 하나는?

그렇지만, 그녀는 아영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그녀의 계획에 도움이 될 것이다. 너무 많은 정보를 주면 김성일이 자신의 목적을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다.

“몰라, 이름도 알지 못하지. 둘은 파트너처럼 같이 활동해. 둘 다 상당한 실력자이지. 하지만, 여자 쪽은 정말 모르겠어. 확실한 건 남자처럼 킬러는 아닌 게 분명해.”

‘그렇다면 군인 출신인가보군.’

김성일은 단정 지었다.

-좋아. 정보는 감사하군.

그리고 인사도 없이 김성일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알렉산드라는 그가 상당히 급해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전화를 끊어버린 김성일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최석민, 나이 30살. 실행해.”

부하들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간 직후, 김성일은 다시 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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