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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오브 서울 121화 (121/226)

[게이트 오브 서울 121화]

전조

이틀 뒤 석민과 아영은 아파트 단지로 돌아왔다.

“며칠이나 지났는데 어디론가 가지 않았을까요?”

“글쎄, 아니라고 봐,”

아영의 말을 들은 석민은 피식 웃었다. 그는 천사가 떠나지 않았으리라 자신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 천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들이 이곳을 떠났을 때 자세 그대로,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설마 저러고 이틀 동안 있었던 건 아니겠지?

석민은 다 식어버린 음식을 흘끗 보았다. 혹여 천사가 배고플까봐 따뜻하게 데워서 그릇에다가 담아놓은 음식과 물이었다. 하지만 천사가 손댄 흔적은 없었다.

‘그럼 내 예상이 맞는 건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천사는 입을 통해서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자신들에게 용건이 있어 보였다.

“좋아. 그러면.”

석민은 비장한 얼굴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것들을 꺼냈다.

천사를 치료할 전문 의약품과 서점에서 구해온 어린이용 한글책이었다.

귀여운 그림들이 그려진 어린이 책이 나오자 천사는 흥미로운 얼굴로 그것을 살폈으나, 니트릴 장갑을 끼던 아영의 표정은 영 못마땅했다.

“그런데, 한글 가르쳐 본 적 있어요?”

“예전에 내 여동생에게 가르친 적 있지. 나이 차이가 제법 났거든.”

아영은 석민의 대답에 눈썹만 살짝 까딱이고는 치료 도구를 꺼내서 천사에게 다가갔다.

그것을 본 천사가 도구를 보고 바로 이해했는지 자신의 흉갑을 벗었다. 그리스인들이 입을 것 같은 나풀거리는 옷에 살짝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아영은 천사의 옷을 들쳐서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피는 멎었네요. 게다가… 상당히 잘 아물었구요.”

그녀는 원래 상처가 이렇게 빨리 아무는 건가? 라 생각하며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상처를 치료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추위에 상처가 괴저로 썩을 일도 없을 겁니다.”

아영이 알코올을 묻힌 솜으로 환부를 닦자 따가운지 천사가 움찔거리며 미간에 주름을 그렸다.

그러나 아영은 멈추지 않고 환부를 마저 닦은 후 거즈로 상처를 덮었다.

“다 끝났어요.”

“좋아.”

아영이 거즈를 고정하고 상처를 살피느라 구부렸던 몸을 펴자, 석민이 책을 들고서 천사에게 다가갔다.

아영은 의료도구를 정리한 뒤 마루의 소파에 앉아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천사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보았다.

석민은 ㄱ자를 천사에게 보여주었다.

“기역.”

천사는 그림책을 빤히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석민이 무엇을 말하는지 못 알아들은 게 분명하나, 이 상황을 꺼리는 것 같진 않았다.

“기역.”

다시 한 번 석민의 단호한 음성이 천사의 귀에 박혔다. 천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이가 진주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다 뽑아서 어디에 팔아버리면 돈 좀 되지 않을까?’

같은 헛생각이 들 정도로 보석처럼 보였다.

“ㄱ…….”

옥이 굴러간다는 목소리가 이와 같지 않을까.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석민과 아영의 시선이 천사에게 집중되었다.

천사는 아이가 처음 엄마를 뱉어낼 때처럼 안 되는 발음을 내기 위해 입술을 들썩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ㄱ… 기…역.”

“기역.”

“기, 역.”

석민이 다시 입을 열었고 천사는 좀 전보다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오! 말했어!”

석민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마치 제 자식이 첫말을 하는 것을 지켜본 아버지만큼 좋아했다. 아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사람과 한 천사를 번갈아 보았다.

“침묵 수행하는 수도사나 스님같이 말도 안 하더니 역시 입이 있으니 말할 수 있구만.”

그는 ㄴ자를 펼쳤고 다시금 읊었다.

“니은.”

“니……은.”

아까와 다르게 바로 말이 나왔다. 한 번 득도하는 것 같더니 쭉쭉 나가는 것 같았다.

“잘하네.”

그냥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얼마 안 가 사실이 되어갔다. 처음에 자음과 모음을 읽어주었고 그 둘을 합쳐 간단한 단어, 가령 바다, 산, 나무, 물 같은 단어 위주로 알려주었다.

천사는 석민이 읽어주는 단어를 빠르게 습득했다. 그것은 한 번 읽을 때마다 그 단어를 완전히 기억했고 바로 응용했다.

“책.”

천사가 방금 배운 단어를 이용해 손가락으로 석민이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책.”

“책, 큰 책.”

“음? 큰 책?”

석민은 그런 말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역시 저 덩치에 비해 내가 가진 책이 작아서 그런 건가?

“더 큰 단어. 큰 말.”

“더 큰 단어?”

천사는 손을 펼쳐 보이고 날갯짓 하는 것 마냥 파닥거렸다.

“더 큰 단어.”

상상력이 빈곤한 석민이 이해하지 못하고 헤매자 아영이 나섰다.

“더 많은 단어가 있는 책을 원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더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국어사전을 꺼내 들었다. 과거 국회에서 발간한 대국어사전으로 상당히 크고 두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석민이 챙긴 게 아니었다.

“아니, 벌써 그걸?”

“혹시나 해서 챙긴 건데, 지금 하는 걸 봐선 이걸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영이 천사에게 책을 내밀자, 천사는 넘겨받아 책을 열었다. 몸집도 크고, 손도 커서 그런지 책을 망가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천사는 사전을 천천히, 하나씩 읽어나갔다.

매우 어설프고 이상한 말투였으나, 머지않아 곧 또렷하고 명확한 발음으로 변해갔다.

***

“한 달 안에 1,000정?”

혜원은 오랜만에 대규모로 물건을 발주하는 손님을 맞이했다.

처음 보는 손님은 아니었고 전에 몇 번 본 적 있는, 조금 투실투실한 남자였다.

대량 발주를 넣어주니 고마운 손님이긴 한데, 남자의 주문 양이 혼자 일하는 영세업자(?)인 혜원이 혼자 처리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양이었다.

아니, 그녀도 3자릿수의 물건까진 취급하지만 그 또한 200을 넘기지 않았으며, 무리를 한들 4자릿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이 미친놈이 진지하게 들어줬더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혜원의 양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야비하게 생겼으나, 작은 눈은 생각보다 예리했고 무기들을 보는 시선도 남달랐으며 지적 또한 비범했다. 만만하게 봤던 혜원은 그가 다녀갈 때마다 약간 긴장한 채 사업 이야기를 나눴는데, 생각 이상으로 큰 수량의 주문에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였다.

“준비할 수 있나?”

초면부터 반말이지만, 혜원은 신경 쓰지 않고 평소대로 그녀도 반말했다.

“1000정은 불가능한데.”

그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박재만은 팍 인상을 썼다.

“최대한 많은 수를 마련한다면?”

“최대 200, 그 이상은 안 돼.”

“북한제라도 괜찮은데, 수량을 더 늘릴 순 없나?”

“이쪽은 북한제 같은 거 취급 안 하는데? 아니 원래 있긴 했지만, 대부분 팔렸어. 정품을 추구한다고. 가격이 비싸.”

“정품 중에 가장 싼 게…….”

그녀는 눈을 굴렸다. 돈 계산을 해봐야 했다. 되도록 대량 발주를 할 수 있으면서 가격을 싸게, 북한제보단 괜찮은 것.

“벨라루스제. 1정당 200만 원.”

“200만 원?”

200만 원이란 말에 박재만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그의 인상이 더 구려 보였다. 혜원은 담배를 문 채, ‘저건 손님이다.’를 되뇌며 어정쩡하게 비즈니스 미소를 유지했다.

“중국제가 더 싸지 않나?”

그 말에 혜원은 고개를 저었다.

“중국제는 취급 안 해. 그네들 거사고 싶으면 다른 데 가는 게 나을 거야. 뭐 나름 괜찮게 만들긴 하지만, 그쪽 업자들에게 당한 게 많아서 수입 안 해. 노린코 같은 기업에 주문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놈들은 공식적으로 한국에 안 판다고.”

박재만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이거, 예산을 초과할 것 같은데.”

제 딴에는 작게 말했지만, 혜원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가격도 싸고 성능도 나쁘지 않고. 뭐, 북한제, 중국제보다 좋다고 말을 수 있어.”

“어차피 쏘면 뒤지는 게 사람인데, 뭘 그런 걸 따져. 제길.”

‘아니거든.’

혜원은 속으로 그 남자를 비웃으며 연기를 뿜었다.

그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박재만이 상당히 구석으로 몰려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많은 무기를 구매하는 것도 보면 뭔가 크게 잘못되었거나, 강제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어서 하는 거겠지.’

저렇게 많은 양을 주문할 만한 업자는 그녀가 알기론 전혀 없었다. 그렇다는 건 반대로 업자들에겐 개호구 잡았다는 뜻이었다.

‘가격 좀 더 올릴 걸 그랬나?’

박재만이 아무런 말을 못 하자, 박재만의 뒤에 있던 비서가 입을 열었다.

“이미 어느 정도 확보한 게 있으니 하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교단 내에서 북한제 무기의 성능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아직 교주님께 보고가 되진 않았지만, 괜히 교주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집니다. 지금은 자금을 아낄 때가 아닙니다.”

‘지당하신 말씀.’

혜원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반박할 거리가 없자, 결국 박재만이 다시 혜원에게 입을 열었다.

“벨라루스제는 성능 괜찮나?”

“아주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쁘지는 않아.”

“견본을 볼 수 있을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혜원이 안으로 들어가 AK-74 소총을 꺼내왔다.

오래된 가목식 손잡이와 개머리판이 달린 것으로 벨라루스가 신형 소총으로 대체하면서 해외에 싼값으로 팔아치운 놈이었다.

박재만은 그것을 들고서 조정간을 만져보고 장전손잡이도 당겨보았다.

“민수용이 아니라서 단발사격 말고도 연발이 가능하지.”

박재만의 눈이 살짝 이채를 띠는가 싶더니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중고 아냐? 딱 봐도 오래됐구만.”

어디서 그런 뻔한 수작을……. 어떻게든 가격을 깎겠다는 저 노력은 가상하지만, 혜원도 이쪽 사업을 한 지 오래되었다.

“중고라기보단 치장물품이지. 잘 봐봐, 기스가 있나. 혹은 총열에 화약 냄새가 나나. 오래된 총 특유의 손때도 안 묻어 있잖아.”

그녀의 말대로 오래되고 많이 사용한 총은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기름이나 땀 때문에 나무 부분이 검게 변색되었지만, 그녀가 보여준 총은 그렇지 않았다.

오래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잔 기스라든가, 화약 냄새는 나질 않았다.

“흠.”

그 말에 납득이 가는지 남자가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조금만 더 공세를 가하면 이 남자는 넘어올 것이다.

“확실한 신품이야. 거기에 사이드 레일도 기본으로 달려 있어서 광학장비 다는데 유리하다고.”

혜원은 왼손에 턱을 기댄 채, 초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상당히 큰 거래였다.

총가격도 가격이지만 총만 사겠는가? 덤으로 탄창과 탄약도 사갈 것이다.

사이드 레일이 달려있으니 광학장비를 살지도 모른다.

그러면, 꽤나 엄청난 돈을 좀 만져보게 될 것이다. 물론 인플레이션 때문에 생각보다 큰 목돈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뭐가 돼도 거래가 무산되는 것보단 나으니까.

“좋아, 세부적인 사항 좀 논해볼까?”

‘됐어!’

이 남자는 넘어갔다. 혜원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선금부터. 총값의 절반은 줘야겠어.”

“1억을? 현찰로?”

박재만이 놀라하자 혜원의 입에 물린 담배가 콱 찌그러졌다. 박재만의 뒤에 있던 비서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보통 물건값의 2할이나 3할을 선금으로 받는 게 이쪽의 관례이긴 하지만, 이번처럼 거래가 클 때는 절반의 비율을 받기도 했다.

“당연하지. 뭘 그리 놀래? 물건은 확실히 보낼 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애초에 여길 찾아왔다는 것은 신뢰가 있어서 아니야? 손님 가려 받는 가게에 어떻게든 연락해서 거래하자고 한 건 당신들이잖아.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라고. 그리고 내가 그렇게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거든? 벨라루스에 있는 딜러에게 연락해서 주문하고 세관은 당연히 피해야 할 테니 그 뒷구멍으로 쑤셔 넣을 돈도 필요한데, 그 정도 있어야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그 말에 박재만과 비서가 서로를 쳐다보더니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고, 박재만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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