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22화]
“총 말고도 다른 것을 주문해야 하는데 2배율짜리 소총 도트사이트도 장착해서 줄 수 있나?”
“물론.”
예상했던 것이라 혜원은 바로 입을 열었다.
“그쪽 애들이 만드는 광학기기가 있는데, 가격이 다른 데보단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지. 그런데 왜 굳이 2배율? 가격 좀 신경 쓰는 것 같더니?”
“무배율이 너무 별로니까.”
뭐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 손으론 책상 위에 있던 메모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작은 포켓 주머니에 들어있던 볼펜을 꺼내더니, 고개를 숙여 거래의 상세내역을 쓰기 시작했다.
“입금일은?”
“지금.”
지금 장난하나? 1억을 바로 준다고? 혜원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어 박재만을 보았다.
그에 뒤에 있던 비서가 양복의 안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가죽가방을 쥔 또 다른 남자 하나가 방호문 앞에 섰다.
혜원이 문을 열어주자 남자가 들어와 가죽가방 1개를 창구를 통해 밀어 넣었다.
“가방에 든 돈은 딱 1억이다. 전액 1만 원짜리 돈이야. 미안하지만, 5만 원권은 없어서.”
그녀는 가방을 열어 안에 든 현금을 확인했다.
위조지폐도 아니고 진짜 현금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돈을 확인한 혜원은 안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박재만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거래성립. 난 재깍재깍 현금 주는 남자가 가장 좋더라.”
물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는 그녀의 허전한 마음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그런 남자였다.
오늘 아침에 다시 서울로 갔지만, 그가 없으니 또 허전했다. 여튼 큰돈이 생겼으니 그녀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다음에 돌아오면 반나절은 당구치고, 중국집에 가서 같이 반주하며 배부르게 먹어야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박재만은 나머지 군수품을 어디서 얻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최대한 아는 곳을 통해 무기 수매를 했지만, 아무리 박박 긁어모아도 그가 원하는 양의 절반도 모으지 못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해.’
상심에 빠진 그는 무언가 새로운 방법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돈이 있어도 구매가 불가능한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
천사가 국어사전을 읽게 된 이후로 석민이 직접 나서서 천사를 가르치는 일은 없었다.
천사는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혼자서 속독하며 알아서 배워나갔다. 종종 글을 읽으면서 중얼거리듯이 입을 웅얼거리기도 했지만,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처음엔 석민과 아영이 천사가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봤으니, 몇 시간씩 이어지자 아영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고, 하릴없던 석민은 탄창에서 탄환을 전부 빼내 탄피를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을 죽이기엔 너무나도 짧은 일이었다.
재생탄은 닦아봤자 황동처럼 반짝이지도 않았고, 신형탄환은 닦을 필요가 거의 없었다. 단지 탄피 하나하나 잡아보고 알림글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고작 3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기다리는 것은 익숙했지만, 이번만큼은 지루했다. 타깃이 나타날 때까지 긴장하며 스코프를 들여다보거나, 쉬는 날 하염없이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보는 것과는 다른 지루함에 그는 하품을 했다.
그는 소파에 앉았다.
아영은 이 일을 예견했는지 외장 배터리도 3개나 준비하는 철저함과 함께 스마트폰 속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심지어 휴대폰 속에 웹소설까지 다운받아 온 것 같았다.
‘젠장, 스마트폰도 없는데 하루 종일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가?’
그는 지독하게 외톨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는 베란다 쪽 창가에 은, 엄폐를 한 직후 밖을 관찰했다. 밖은 함박눈과 함께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치 눈 폭풍 같았다.
그래도 단열이 잘 되는 덕분에 집안은 그리 춥지 않았다. 간간이 괴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지루함을 없애지 못했다.
곧 졸음이 그를 덮쳐왔고, 그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이내 양해를 구하고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석민이 다시 눈을 떠 시간을 확인했을 땐 대략 3시간이 흘러있었다.
천사는 여전히 국어사전을 보고 있었다.
‘천사는 잠이 없는 건가?’
몇 시간째 같은 자리에 똑같은 자세로 앉은 채 있는데, 하품을 하거나 지루해 하는 흔적이 없었다. 엄청난 집중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저걸 읽고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건가.’
보통 인간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래도 저건 천사니까, 가능할지도 모른다.
천사의 공부는 밤이 되고 그들이 밥을 먹을 무렵에도 계속되었다.
“식량과 물은 얼마나 남았어?”
고체 알코올로 물을 데워 홍차를 끓이며 그가 물었다.
“천사가 밥을 먹을 줄 알고 좀 무리해서 챙겨왔었는데, 밥을 먹지 않으니까요. 아껴 먹는다면 못 해도 20일은 챙겨먹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럼 식량은 충분한 거네.”
못해도 10일은 있을 줄 알았는데, 천사가 먹지 않으니 예상보다 많이 남았다.
“그러면…….”
“나도.”
석민의 말을 자른 것은 아영이 아니었다.
아까 들었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천사였다. 천사는 석민과 아영이 마시려고 했던 홍차를 보고 있었다.
즉시 새로운 컵이 나왔고, 석민은 진하고 뜨거운 다즐링을 천사에게 건네주었다.
천사는 천천히 컵을 건네받고는 킁킁거리며 홍차 특유의 은은한 향을 음미했다. 그러더니 와인잔 흔드는 것 마냥 천천히 원형으로 흔들다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그걸 마셨다.
침묵이 감돌았다. 천사는 마음에 드는지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매력과 기품 있어 보였다.
천사는 홍차를 식히듯 입으로 몇 번 불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즉시 새로운 홍차가 컵에 따라졌고, 이런 사소한 일에 조금씩 신뢰와 우정이 생겨났다. 때론 거창한 일보다 이런 것에 더 마음이 통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그 뒤로 천사는 석민과 아영이 밥을 먹을 때마다 천사는 차를 요구했다. 석민은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를 대접하기도 했지만, 천사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종교인들이 알면, 천사는 커피를 싫어하니 종교적인 이유로 커피를 안 먹지 않을까?”
그 바보 같은 질문에 아영은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큼 그들은 지루하면서도, 안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석민과 아영은 혹시나 해서 다른 음식을 권해보았지만, 천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제스처는 어디서 배운 거지?
석민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3일이 흘렀고 배터리가 다 된 아영은 가져온 체스를 꺼내 들었다. 천사는 여전히 국어사전을 읽었다.
그리고 3일째 저녁 9시가 될 무렵, 천사는 책을 덮었다. 한참 체스를 두며 다음 수를 어떻게 둬야 할까에 빠져있던 석민과 아영이 그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다 읽었다.”
그녀의 입에서 제대로 된 한국말이 나왔다.
“드디어 너희들의 말이 조금 이해가 되는구나.”
[천사 베르와 만났습니다.]
두 사람 앞에 새로운 알림글이 떠올랐다. 석민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천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책을 읽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겨우 국어사전을 읽은 것 가지고 깨달았다고?
“…세상에.”
아영이 중얼거렸다.
천사가 말하기 전엔 단순히 덩치 큰 괴수에 불과했던 존재가, 입을 열자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존재로서 다가왔다.
단순히 자‧모음 조금 가르치고, 국어사전을 주었을 뿐인데 저렇게 완벽하게 한국어를 구사한다니.
침묵이 감돌았다. 천사와 그들은 서로를 바라만 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뭘 이야기하려나.’
석민은 바짝 긴장했다.
‘우리가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건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신이 보낸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눈앞에 기회가 생기자 목구멍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영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말을 걸 용기가 없었다. 이것은 미지에 관한 두려움과 비슷했다. 그들이 먼저 말을 못 걸고 있을 때 천사가 손을 내밀었다.
“백과사전.”
“뭐?”
혹시 뭘 잘못 알고 있는 건가? 그들은 그리 생각했다. 여기서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아니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었다. 석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라고?”
“백과사전이 필요하다. 너희와 좀 더 대화하려면 이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지금도 충분한 것 같은데.”
“아니다. 필요하다.”
그 말은 즉 그들이 다시 서울 밖으로 나가서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씨….”
“그런 것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았는데? 무슨 의미냐?”
다시 국어사전을 펼치는 천사의 모습에 석민은 진짜 다시 서울 밖으로 나갔다와야 한다는 현실에 머리를 싸맸다.
***
공부는 끊임이 없었고 천사는 자기가 공부를 마치기 전까지 그들과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석민이 천사가 원하는 책을 옮겨주자, 진짜 책만 읽었다.
“그래서 말도 못 걸었어.”
“흥흥.”
혜원은 대답하는 대신 당구봉를 당겨서 그대로 부드럽게 찔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야기를 대충 지어내고 있다는 건 여자의 촉으로 알 수 있었다.
‘지어낼 거면 조금 성의를 보이던가. 이건 너무한데.’
그녀의 노란색 공이 굴러가 두 개의 빨강 공들을 툭툭 건들었다. 석민은 인상을 찌푸렸고 혜원은 좀 더 콧노래를 높였다.
“56점.”
“이런 젠장.”
석민은 당구봉을 내던지고 싶었다. 이제까지 당구봉을 사용한 게 딱 한 번이 다였기 때문이었다.
당구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즐길 정도는 됐다. 그리고 처음에 혜원과 당구장에 왔을 땐, 그녀가 이렇게 잘 치진 않았었다.
그래서 서로 좋은 승부가 되리라 생각한 석민은 그녀가 내건 점심 내기를 흔쾌히 수락했었다.
설마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건만, 혜원은 석민을 한참 뛰어넘었다. 그가 겨우 4점 낼 때 그녀는 단번에 56점을 냈으니까. 그렇다고 반칙을 한 것도 아니었다.
승부욕이 강한 석민의 속이 불붙인 파이프 끝처럼 타들어 갔다. 석민은 말없이 그녀가 당구봉을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담배만 피워댔다. 때문에 당구장 알바가 그를 구시대의 증기기관차로 본다는 사실도 모른 채.
60평쯤 되는 지하 당구장엔 석민과 혜원, 그리고 20대 초반의 친구들 무리로 보이는 남자 6명이 전부였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담배를 문 이들이 있었으나, 석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연기를 뿜었다.
연속으로 피워댄 담배 때문에 파이프가 너무 뜨거워지자, 석민은 파이프를 점수판이 놓인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 잠깐만! 세리 레일, 즉 쿠션에 붙여놓고 연속으로 득점하는 것.
는 인간적으로 아니지!”
“닥쳐! 승부는 냉정한 법이야! 꼬우면 너도 그렇게 하던가.”
그들은 자장면 내기를 한 상태였다. 그녀는 치사하게 87점까지 올린 후 자신의 공을 빨간 공에 아주 가까이 붙였다.
“떡 =프로즌, 수구가 목적구나 상대방의 수구에 틈새가 보이지 않게 붙어있는 경우.
으로 맞고 싶냐.”
“헤헷!”
그 말에 혜원은 혀를 살짝 내밀면서 윙크를 했다. 평상시라면 이쁘고 사랑스러웠겠지만, 지금은 그의 성질을 올릴 뿐이었다.
‘오늘따라 아주 신났어.’
당구를 치자고 조른 것도 그녀였고, 신이 난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근래에 매우 많이 들떠 보였다.
뭐,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맨날 집에서 틀어박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신났으리라. 저렇게 좋아하는….
“이런 젠장!”
잡생각을 하니 결국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는 결국 점수를 2점밖에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