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44화]
방금 루거 권총을 보고 난 이후로 석민은 그 남자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변태새끼는 절대로 사회에 있어선 안 된다.
될 수 있으면 처리해야 한다.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그리 말했다.
명분이야 충분했다 김혜원만 결심을 하면 바로 의뢰를 받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정의감이 넘치는 아영에게 도움을 받거나, 형사인 용준에게서 CCTV자료만 받아도 쉽게 추격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은….”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휴대폰의 소리가 아니었고 가게에 배치된 가정용 전화기였다.
혜원은 잠시 그것을 빤히 노려보다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여보세요….”
석민은 혜원의 표정변화를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주눅 들어 있는 것을 봐서 이승철의 전화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 오해라고. 내 가게 앞에서 진을 치는 사람들이 있어. 왜 내 변명도 안 듣고 일을 벌인 거지? 쓸데없이 서로 시간과 돈을 잃었잖아…. 그래, 맞아. 맡긴 물건은 이미 작업이 끝났어. 가지러 오면 돼…. 내가 널 실망시킨 적이 있나? 믿음을 가지고 예전처럼 신뢰관계를 가지는 게 어때? 나쁘지 않을 거야. 문명인처럼 대화로 해결하자고. 그런 의미로 전화한 것이겠지?”
그녀는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자신감을 되찾는 것 같았고, 석민의 얼굴은 반대로 점점 실망으로 바뀌었다. 상황이 그가 원하던 방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혜원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좋아, 그렇게 하지.”
그녀는 수화기를 놓자마자 크게 웃으며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오해가 풀렸군. 다행이다.”
석민은 적잖게 실망했다.
그렇지만, 이내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냉정해진 그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하긴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이걸로 오래 잡힐 수 없지.’
하여튼 오해가 풀렸으니 그가 나서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 그러면 이제 가 봐도 되는 건가?”
혜원은 처음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모니터로 향했다.
“뭐야? 뭔 일이야?”
혜원은 대답하지 않고 모니터 화면을 돌려 그가 볼 수 있게 했다.
언제 왔는지는 몰라도 가게 앞에 검은색 고급 외제차 하나가 주차되어 있었고 차에서 내린 양복쟁이 2명이 마치 경호원인 것처럼 서 있었다.
가게의 입구 앞에 2명의 남자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살집이 붙은 남자의 손에는 회원카드가 쥐어져 있었고 그 뒤에 선 남자는 서류 가방을 쥐고 있었다.
살집이 붙은 남자는 카드 리터기에 카드를 연신 긁어댔지만, 아영은 문을 잠금으로 둔 상태였는지라,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회원 이름이… 박재만이군.”
아영은 모니터를 통해 그의 얼굴과 신분을 확인했다.
“오해가 풀렸으니 장사해야지. 저 남자는 아까 온 양복쟁이와 다른 것 같은데.”
그녀는 그리 중얼거리며 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석민이 뭐라 하기도 전에 말이다.
“박재만 뒤에 있는 남자는 아까 세단에 타고 있던 남자야.”
그의 말에 혜원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남자들은 들어온 상태였다.
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혜원은 창구를 닫아버렸고, 석민은 권총을 꺼내 장전을 한 후 조정간을 격발로 슬쩍 옮겨 총을 쥔 채 허리 뒤로 옮겼다.
격실의 문이 열리면서 2명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박재만입니다.”
앞에 선 살집이 풍성하게 붙은 남자, 교구장 박재만이 말했다.
“회원증만 만들고 3년 동안 단 한 번도 안 왔었지만, 여하튼 제 부하들이 어리석은 짓을 했더군요.”
그의 말에 혜원의 얼굴이 굳어졌고 석민은 헛기침을 하며 뒤로 숨겨두었던 권총을 앞으로 꺼내 두었다.
검지손가락이 이미 방아쇠에 닿고 있었기 때문에 살집이 붙은 남자 뒤에 서류가방을 가진 남자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그를 보았지만, 박재만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은 채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잘못된 일로 사장님의 사업에 큰 지장을 준 점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섭섭하지 않게 이 피해에 따른 보상을 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박재만의 눈치에 뒤에 있던 남자, 김지형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서류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냈다.
1만 원짜리가 아닌 5만 원짜리 돈다발들이 원기둥 모양을 한 채 고무줄로 묶여 잔뜩 들어 있었다.
그가 가방에 손을 넣는 순간 바짝 긴장한 얼굴로 권총의 총구를 겨누었던 석민은 안에서 돈다발이 나오자, 총구를 내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긴장을 놓지 않은 채 그들의 얼굴을 노려보며 의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는 돈다발들을 집어서 일일이 넘기며 확인했다.
“뭐하는 거야?”
난데없이 석민이 돈을 세고 앉아있으니 답답함에 혜원이 물었다.
“지폐 사이에 무언가 장난질 치는 놈들을 여러 번 보았거든. 위조지폐, 빈종이, 아니면 위치추적기나 독약 바른 지폐 같은 거 말이지.”
그러면서 그는 다시 그들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전한 것을 확인한 그는 창구를 통해서 그녀에게 돈을 넘겨주었다.
“얼마냐?”
“대략 2천정도.”
“맞습니다.”
박재만이 말했다.
“이 정도면 사장님이 입은 피해도 어느 정도 보상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천국의 문 교단의 교구장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우리 교단의 사람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죽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교단에서 자체적으로 수사를 하고 있었지요. 왜 아시잖습니까? 요즘 같은 시기엔 경찰을 믿을 수 없으니까요.”
그는 매우 유들유들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교단사람들을 죽이는 자가 9X39MM 탄환을 쓴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 말에 혜원과 석민은 빠르게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특히 혜원은 순간적으로 석민의 뒤통수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뭐,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국내에선 매우 희귀한 탄환으로 서울, 경기 지역에서 그것을 쓰는 사람의 숫자가 다섯 손가락, 아니 열 손가락을 넘기지 않을 겁니다. 때문에 사장님의 고견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자에 의해 죽은 사람이 40명이 넘습니다. 정의를 위해서라도 이자는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것 같습니다. 박재만 씨.”
혜원이 말했다.
“하지만, 난 도울 수 없군요. 내 고객의 정보는 절대로 넘길 수 없으니까요. 이런 일의 특성상 손님들의 성향이 매우 거친 것은 알 텐데요. 당신 부하들이 이곳에 억지로 들어오려고 노력한 덕분에 내 고객 중 하나는 매우 크게 화가 난 상태이고, 난 쓸데없는 오해를 사게 만들어서 오늘 죽을 뻔했습니다.”
“아, 그렇지요.”
백지만은 능글맞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만, 사장님께선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희가 지금 생각보다 많이 절박한 상태이거든요. 아! 마침 저희 쪽에 대규모 물건조달이 필요한 상태인데 혹시 그쪽엔 관심이 없으신지요.”
박재만은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한 자였다.
혜원이 대답할 때까지 괴롭히면서도 대규모 물건 구매를 위해 당근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석민은 조금 불안한 얼굴로 혜원을 보았다. 혜원이 정보를 흘리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혜원은 절대로 그런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신뢰를 자신의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신뢰를 가지고 문제를 만들 생각이 절대로 없었다.
방금 신뢰를 잃은 것 때문에 죽을 뻔 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까? 물건 공급은 확실히 구미가 당기네요.”
그 말에 석민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혜원과 박재만을 보았다.
“그런데 방금 그 오해가 풀린 화난 고객님은 자기를 공격한 자들의 존재를 알고 싶어 하던데. 뒷세계에서 아주 유명한 양반인데 뭐, 그 양반이 물어본다면 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년이….’
박재만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박재만은 석민과 이승철의 싸움을 영상을 통해 보았다.
이승철의 실력은 굉장했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교단을 공격하는 자들 때문에 힘든데, 괜히 적을 더 만들면 그의 입장에서도 대단히 곤란했다.
‘이러면 협박도 안 통하는 거잖아.’
돈으로 무마하긴 했으나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으니 지금은 어떻게 말을 꺼내든 냉담한 반응밖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박재만은 정본 나중에라도 환심을 사서 얻으면 그만이라 생각하며 히죽 웃어 보였다.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경기도에서 무기를 공급해줄 능력을 가진 새로운 무기업자였다.
그리고 혜원은 그럴 수 있는 인재였고.
“별수 없군요. 그러면 거래 이야기는 다음에 하는 것으로 하지요. 어제오늘 있었던 일은 이제 용서하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박재만 씨.”
혜원은 적잖은 이득을 보았으니 나쁠 일이 없었다.
“그러면 거래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리고 실례지만….”
석민은 자신을 향해 쳐다보는 박재만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김성훈입니다. 김성훈.”
석민은 본능적으로 바로 거짓말을 했다.
“혹시 여기 경비입니까?”
“아니요. 따로 일하는 게 있고 오늘은 잠시 고용된 것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걸 묻는 거죠?”
석민의 말에 박재만은 능글거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따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하지요,”
석민의 단호함에 박재만도 살짝 놀랬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보았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고 박재만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다행히 교단은 수많은 인재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면….”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을 꺼내서 석민에게 주었다.
“이쪽으로 전화를 주시겠습니까?”
“무슨 의도입니까?”
석민의 물음에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영상을 하나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언제 찍었는지 몰라도 그 영상은 석민과 이승철이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우리 교단의 대원들이 찍은 것입니다. 우연찮게도 고프로 카메라를 착용한 대원이 한 명 있었지요. 정말,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보니 민망함이 들었다.
그리고 영상으로 보는데, 확실히 이승철은 강한 사내였다.
어느새 혜원도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영상을 보고 있었다.
“위에서 벌어진 일이 이것이었군.”
그녀는 그리 중얼거렸다.
“굉장한데?”
그녀는 특히 석민이 가지고 있는 단검을 매우 주의 깊게 보았다.
“……좀 닮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석민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스카우트한다는 거 같은데. 날 어떻게 믿고 그러는 것입니까?”
“그야, 우리 교단은 실력을 보고 뽑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재를 최대한 모으고 있거든요. 거절을 하시더라도 일단은 받아주시고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명함을 준 사내 앞에서 대놓고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석민은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그러면 일단 우리는 가보겠습니다. 두 분에게 오늘 정말 폐를 많이 끼쳤고, 앞으로는 뭔가 유익한 만남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아, 그리고 우리 때문에 일이 터진 바람에 계엄군과 경찰이 내일까지 가게 앞 길거리에 경비를 두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사업에 별로 좋지 못한 정보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사업이 번창하길 빕니다.”
박재만과 김지형은 인사를 나눈 다음에 나갔다.
그들이 나간 직후 석민은 권총을 도로 권총집에 넣고는 약실에서 총탄을 빼냈다.
“일은 어쨌든 잘 마무리된 것 같군. 그러면 이제 나가도 될까?”
“아니.”
혜원의 말에 이젠 정신이 지쳐버린 석민은 이번엔 또 뭐가 문제냐고 물었다.
“아까 이승철 씨 오늘 저녁 7시에 온다고 하더군. 그와 오해가 일단 말로는 풀렸다고 하지만,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으니까. 밤까지 있어 줘.”
“…그러지.”
석민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51분, 생각보다 시간이 별로 안 지나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있던 것보다 더욱 힘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