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96화]
그는 자신의 짐가방에서 RPG 탄두를 꺼냈다.
혜원에게서 산 러시아제 정품으로, 지난번처럼 불량이 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대전차탄두 2발과 열압력탄두 3발을 챙겨서 갈 생각이었다. 거기다 이번에는 SVDK도 챙길 생각이지만, 이게 드래곤에게 통할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그냥 가장 화력이 좋은 것을 챙긴 것뿐이었다.
이런 것으로 드래곤에게 흠집이라도 줄 수 있을까? 석민은 의문이 들었지만, 이것 말고는 가진 것이 없었다.
아영은 안전가옥 밖을 보았다. 시간은 저녁 6시, 이미 밖은 어두워진 된 상태였다.
“내일 새벽에 출발해서 바로 경원 씨와 합류하죠.”
그 말에 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가자. 가서 호텔 말리나에서 대기한 다음에 출발하는 게 나을 거야.”
아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지? 갑자기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왜?”
“그 호텔에 가는 것을 좋아하시는군요.”
가시 돋친 말에 그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 왜 그래? 거기 말고 지금 따뜻하고 안전한 곳이 없잖아.”
“그리고 술과 여자도 있죠.”
그 말에 석민이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었나 싶은 생각과, 혜원이 떠올라서 더 불쾌했다.
“너도 알잖아. 난 그곳에서 여잘 산 적이 없어.”
“그래요? 그 외국인 여자는 꽤나 눈에서 하트를 보내는 것 같던데요.”
아, 알렉산드라를 말하는 건가? 석민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여자가 노골적으로 가까이 접근하긴 했었지. 그렇지만, 그걸 이 여자가 뭐라 할 이유는 없잖아.’
굳이 그런 소릴 자신에게 할 만한 사람이라면 혜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리 동료 사이라 해도 이런 발언은 조금 도가 지나친 간섭이 아닌가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노골적인 유혹에 넘어갈 리가 있나? 백인에 금발에 예쁜 여자가 대놓고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의심이 들지 않아? 세상에 어떻게 그런 여자가 쉬이 자신을 유혹하리라 생각하겠어. 내 외모가 그렇게 출중한 것도 아닌데.”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라고 아영이 대답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외모이야기를 꺼낼 때 석민의 얼굴이 심각하게 우울해졌기 때문이었다.
아영은 그와 많은 호흡을 맞춰왔고, 같은 경험과 고생을 쌓아와서인지, 전우애가 쌓여서 그런지 여하튼 그의 외모가 그리 나쁘다 생각지 않았다.
“아, 알겠어요. 농담이었어요.”
그녀는 괜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으로 농담하지 마. 우리 사명을 잊지 말라고. 난 그저 가장 편한 걸 생각한 것뿐이야.”
석민은 엄숙하게 주의를 주었다.
“일이나 마저 하죠.”
아영이 말했다. 그들이 뜯어보지 못한 상자가 아직 많았다. 그것 대부분은 경원의 아버지를 위한 물품들이었다.
***
…라고 아영에게 석민이 말하긴 했지만, 그날따라 알렉산드라 더 매력적으로 보이긴 했다.
방을 잡고 객실로 내려가던 그들과, 마침 자신의 전용 객실에서 나오던 알렉산드라가 마주친 것이다.
그녀는 평소의 진하던 화장 대신, 맨얼굴에 가까운 상태였다. 머리도 바짝 올린 대신, 하나로 질끈 묶은 게 다였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뭐야? 이 시간에? 밤중에 서울을 뚫고 온 거야?”
완벽하진 않지만, 유창한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밤중에 석민의 방문에 크게 놀란 듯싶었다.
“조금 있으면 잘 시간인가 봐? 웬일로 화장도 안 했네?”
그녀는 스판제 청바지에 그 위에 검은색 면티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잠이 싹 달아났네. 술 한 잔?”
그녀는 손을 딱 술잔 꺾는 자세를 취하더니 혀를 튕기면서 윙크를 했다.
‘다른 일 아니었으면, 한잔했겠지만….’
그가 갈등하는 순간 알렉산드라는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살게.”
“그러면 좋지.”
“그쪽도?”
그 순간 표정이 굳은 아영에게 알렉산드라는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똑같이 술을 권해왔다.
“……그러죠.”
“그럼 기다리지.”
그녀가 사라지고 객실로 들어간 아영이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나요? 내일 새벽에 간다고 해놓고 그러시는 건 좀….”
“그 여자가 가진 전투드론이 필요해. 그 드래곤이 터널까지 따라 올 수도 있잖아. 그럴 경우 그 드론의 엄호가 필요해. 항상 최악의 상황은 대비해야지. 그리고 공짜 술도 좋고.”
“예? 그렇지만….”
“우리는 숙취가 없잖아.”
그들은 활력 스탯 덕분에 숙취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이 이상 활력 스탯을 올리면 술이 아니라 맹물 마신 기분이 들까봐 걱정될 지경이었다.
석민의 설득에 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거기다 석민보다 활력 스탯이 한 단계 더 높은 아영은 숙취가 아예 없었다.
“뭐 그러죠. 저도 공짜 술 좋아합니다.”
“그리고 양고기도 좋아하지. 지난번에 4접시나 먹었지? 그램으로 몇 그램이더라? 900그램인가? 1kg인가?”
“그렇게 많이 안 먹었어요.”
아영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지만, 석민은 믿지 않았다. 그녀의 식성은 석민만큼 매우 뛰어났다. 어찌 보면 그만큼 많이 활동을 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우리는 움직이는 것에 비하면 아주 적게 먹는 편이지. 게다가 오밤중에 추위를 뚫고 이 짐들을 챙겨왔다고. 고기에 술 한 잔 정도는 해야지.”
석민은 개구쟁이처럼 짓궂게 웃었다.
***
“그래, 드론으로 엄허를 해달라는 거지?”
알렉산드라는 석민의 잔에 보드카를 따라주며 물었다.
술을 따라 준 그녀는 그윽한 눈길로 양갈비 뼈를 쪽쪽 빨아먹으며 조금 굶주린 늑대마냥 아쉬운 얼굴로 빈 꼬치들을 보는 아영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술보단 양고기에 관심이 많았고 그 덕분에 술자리라기보단 식사자리처럼 보였다.
“엄허가 아니라 엄호.”
“엄호, 그래 알겠어. 음식이 입에 맞았나 보네? 홍차 한 잔?”
그녀가 홍차 주전자를 들자 아영은 잔을 내밀었다.
“사양 안 하겠습니다.”
홍차를 따라준 뒤 알렉산드라는 양고기 기름으로 촉촉해진 입술을 냅킨으로 닦은 후 본론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우리 호텔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들면 안 돼.”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괴수로부터 인간의 편을 들어주면 되는 거야.”
“우리는 괴수들로부터 편을 들어주고 있어. 그거면 되는 거야. 뭔가 특별한 것을 원한다면….”
“전에 도와준 것도 있잖아. 교단 놈들로부터 말이지. 드론 하나만 우리를 위해서 쓰게 해줘.”
그 말에 알렉산드라는 인상을 쓰며 석민을 보았다.
“겨우 그 정도로는…….”
“그렇게 되면 내가 너에게 빚을 지게 되는 거지.”
“그래 써.”
그 말에 알렉산드라는 냉큼 대답했다. 너무 빠른 태세전환에 석민은 눈을 가늘게 떠 그녀를 쳐다봤다. 내심 괜히 말했나 싶어 후회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 정도였다.
“내 빚 갚는 방식이 조금 고달플 텐데?”
“사람 구하는 일이라서 그 정도쯤은.”
⌜얼씨구 성인군자 납셨네.⌟
러시아어로 된 빈정거림은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에 끊어졌다.
갑자기 들린 쾅 소리와 함께 술잔이 넘어지고 그릇들이 흔들렸다. 알렉산드라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주변의 다른 손님들도 대화를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고, 보안을 서던 경비병들은 mp5 기관단총을 석민의 머리에 조준하고 있었다.
⌜입 조심해, 샤샤.⌟
석민은 의자에서 몸을 떼 알렉산드라 가까이 다가가 검지손가락으로 그녀에게 손짓하며 나지막하지만 위압을 걸듯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 조심하라고.⌟
알렉산드라의 확장된 동공에 석민의 한없이 진지하고 단호한 표정이 새겨졌다.
“손들어!”
“아니야, 됐어. 괜찮아. 이건 내가 잘못한 거야.”
알렉산드라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경기병을 제지시켰다. 경비병은 바로 자리를 뜨지 않은 채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한 번 더 손짓을 보내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바짝 긴장하던 아영도 긴장을 풀었다.
⌜그래, 다음부턴 주의할게. 근데 너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
여긴 내 구역이라고.
놀란 듯했지만, 이곳에서 대답하게 장사하는 여자처럼 끝까지 지지 않고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석민은 한쪽 입 꼬리만 올리고 서 웃어 보이고는 몸을 다시 의자에 기댔다.
“그러면 거래는 성립되는 거겠지?”
“그래.”
“좋아.”
석민이 넘어진 보드카 잔에 술을 따라 알렉산드라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녀도 석민에게 잔을 넘겨 술을 따라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머릿속으로 석민이 갑자기 왜 이런 행동을 보였는지 생각하느라 복잡했다.
‘평소 이 정도 농담에 화낼 인간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킬러 주제에 사람구하는 일을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왜 화를 내는 거지?’
석민은 서울 출신이었다. 그리고 가족을 잃었다. 자신은 내색하지 않아도, 그 부자가 석민의 마음 한구석을 자극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렉산드라가 알았다 해도, 그가 왜 화냈는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서울 출신에 가족을 잃지 않은 자가 없었다. 거기다 그는 킬러이다. 누군가의 가족을 죽이는 사람이 이제 와서 효자 한 명 봤다고, 그를 구한다고 난리 치는 게 더 이상한 세상이었다.
그녀는 잘못해서 그와의 관계가 비틀리는 게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뭐 너무 좋게 보일 필요는 없겠지. 빚을 지게 만들었으니까 이것만 있어도 충분해.’
그녀는 돌아서 나가는 석민과 아영의 뒷모습을 굶주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
석민은 전동자전거를 다시금 보게 되었다. 정말로 빨랐고, 조용했다. 모터의 진동이나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아서, 오직 바퀴가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덕분에 다리와 터널을 지나는 데 매우 수월했다.
“역시 걷는 것보단 났죠?”
“그래, 하지만, 굳이 단점을 지적하자면 너무 춥네.”
차가운 슬러시를 급히 들이마신 것처럼 석민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람은 그리 불지 않았지만, 찬 공기 사이로 전동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는 건 사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못 할 짓이었다.
‘이 추위를 그 할아버지가 버티려나.’
도구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분명 무리였다. 건장한 사람보다 손발이 차고 몸이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 노인들이었다. 괜히 옛날부터 노인 사망률이 겨울에 가장 높겠는가?
하지만 고민은 추위 때문에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대화는 사라졌고, 그것은 사가정역으로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석민은 손발을 주무르며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입김으로 손을 녹이고, 발을 구르며 혈액순환을 위해 뜀뛰기까지 해서 손발을 녹였다.
“이거, 성공할 수 있을까?”
다시 재고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 이상 그분들을 서울에 둘 수 없어요. 방한복에 발열조끼까지 마련했으니까 괜찮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영도 확신이 서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녀의 속눈썹은 하얗게 얼어있었으며,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추위로 덜덜 떨렸다.
‘추위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지지 않는다면 이번 일은 실패할 거야.’
몸을 어느 정도 녹인 석민과 아영은 다시 전동 자전거를 타고 움직였다. 지하인 덕분인지 이곳은 견딜만했지만, 바닥이 얼음인지라 미끄러워서 조심해야 했다. 그는 배터리의 잔량을 확인했다.
77%, 뭐지? 오래 간다고 하지 않았나?
‘추위 때문에 배터리가 빨리 방전되는 건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여분의 배터리를 한 개씩 준비한 상태이기 때문에 돌아갈 양은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배터리 닳는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괜히 하는 게 아닌 가 몰라.”
“예?”
그는 급히 도리질했다.
“아, 아냐. 됐어.”
상봉역에 도착한 직후 그들은 자전거를 접어서 짐가방에 넣고 경원의 방식대로 집과 집들을 넘어서 움직였다.
그렇게 경원의 집에 도착했을 땐 거의 2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