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76화]
“많이 죽었지만, 군대가 없었으면 더 죽었겠지.”
하지만, 그때 이후로 군대는 신뢰를 많이 잃었다. 정부는 경기도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게 되자, 알게 모르게 퍼져있던 무기들을 등록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제로 방식을 바꾸었으나, 사태가 벌어지던 그 혼란기에서 얼마나 많은 무기가 민간사회에 풀려 있는지 아직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런 일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그렇죠.”
석민은 아영이 무언가 갈등하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왜? 무슨 일이 있어?”
“그것이….”
아영은 말끝을 흐리다가 결국 대통령이 보내온 문자를 보여주며 석민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혹시라도 석민이 불쾌해 할까 봐 최대한 조심했지만, 석민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강북의 위험은 그도 잘 알고 있었고, 그곳으로 가려 하는 헌터들이 없다는 사실도 이미 알던 바였다.
“대통령이 우리를 신경 써주고 있기는 하네.”
예상하던 두려운 대답이 안 나오자 아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 괴수는….”
“아니, 괴수는 처리해야지.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말은, 강북엔 괴물과 감염자들 때문에 위험하고, 무엇보다 헌터들이 없단 거니까. 우리가 다리에 있는 그것을 처리하면 다리는 빌 테고, 헌터들도 북쪽으로 다니기 시작하겠지.”
아영은 뒤통수에 망치로 한 방 맞은 듯했다.
“리스트에 있는 헌터팀 하나라도 넘어가는 걸 확인하면, 그 핑계로 올라갈 수 있을 거야.”
“묘안이긴 하네요.”
생각을 해보니 그렇게 하면 정부의 명령도 어기는 것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헌터들이 맨날 다리만 보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움직일까요?”
“호텔 말리나가 있잖아. 거기서 소문을 내면 될 거야. 헌터 놈들은 거기서 자주 모이니까 소문내기 딱이지. 게다가 소문이란 것은 생각보다 빨리 퍼지거든.”
말을 마친 그는 요깃거리로 챙겨온 종이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햄버거 세트 2개와 치킨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석민이 햄버거를 들어서 흔들어 보이자 아영은 그가 내미는 햄버거를 받았다.
“강남은 어떤 의미로는 매우 넓어 보이긴 하지만, 사냥을 하기엔 크기가 작아. 게다가 이름 있는 헌터들이 이미 자기들만의 사냥구역을 만들어 놓고 다른 헌터들이 그곳에서 활동하는 것을 막거나, 아니면 이미 사냥을 마친 헌터들의 드래곤하트를 노리고 덮치지. 그래서 새로운 사냥터를 원하는 자들은 항상 있었어. 그런 자들의 니즈를 맞출 수 있으니, 그때 가서 강북지역으로 가도 괜찮아.”
순식간에 햄버거를 다 먹어 치운 석민은 음료수를 쭉쭉 빨아마셨다. 이 추운 날씨에도 그는 얼음이 담긴 콜라를 마시는 데 별로 주저함이 없었다.
“두고 봐, 순식간에 소문이 퍼질 거야. 그렇게 되면 대통령도 생각을 바꾸겠지.”
“그렇지만, 대통령께선 그 괴물을 잡는 것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신데.”
“그 정도는 융통성 있게 가자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감자튀김까지 다 먹고는 손가락에 묻은 소금을 쪽쪽 빨아먹었다.
“하여튼 너무 걱정하지 마.”
석민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아영은 자신도 이쯤에서 한 수 접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괴수는 언젠가 우리나라가 서울을 재수복을 할 때 분명 걸림돌이 될 놈일 테니까.”
아영은 우리가 나서는 것보다, 나중에 전차를 끌고 가서 한 번에 처리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결코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헌신자 괴수를 잡아 사명을 완수하는 것은 그들이 받은 퀘스트였다.
이것은 말 그대로 그들이 완수해야 하는 퀘스트였다.
***
3일 뒤 석민은 혜원에게서 SVDK를 받을 수 있었다. 총은 정말로 완벽했다. 아니, 총이라기보단 마치 총창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격총을 돌격소총처럼 쓰려고 하다 보니 너무 길어서 오히려 시가전에 불편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총열이 많이 두꺼워지면서 6.5kg이던 총이 7.5kg까지 늘어났고, 드럼탄창까지 장착했으니 경기관총처럼 무거워졌다.
거기다 드럼탄창을 넣을 수 있는 전용 군장에, 탄창에 탄환까지 전부 채우고, 여분의 탄약까지 챙긴 뒤 RPG-7, 10발의 탄두를 챙기자, 무게가 장난 아니었다. 이대론 평소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군장이 많이 무거워지셨군요.”
아영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 또한 군장이 무거워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탄환의 크기가 커진 것도 그렇고, 신형무기에 맞춰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 보니 무게가 늘어난 것이었다.
석민의 무게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아영이 RPG 탄두 5발을 부담하기로 하긴 했지만, 여전히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주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지만, 장거리 이동을 해야하는데다가, 유사시엔 가방을 짊어진 채 싸워야 하는 그들에겐 너무나도 버거운 무게가 아닐 수 없었다.
“레벨이 올랐었지만, 아직 스탯 안 올렸죠? 이참에 체력에 스탯을 찍어야겠군요.”
“역시 좀 그러네. 상태창.”
[최석민, 선택받는 자.]
레벨:13
지구력:7
체력:5
활력:7
시력:5
스탯:1
‘원래는 지구력에 올리려고 했는데….’
지구력이 가장 스탯이 낮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예전부터 지구력에 대한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체력에 분배하는 게 났겠어.’
석민은 혀를 한번 차고는 체력에 스탯을 추가했다.
[최석민, 선택받는 자.]
레벨:13
지구력:7
체력:4
활력:7
시력:5
시스템창을 확인한 뒤 혜원에게서 받은 총검을 끼워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길이는 2미터에 육박했다.
“총이 아니라 완전 창이네요.”
“그치?”
석민은 총을 들어 한번 조준해보았다.
그는 조준경을 국산 도트사이트로 마련했다. 사실 배터리 수급할 걸 생각하면 좀 문제긴 했지만, 여차하면 말리나에서 사면 될 것이다. 말리나 상점에서 배터리를 팔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괴물만 잡고 하루, 이틀 정도 강북지역 답사한 다음에 대통령이 말한 대로 강서구 쪽으로 가지. 어때?”
“예.”
석민은 전과 달리 마음을 확실히 정한 듯 단호한 아영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곤 발사관을 어깨에 멨다.
“좋아, 가자.”
출발하려고 짐을 들던 아영이 갑자기 멈췄다.
이대로 가서 바로 싸우는 건 위험해 보였다. 정부에서 비협조적인데다가, 그 괴수도 그렇지만 강북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1도 없는 상황이었다.
“저, 강북으로 가기 전에 헌터들에게서 정보를 좀 모으는 건 어떨까요? 아니면 말리나 사장에게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말리나 사장에게?”
멨던 짐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석민이 한쪽 눈썹을 삐죽이 올렸다. 아영은 이어서 말했다.
“그 여자는 분명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분명히 아주 작은 거라도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을 것입니다. 이대로 가서 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닥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알고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정부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요.”
일리 있는 말에 석민은 턱을 매만지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났겠어.”
그러나 말리나에 있는 알렉산드라를 떠올린 석민은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성민
그들이 말리나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 지 대략 3시간이 지난 뒤였다.
카운터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알렉산드라는 한쪽이 허벅지까지 쫙 트인 붉은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그들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맞이해주는 알렉산드라 때문에 마치 주변공기에서 꽃향기라도 나는 듯했지만, 석민의 표정은 뭐 씹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그런 표정들이 다 가식이고, 그 속에 뭐가 숨어있는지 어느 정돈 알기 때문이었다.
“무거워 보이네?”
⌜물어볼 게 있는데.⌟
갑작스레 러시아말을 하자 그녀는 살짝 움찔거렸지만, 영업적인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우리 정보는 비싼데.⌟
⌜나쁘지 않은 거래일 거야. 아, 그리고 하루 정도 숙박하지.⌟
석민이 돈을 내밀자, 그녀는 거미발처럼 기다란 손가락으로 돈을 받고는 눈을 살풋 찡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지.⌟
***
석민과 아영은 객실에 짐을 푼 뒤 바(bar)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석민은 기다리고 있던 알렉산드라가 앉아있었다.
도도하게 한쪽 팔에 턱을 괴고 다리를 꼰 채 앉아있는 모습은 매우 유혹적이었다.
붉은 치파오와 대조적으로 하얗고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에 잘 뻗은 다리는 알렉산드라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는 석민조차 잠시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찔했다.
⌜그래서, 뭘 원하는데?⌟
⌜미안한데, 여기 일행이 있어서 한국어가 가능할까?⌟
석민은 눈짓으로 아영을 가리켰고 알렉산드라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나에게 한국말 쓰지.”
조금 어눌한 한국어가 나왔다.
‘외국인치고는 말은 잘하네.’
아영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네가 러시아말을 더 편해한다는 걸 아니까.”
“본론, 말해.”
“구리암사대교에 있는 돌연변이 감염자, 아는 것에 대해서 전부 말해봐.”
“아, 그거?”
알렉산드라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면서, 허리를 살짝 숙였다.
“잘 알고 있어. 내가 그것에게 현상금도 걸었었지. 하지만 아무도 그걸 잡지 못하더군.”
“그래?”
“나와 연이 닿아있는 과학자들이 그 표본을 가지고 연구하고 싶어 해. 나도 알아. 헌터들이 말해줬어. 엄청난 괴력, 신비한 재생능력,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해. 왜? 그거 잡으려고?”
“어.”
그 말에 알렉산드라가 고개를 저었다.
“힘들걸? 예전에 대전차로켓이랑, 중기관총 들고 잡으려던 팀 있었는데. 다신 돌아오지 않았어.”
퍽이나 사기진작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그거 참 도움 되는 말이네.”
석민은 느린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 말고, 다른 거, 새로운 것 좀 말해봐. 그래야 대가를 지불하지.”
알렉산드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주위에 두리번거리던 아영은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대화를 듣는 이가 있었다.
석민은 알렉산드라가 말해주는 ‘헌신자의 괴수’를 잡으려다가 실패한 자들에게서 얻은 정보들에 대해 듣느라고 제대로 주변을 확인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면도를 안 했는지 족히 10센티는 넘어 보이는 수염을 단 창백한 피부에 깊게 주름이 진 남성이었다. 그는 보통 미군들이 입는 위장무늬가 새겨진 컴뱃셔츠에 군복바지, 그리고 회색 군화를 신고 있었다. 행색이 마치 전장이라도 다녀온 듯, 먼지가 가득했고 더러웠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아영과 석민에게 다가왔다.
아영은 무기를 꺼내는 대신 석민의 팔을 툭툭 쳐서 눈치를 주었다.
시선을 돌린 석민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차하면 바로 때릴 태세였다.
“저기, 혹시 그 다리 위의 괴물을 잡을 생각입니까?”
목소리는 생긴 것처럼 걸걸했으나, 움츠린 등과 소심한 말투가 의기소침하고 비굴해 보였다.
“뭐야?”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합니다. 제 이름은….”
⌜서성민이야. 그 괴물을 없애려고 하는 사람이지. 꽤나 도전을 많이 했었어.⌟
알렉산드라가 나지막하게 러시아어로 말했다.
“서성민입니다. 혹시, 괜찮다면 저도 그 일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물론 보수나 그에 따른 보상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괴물을 죽일 수 있게 참여만 하고 싶습니다.”
저자세로 나왔지만, 석민은 여전히 그를 경계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왜지?”
“저는 반드시 그것을… 아니, 그 전우이자 제 친구에게 안식을 주고 싶습니다.”
“전우라고?”
석민이 되물었고, 아영은 전우라는 말에 눈썹이 꿈틀댔다.
“잠시 같이 자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니, 필요 없어.”
석민은 손사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