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67화]
그중에도 악질적인 놈들에게 걸린 모양이다.
보통 약탈자들은 드래곤하트를 두고 도망가면, 쫓아오지 않는 편이었다.
그는 동료들이 가지고 있던 드래곤하트를 비롯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망할 놈들은 자신을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이미 드래곤하트도 다 버렸는데, 이렇게 쫓아오다니, 지독한 놈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얼른 다시 몸을 숨겼다. 느낌이 싸했다.
‘총 쏘는 것으로 봐선, 숫자가 많아 보이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결국 자신 혼자 남은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 프로였다.
그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허가 된 시가지는 괴수들도 없어 정적만이 감돌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이것들은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그와 그의 동료들을 쫓아왔다. 분명 이쪽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놈들.’
그는 다시 한 번 연막탄을 준비했다. 괴수들 상대로는 거의 쓸모없지만, 같은 인간이 상대라면 도망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지금도 덕분에 2시간 동안 자신은 도망 다닐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연막탄을 꾹 쥐었다.
‘그래도 200미터만 달려가면, 강동역이니까 거기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살 수 있을 거야.’
그는 안전핀을 뽑고, 바로 던졌다. 녹색 연막이 무럭무럭 피어오르자, 그는 바로 몸을 날렸다.
이미 2시간 동안 움직여온 몸은 삐거덕거렸다. 중년의 몸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고단한 하루였다. 마치 땅이 다리를 붙잡는 것처럼 무거웠다. 그는 군장마저 벗어 던졌다.
강동역의 역사는 야트막한 오르막길 위에 있었고, 그의 종아리가 더 이상은 무리라는 듯, 아려왔다. 다리를 질질 끌듯이 움직이면서, 그나마 그의 위안은 연막이 크게 퍼져 자신의 모습을 가려준다는 사실뿐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져 있으니 자신을 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막연히 생각하며 코앞으로 다가온 강동역 입구를 향해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숨이 너무 찬 나머지 입에서 피 맛이 날 지경이었지만, 저 안으로만 들어가면 살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가슴팍이 들썩거렸다.
“흐윽.”
고개를 내려 보니, 가슴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총을 맞았다고 인지하는 순간,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가쁜 숨을 내쉬려 했으나 숨 대신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때, 조용한 시가지에 뚜벅, 뚜벅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시체가 된 재석 옆에 군화가 자리 잡았다.
아영이었다.
그녀는 러시아군이 입는 고르카 전투복에 검은색 와치캡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 손에 소음기를 단 SV-98, 러시아제 저격총 쥔 채, 다른 손으로 품속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들었다.
“정재석, 나이 42세 맞네요. 울프 2. 모든 목표를 처리했습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서 재석의 얼굴을 찍었다.
-알았다. 합류지점에서 보지.
-수신완료.
아영은 관자놀이에 펜을 눌러 펜촉을 꺼낸 후, 서류에 선을 그었다.
“이것으로 30명 다 잡았네.”
그녀는 강동역의 입구를 잠시 보다가 합류지점으로 향했다.
***
그들의 합류지점은 현대백화점 천호점의 12층 식당가였다.
아영이 들어올 무렵, 석민은 입에서 하얀 증기를 내뿜었다. 전자담배였다. 무색무취로, 괴수들에게 들킬 염려가 없어, 서울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피우기 위해 장만한 것이었다.
“아, 왔군.”
그는 전자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손가락으로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진공포장 된 드래곤하트들이 쌓여 있었다. 전리품이었다.
“이놈들 좀 많이 가지고 있더라. 다 합쳐서 와이번이 6개, 드레이크가 17개더군.”
“무기들도 챙겨놓았군요.”
아영이 반대편 구석에 대충 쌓아둔 무기들을 보며 말했다. 석민은 껄껄 웃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웃음이었다.
“치맥 좀 거창하게 먹으려면, 열심히 돈 벌어야지. 저녁이나 먹지.”
그는 손을 비비며 저녁거리를 꺼냈다.
미군에서 먹는 MRE였다. 전투식량이 다 그렇듯 맛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래도 춥고 배고픈 그들에겐 그거라도 감지덕지였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아영이 석민의 손에든 전투식량을 받아서 데우다가 물었다.
“뭐가?”
“마지막에 그 잘 숨던 인간, 다른데 다 두고 강동역으로 필사적으로 달렸잖아요. 강동역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그 말에 숟가락을 옮기던 석민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다른 역도 아니고 굳이 강동역으로 가려고 한 것 보면, 뭔가 있어 보이긴 해. 게다가 그놈 말고도 다른 놈들도 강동역으로 도망치려고 했었지? 지하철역들은 대부분 침수되지 않았나?”
지하철이 다니는 곳은, 그 특성상 지하수가 흐르는 곳이 많았고, 결국 사태 이후 대부분이 침수되었다.
그래서 퍼내는 펌프가 없다면,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지대상 높은 지역은 안 그럴 수도 있어요. 송파구에서도 잠기지 않은 역이 있었죠?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역 입구를 보고는 군장이고 뭐고 다 던지고 뛰어가는 걸 보니,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 한번 거기로 가볼까?”
“예.”
그렇게 강동역에 대한 대화를 마무리 짓고, 그들은 다시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다음날, 그들은 새벽부터 무장을 한 채 움직였다. 석민은 ak-107을 들었고, 아영은 aks-74u를 든 채였다.
과거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던 출입구는 작동이 멈춰, 검붉은색으로 녹이 슬어 있었다.
“별로 들어가고 싶진 않네.”
석민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밑으로 내려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인지라, 입구는 밤보다 더 어두웠다.
도착한 입구엔 강철 방호문으로 닫혀 있었다.
“열 수 있나?”
“잠시만요. 이건, 미닫이 방식의 방호문인데….”
그녀는 주변을 살피다가 산업현장에서 사용할 법한 빨간색과 녹색 버튼을 발견하였다.
“이건가?”
“눌러보죠.”
아영이 녹색 단추를 누르자,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문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은 총을 겨누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도 같은 단추가 보였다. 석민이 그것을 들어 빨간색 단추를 눌렀다. 금속음이 내부에서 울려 퍼졌다.
어두운 곳을 더듬으며 밑으로 내려가자, 작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희미하게 엔진소리 비슷한 소리도 들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발라크라바를 쓴 덕분에 아영의 갈색 눈만 반짝여 보였다.
잠시 동안 눈빛으로 아영과 무언의 대화를 나눈 석민은 조정간을 자동에서 3점사로 바꾸었다.
“헌터들의 은거지가 분명합니다.”
아영이 무전으로 매우 조용히 말했다. 석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한 후, 먼저 움직였다.
역 전체를 사용하는 건가? 안에 숫자는?
석민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내려갔다. 지하 2층으로 내려오자 제법 밝았고, 어두운 곳에서 나온 석민과 아영은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그때, 석민의 눈에 개찰구가 눈에 들어왔다.
개찰구 쪽엔 철제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원래는 역무원이 일을 했었을 곳인 원기둥 모양의 사무실엔, 웬 여자가 앉아 있었다.
금발머리에 몸매가 훤히 보일 정도로 야한 검정 드레스를 입은 백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총을 든 사람이 다가오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길고 우아하게 뻗은 자신의 손톱을 손질하느라 바빠 보였다.
석민과 아영은 다시 서로를 보았다.
그들은 그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의 그림자가 여자의 시야에 닿자, 여자는 손톱손질 도구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와, 친구들. 호텔 말리나(малина)에 말이야.”
“러시아인?”
아영이 중얼거렸다. 러시아인 특유의 억양과 말투가 드러났다. 그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 이름은 알렉산드라야. 호텔 말리나의 주인이야. 우리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 숙소와 먹을 거, 맥주, 보드카, 여자도 제공하고 있어. 서울에서 최고야. 헌터들의 요람이자, 푸른 소나무아래 쉼터지. 다만, 여기서 싸우면 안 돼. 우리 무기 많고, 경비원도 많아. 분란 일으키면 죽어. 아, 그리고 이거 방탄유리야. 쏠 생각 하지 마.”
‘젠장, 누구랑 닮았군.’
석민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래, 그럴 거 같더라.”
석민이 총을 내려놓자, 아영도 덩달아 내려놓았다.
“하루 숙박하는데 얼마지?”
그녀는 양손을 다 들어 보였다.
“10만 원, 우리 싸.”
“뭐, 나쁘지 않네.”
요즘 10만 원이 어디 돈이던가.
특히 서울에서 이런 숙소가 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됐다.
석민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 현금은 그가 죽인 헌터들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제법 넉넉하게 있었기 때문에 별로 거리길 게 없었다.
석민이 돈을 건넸다.
“좋아, 여기 투숙객 장부에 날짜, 이름, 서명.”
서명이 끝나자, 그녀는 손을 아래쪽에 넣더니, 무언가를 눌러 닫혀있던 셔터를 올렸다.
“1-1번 승강장이야. 편히 셔.”
그녀가 열쇠를 내밀었다.
“셔가 아니가 아니고 ‘쉬어’야.”
석민의 말에 여자는 싱긋 웃었다.
화장만 덜 진하게 했어도, 영화배우 뺨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쉬어. 왼쪽이 객실, 오른쪽이 라운지야.”
셔터가 열리기 무섭게 드러난 것은 2명의 완전무장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경찰특공대처럼 검은색 옷차림에 헬멧, 군장도 착용하고 있었다.
“무기는 소지가 가능합니다만, 분란을 일으키시면….”
딱 봐도 한국인 같았지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말이 어눌하지 않았다.
“너희 사장에게 들었으니까 걱정 마.”
석민은 헬멧의 바이저를 올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과거 역내 상점이었던 격실은 헌터들을 상대로 무기를 파는 무기상점으로 변해 있었고, 흡연실인 곳도 보였다.
각 격실의 천장은 파이프로 연결되어 있었고, 파이프는 환풍구 쪽으로 향해 있었다.
석민과 아영은 말없이 왼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승강장에 전동차가 서 있었는데, 이 전동차가 객실이었다. 전동차 한 칸마다 칸막이를 설치해서 그것을 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석민은 1-1번 승강장의 문으로 가서 열쇠로 잠겨있는 자물쇠를 열었다.
과거 기다린 의자가 나란히 놓여있던 곳엔 침대 2개와 탁자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고, 바닥엔 붉은색 융단이 깔려 있었다. 심지어 천장엔 작은 샹들리에까지 걸려있었다.
창문은 까만 시트지가 붙어있었고, 벽은 튼튼한 나무 판넬이 덧대있었다.
석민은 칸막이 쪽을 두드려 보았다. 방음도 나름 되는 듯했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아영이 문을 닫고, 걸쇠로 잠그는 순간, 석민은 헬멧을 벗고 발라크라바도 벗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설명 좀 해줘.”
방음이 된다고는 하나, 결국 지하철이다. 누군가 들을 수도 있단 생각에 석민은 속삭이듯 말했으나, 그의 말투에 놀라움과 당혹감이 감춰지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