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27화]
‘좋아, 차라리 잘됐어.’
박재만은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다. 이런 기가 막힌 우연히 다 있다니, 그로서는 최고의 우군을 얻을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뭐 하는 자식인데 우리는 그렇다 치고, 김성일의 아들까지 건든 거지?’
경기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우정파크빌의 소유자 김성일을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
대외적으론 그는 선한 남자였다.
경기도에서 가장 안전한 가옥을 제공해 주는 남자였으니까.
거기서만큼은 날씨를 제외하고는 예전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물론 뒷세계에선 악명이 자자했다. 그는 아파트 단지의 안전과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 범죄자들에게 악랄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잔인하게 보복하거나 겁을 주었다.
물론 그만큼 적이 많았지만, 그에게 함부로 공격하려거나 하는 자들은 없었다. 심지어 청부업자도 말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을 건드렸다? 생각해보니 간이 큰 놈이긴 했다. 거기에 우리 교단까지 건드렸다.
‘상당한 실력자이긴 하지만, 건든 게 너무 커. 빌어먹을 자식아.’
그는 담배를 물었고, 불을 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연기가 많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어? 불! 불!”
아까 김성일이 휴지통에 던진 담배꽁초가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검시관의 말에 화들짝 놀란 박재만은 불꽃이 올라오는 쓰레기통을 끌려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불을 끌 만한 것은 없었다.
“물 가져와! 물!”
소동은 결국 연기로 인해 화재경보기가 울리고 스프링클러가 작동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
석민과 아영은 베르의 말을 믿기로 했다.
“조금 상의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그 말에 베르는 동의를 표했고 두 사람은 서울에서 빠져나와 자신들의 안전가옥에서 의견을 나누었다.
이것은 그들끼리 결정하기엔 규모가 너무 커 보였다.
베르는 그러니까, 차원의 틈새에 끼어 있는 거대한 방주가 이곳으로 오길 원했다.
그건 국가적인 것을 넘어 범세계적인 문제였다.
아니, 적어도 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을 우리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석민의 생각은 매우 한결같았고 고단수였다.
“그냥, 못 오게 하면 되잖아.”
석민이 말했다.
“저것들이 지들 살겠다고 지금 강제로 들이대는 거잖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없어. 게다가 선발대로 온 놈들은 우리를 식민지로 삼으려고 하질 않나, 그런 것들이 3백만 명이나 더 오면 곤란하지. 딱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꼴 아니야?”
그 말에 아영도 반박할 수 없어 동의의 의미로 가만히 들었다.
그렇지만, 아영이 보기엔 규모가 커도 너무 컸다. 군대에서 그녀의 계급은 고작 대위였다. 나름 팀을 꾸리고 부하들을 책임진 적이 있는 경험자이지만, 300만이나 되는 생명들의 운명을 함부로 결정하기엔 아영의 마음은 그리 담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건 그녀가 독단으로 뭐라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생각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뭔 헛소리를 하는 건가? 석민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물론 석민도 그렇게 냉혈한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그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아니지만, 문명과 문명이 접촉할 때 잡아먹히는 쪽은 미개한 문명이라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저들은, 비록 일부는 인류의 중세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초능력이라던가, 차원이동을 위한 문을 만든다던가, 과학인지 마법인지 알 수 없는 기술을 사용하는 등, 인류보다 매우 진일보되어 있었다.
더구나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종교를 이용해서 천국의 문 교단이 설립되게 만드는 걸 보면 이미 침략의 의지를 충분히 보이고 있었다. 석민은 그들이 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베르는 정복이 아닌 부탁을 통해 이쪽으로 이주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지만, 석민이 보기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크게 양보해서 그들이 살 땅을 나누어 주고 국가를 세우게 한다고 치자. 그들의 인구가 늘어나면 점점 더 큰 땅이 더 필요해질 것이다. 더 많은 토지, 더 많은 자원 등.
분명 나중에 분쟁거리가 될 것이다.
어디 오지 한가운데에 둘 수도 없고, 또 아무리 오지라도 자기네 영토를 뚝 떼어다가 나누어주는 바보 같은 나라가 있겠는가?
게다가 저들은 그의 관점에선 싹수가 노랗기 그지없었다.
멸망을 피해 살려고 도망치는 주제에 이미 우리를 내심 깔보는 습관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갑자기 그 생각이 들자 석민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다 저놈들 때문이다. 저놈들 때문에 서울이 이 꼴이 난 거고, 그의 여동생도 죽고, 집도 잃었고, 혜원도 PTSD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서양인들이 신대륙으로 진출하고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의 문명들과 접촉하면서 무슨 짓을 했던가.
야만인, 혹은 이교도들을 교화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역사에서 얼마나 수많은 일이 기록되었던가.
“마음 독하게 먹어. 그건 안 돼.”
아영은 불만이 많았지만, 석민의 강력한 주장을 막을 수 없었다. 역사의 사례를 근거로 말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논쟁에서 이기겠는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나. 이런 식으로 말을 잘할 줄은 몰랐네.’
석민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아영은 자신의 뜻을 굽힐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 말에 따라줘서 고마워.”
그녀가 뜻을 굽히자, 석민은 만족감을 드러냈지만, 그것은 성급한 판단이었다.
“다만, 조건이 있어요.”
“조건?”
“대통령님께 이야기해요.”
“대통령님께?”
석민이 놀라 되물었다.
“대통령님께 물어서 결정을 내리자고요.”
“진심이야? 우리 지금 천사 못 찾았다고 거짓보고 올렸잖아. 이제 와서?”
“그거 정도는 얼마든지 다시 지어내서 접촉했다고 할 수 있어요.”
아영이 항명하듯이 말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300만의 생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에요.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이성체이고 또….”
그녀는 그들이 인간이 아닌 걸 알고는 있지만, 300만이나 되는 생명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건 두려웠다.
그녀는 학살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필요에 의한 동물도살도 아니었다.
“혹여 그릇된 선택으로 역사나 다른 사람들에게 학살자라는 면류관을 쓰고 싶진 않네요.”
그 말에 석민은 답답함을 느꼈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찍어 누를 만큼 속이 좁진 않았다.
그들은 열기가 지나치게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이야기할까?”
“그러죠. 커피 한 잔?”
“응, 난 티백 3개.”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굳었던 머리도 좀 풀리는 거 같았다. 아영은 다시 깊게 생각을 해보았다.
그들이 커피를 반쯤 마실 무렵 아영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조금 더 은밀하게 말하기 위해 언성을 낮추고, 허리를 숙였다.
“그 천사가 말했잖아요. 드래곤이 하나 더 있다고요. 게다가 우리는 아직 구체적인 사명을 몰라요. 천사를 도와 문을 열어서 방주가 여기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인지, 아니면 닫아버리는 것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어요.”
그녀는 석민이 반박하려고 입을 열려고 하자, 얼른 말을 덧붙였다.
“물론, 석민 씨가 말한 것처럼 제가 보기에도 우리의 사명이 천사를 돕는 건 아니라고 봐요.”
석민이 구체적으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지만, 전체적으로 말한 의견의 맥락은 그것과 같다고 아영은 생각했다. 이는 자신의 의견에 거부감을 가지는 석민의 반발을 누그러트리기 위한 언사였다.
“저는 잠깐 동안 이 모든 시스템과 능력을 저 천사들이 준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었으나, 아닌 것 같아요. 저들이 준 것이었으면 거짓된 전령이라 하지 않았겠지요. 오히려 우리를 이용해 먹기 위해 교단처럼 했겠지요.”
그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결과적으로 우린 거짓된 전령을 찾았고 거짓된 전령은 자기를 도와서 문을 완전하게 열자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일단은 그 말에 따라야 한다고 봐요. 아, 물론 문을 열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따라 행동하자 말이에요. 그 말을 따라 행동하면 예전처럼 다시 무언가 퀘스트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선 일단은 문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데, 저 천사가 도움이 된다면 좋잖아요.”
석민은 베르가 드라니트를 죽일 때 지대한 도움을 준 것을 기억했다.
“그래, 네 의견이 더 우리에게 좋을 것 같네. 하지만, 여전히 대통령에게 말하는 건 아니야.”
대통령은 이들이 이주할 땅을 줄 사람이 아니었고, 자칫 잘못하면 베르만 죽을 터였다.
물론 이건 다른 나라 또한 마찬가지이고.
“게다가 내가 보기엔… 천사가 붙잡히면, 아무래도…. 해부될 것 같단 말이지.”
“그건….”
아영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성현제가 그러리라 생각지 않았지만, 실제로 닥치지 않은 일을 확답할 순 없었다.
아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일단 둘은 천사를 도와 문으로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은 천사와 다르다는 전제하에 천사를 도와서 게이트로 간 다음에 처리하는 것이 좋겠죠?”
그 말에 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들도 결국 사람과 다름이 없어. 총 쏘면 죽어. 신뢰와 우정을 쌓은 후에 뒤통수치면……. 뭐야, 왜 갑자기 웃어.”
“그런 말을 하니까 마치 악당 같아서요.”
그녀가 말을 마치고서 더 크게 웃자 석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영은 석민이 명단에 있던 신성민을 죽이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신성민은 자신의 전우이자, 이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돌연변이화가 된 헌신자 괴수를 안식에 들이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자였고,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이었다.
“장난치지 말고.”
“뭔가 사악한 음모 같잖아요.”
“음모이긴 하지. 사악하진 않지만.”
“하지만, 그 음모를 성공시키려면,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3가지가 있네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바닥의 먼지를 이용해 글자를 써 나갔다.
“첫째는 베르와 전에 처리했던 오르바를 제외하고 7천사와 천국의 문 교단. 이 자들도 게이트로 가서 문을 열고 싶어 하죠. 뭐, 천사들은 자기 동족의 이주와 이곳의 정복이 목적이고, 천국의 문 교단이야 자기들의 구원 신앙과 교리의 실천을 위해서 필사적이겠죠. 둘째는 현 정부. 정부는 대외적으로야 서울 수복을 부르짖지만, 솔직히 거의 수복은 포기했고 이젠 안정적인 드래곤하트 수급이 더 큰 목적이죠.”
아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속이 쓰라린 기분을 느꼈다.
“최소한 정부는 몇 년, 몇 십 년 동안 현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겠죠.”
석민은 그녀가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낸 사람처럼 부끄러워하면서도 슬퍼하는 걸 느꼈다. 그녀는 애초에 정부쪽 사람이고 충직한 군인이니 당연할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마지막 하나는?”
“외국 정부요. 혹은 외부세력.”
석민의 머리로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외국? 왜?”
“외국기업과 국내기업, 외국정부도 드래곤하트를 노리고 있잖아요. 그 치들도 현 상황 유지를 원하겠죠. 나라가 많이 혼란스러워지다 보니까. 그들의 연락소도 많고 정보원도 많아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에 관한 정보를 모았을지도 모르죠. 호텔 말리나도 그런 것 중에 하나일지도 몰라요.”
“하긴, 거긴 대놓고 러시아 냄새가 짙게 배어있긴 하지.”
입으로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석민은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이미 알렉산드라에게 들은 것도 있고, 그녀의 말대로 한다면 그녀와 틀어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미국이나 중국, 일본 같은 다른 나라들에게서 걸린 것은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러시아는요? 알렉산드라는요?”
“걱정할 필요 없어.”
그는 알렉산드라의 미인계 시도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