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84화]
⌜재미있네, 재미있어. 앞으로도 잘 불러주라고.⌟
자연스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나만 묻지, 나에게 왜 이러는 거야? 왜 나에게 이렇게 관심을 주지? 너무 대놓고 유혹하는 거 아냐?⌟
그 말에 알렉산드라는 이빨이 안 보이는 가식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냥, 네가 마음에 들어서. 전에도 말했지만, 여기서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없거든. 그거 알아? 몇 년 동안 얼마나 외로웠는데. 내가 한국어를 좀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여긴 내게 이국이지. 게다가 하는 일은 음지이니,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그런데….⌟
그녀는 그윽한 눈길로 석민을 주시했지만, 그것이 석민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거나 동요를 일으키진 못했다.
⌜지금은 마음에 안 들어도 뭐랄까, 천천히 서로 마음을 알아보자고 ‘헌터 사냥꾼’ 씨. 생각보다 싫진 않지?⌟
‘역시 알고 있었네.’
석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아주 싫은데?⌟
석민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도 2천만 원치고는 너무 싼 대가니, 우리의 신뢰관계를 위해서 1천만 원 정도 드리도록 하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그는 주는 돈을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돈은 현금으로 줄 건가?⌟
⌜당연하지, 그런데, 요즘 원화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추세라고. 하루하루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데, 아마 나에게 돈 받고 바로 경기도로 나가면 바로 손해를 볼 거야. 원 말고 다른 통화는 어때? 루블? 달러?⌟
⌜달러로 하지.⌟
알렉산드라는 잘 선택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달러 현금이 든 봉투를 올려 보내겠다고 말했다.
석민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일어섰다.
자리를 뜨는 석민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알렉산드라도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덩그러니 놓여있는 휴대폰 하나를 꺼냈고, 문자를 보냈다.
⌜샘플 확보 성공, 회수 바람. 타깃과의 관계는 계속 도모하겠음.⌟
***
석민과 아영이 헌신자 괴수를 처리한 그 날, 천국의 문 교단은 매우 조용했다.
교단의 교회에서 박선우는 인내하며 기다렸다.
교주는 2시간째 자신의 전용 기도실에서 기도 중이었다.
사도대를 비롯해서 교구장급 인물들은 예배당에서 교주가 나오길 기다렸다. 매우 중요한 중대발표를 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인내하며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교주 백은호가 기도실에서 나왔다.
기도실 밖에서 대기하던 교구장급 교구목사들과 무장한 호위신자들이 그를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며 경배했다.
“계시를 받았다.”
“오오.”
백은호의 말에 그들이 낮게 탄성을 질렀다.
“전령께서 직접 예배당에 강림하실 것이다. 아직 정확한 날짜를 받지 못했지만, 나와 교구장들만 맞이할 것이다.”
“방송은…….”
교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그분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다만, 녹화는 해두도록.”
약간의 낮은 탄식들이 나왔지만,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좌우로 물러나 백은호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었다. 백은호는 그들 사이를 걷다가 박재만의 모습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새로운 정탐군의 무장은 끝이 났는가?”
“그렇습니다. 총 10인입니다. 여기 있는 박선우 성도가 그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새로운 길로 간다는데 어디로 갈 것인가?”
“강동구 쪽으로 갈 생각입니다. 박선우 성도가 이미 가본 길이기 때문에….”
박재만은 말끝을 흐렸다.
“그래?”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자, 조급해진 박재만은 말을 덧붙였다.
“미리 길을 개척해 두었습니다.”
“그렇겠지, 기대가 크네.”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클 것이고, 실망이 크면 그는 숙청당할 것이다. 박재만은 침을 꼴깍 삼켰다.
‘기대를 하는 것은 좋지만 그만큼 지원도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개척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벚꽃이 만발한 시기지만 아직 바람은 차서, 석민은 와이셔츠와 얇은 조끼 위에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광나루역 화장실 앞에서 서성거렸다.
어제 밤새 봄비가 온 덕분에 중국발 황사도 스모그도 없었고, 아침까지 구름으로 뒤덮였던 하늘도 지금은 청명했다. 즉, 산책하기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날 석민은 둘이서 벚꽃 길을 구경하며 산책을 즐긴 후 호텔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워커힐 호텔 근처 벚꽃 길은 아름다운 곳 중 하나였다. 그리고 호텔에 있는 뷔페에선 봄에만 하는 특별한 시즌이 있었다.
‘딸기 뷔페라.’
석민은 a4용지에 인쇄한 홍보사진을 보고 대뇌었다. 사진에 피라미드처럼 쌓은 딸기들이 보였다. 걘 딸기를 엄청 좋아한다.
“오빠!”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석민이 고개를 화장실 쪽으로 돌린 순간, 그는 눈이 떠졌다.
이젠 폐허가 된 호텔의 라운지의 천장과 아영의 얼굴이 보였다.
“오전 8시입니다. 꿈이라도 꿨나요?”
“……어.”
지난번에 둔촌 고교 앞 사거리에 있던 교회에서 꾸었던 꿈과 비슷한 시기의 꿈이었다.
이젠 그 목소리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련하게 기억이 날 듯 하면서 나질 않는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목소리를 기억해내려고 했지만, 마치 불에 오그라드는 비닐처럼 기억하려 할수록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목소리가 뚜렷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무나도 희미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자, 그는 더러운 손등으로 그것을 닦았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졸리지? 조금 자둬. 2시간 뒤에 출발하지.”
그런 석민의 모습을 아영이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봤으나 곧 그가 자던 자리에 아영이 자리 잡고 누워서 잠들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석민은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
되도록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곳에 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강북으로 진입하는 데 용마터널 쪽을 이용하지 않았다. 터널에서 괴수들이 둥지를 틀었던 적이 있으니, 터널은 되도록 피하고 싶어서 그들은 남쪽 길을 따라 광나루역으로 향했고 거기서 천호대로를 따라 어린이대공원 후문 쪽으로 가보려고 했다.
그리고 광나루에서 감염자들을 만났다.
한마디로 엿될 뻔했다. 수백, 수천 명이 넘는 감염자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가지고 있는 탄환을 거의 다 쏟아 부었다.
겨우 살아 돌아왔다.
그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스탯 덕분이었다. 스탯 덕분에 그들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고, 일반인과 다른 지구력은 그들이 쉽게 지치지 않게 도와줬다. 하지만, 그들이 지칠 만큼 감염자들의 공격은 매우 집요했고, 그들은 이번 스탯을 지구력에 찍었다.
[최석민, 선택받는 자.]
레벨:14
지구력:6
체력:4
활력:7
시력:5
[아영, 전달하는 자.]
레벨:14
지구력:6
체력:5
활력:6
시력:6
그들의 찢어지고 해진 전투복을 반증하듯 그들은 겨우 살아남았다.
무시무시하게 달려드는 감염자들은 시체나 다름이 없었고, 지치지 않았으며 두려움이나 공포를 몰랐다. 총을 쏘든 말든 그것들은 석민과 아영을 덮치려고 했었다.
일반인들이었으면 진즉에 그들은 죽었을 것이다.
그사이 SVDK에 대한 석민의 감상이 차곡차곡 쌓였다. SVDK는 매우 좋은 병기이긴 했으나, 탄환이 컸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장탄수를 많이 확보할 수 없었다.
감염자들에겐 9.3mm는 과잉화력이었다.
‘다음에는 일반소총을 챙겨야겠군.’
그러나 괴물들을 상대하는데 많은 무기들을 달고 다닐 수 없었다. 불편했고,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샷건을 두고 갈까?’
트렌치건은 지근거리에서 매우 우수한 병기이고, 지근거리에서 슬러그탄을 쏘면 괴수도 나자빠지게 할 수 있지만, 반자동이라 연사하기 곤란한 면이 있었다. 트렌치건 특유의 총검도 마음에 들긴 하지만, 혜원에게 받은 새로운 총검 덕분에 다른 총에도 총검 장착 가능하기 때문에, 트렌치건 특유의 메리트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래된 총이니 슬슬 바꿀 때가 되긴 했어.’
트렌치건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는 다시 어떻게 서울 강북지역 시내 안으로 갈지 고민해 보았다.
‘다른 길이 필요한데.’
시간이 지나 그는 아영을 깨웠고, 그들은 잿빛의 산길을 따라 내려가 구리암사대교로 향했다.
일단 예정대로 그들은 강서구 쪽으로 향할 것이다.
정부에서 왜 강서구로 가지 않느냐고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
천국의 문 교단의 중앙예배당.
성스러운 날이 왔다. 그동안 교주에게만 내리던 계시가, 그날만큼은 교구장급 목사들에게도 전해지기로 해서 전국의 모든 교구장들이 모여들었다.
교주가 계시가 있을 거란 말을 한 후 교구장들은 24시간 내내 중앙예배당에서 대기 중이었기 때문에, 금방 예배당에 모였다.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일 수 있는 예배당에 다 합쳐서 백 명도 안 되는 교구장들과 교주를 호위하는 사도대들만 모이니, 예배당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경기도를 뒤덮은 저주스런 구름들 때문에 예배당 안도 쌀쌀했으나, 모두들 첫 계시를 받을 수 있단 생각에 흥분한 나머지 하나같이 얼굴은 홍조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중요한 계시가 아닐까요? 모든 교구장들이 모이라 하는 것은 역시 중대한 일. 즉, 성전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는 것은….”
그들은 매우 즐거운 어린아이들 마냥 재잘거렸다.
“혹시 천사가 직접 우리를 진두지휘해주시는 것인지요?”
“속단하기 이르다.”
교주 백은호의 말에 잡담을 하던 교구장들이 입을 다물었다.
“자정까지 얼마나 남았느냐?”
백은호의 말에 카메라를 준비하던 교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3분 남았습니다.”
너무나도 긴 침묵이었다. 모두들 초조한 마음으로 천사의 강림을 기다렸다.
박재만은 자신의 금시계를 확인했다.
자정까지 5초.
‘4, 3, 2, 1.’
누군가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내 시계가 잘못된 건가? 박재만이 시계를 다시 보는 순간, 예배당 중앙의 단상에서 섬광탄이 터진 것 마냥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곧 거대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쨍하게 예배당을 다 휘감은 빛에 백은호를 제외한 대부분들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어, 어?”
영상을 녹화하기 위해 둔 카메라가 연기를 내며 탄내를 풍기자, 카메라를 관리하던 교인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사이, 빛이 줄어들면서 단상 위에 둥둥 떠 있는 천사를 마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얼굴 쪽은 여전히 눈부신 빛 때문에, 이목구비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배당에 있는 모두에겐 그런 점까지 천사로 보일 뿐이었다.
천사는 예배당 천장에 닿을 듯만큼 키가 컸으며, 옛 명화의 신을 표현할 때나 보았던 천 하나로 원피스처럼 두른 듯 한 스커트에, 안에는 바지를 입고 있었고, 상반신엔 백금으로 흉갑을, 머리엔 보석이 잔뜩 달린 투구를 쓰고 있었다.
길게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이 등허리에서 휘날렸으며, 마치 아테나나, 발키리의 현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오오.”
낮은 탄성들이 터져 나왔고 일부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으나 이성을 되찾은 그들은 금세 질서를 되찾았다.
백은호는 앞으로 나와서 천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보아라, 때가 다 되었다. 그동안 성전을 위해 준비해온 너희의 정성이 기특하다. 그러나 우리의 앞길을 막을 존재가 나타났다.
낭랑한 음성이 그들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그것은 소리가 아닌, 그들 머릿속에 울리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격할 수도 없었다. 적이 나타났다니? 그들의 얼굴이 심각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 적이 누구입니까?”
백은호가 물었다.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들은 2명이며, 강북을 넘어 들어갈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의 사명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들이 문을 노리고 있다.
술렁이는 소리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