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서울 17화]
“해군에서 파견근무를 하게 된 ‘대위’가 국가안보실 소속 별정직 ‘비서관’의 신분을 가지고 있지. 그런데 어느 부서에도 속하지 않고 심지어 내 지휘도 안 받으며 오로지 대통령님의 명령만 받고 있어. 게다가 나를 비롯해서 심지어 국정원장도 불가능한 대통령님과 독대가 가능하지. 거기다 그것 말고도 ‘정보관’이란 이름으로 국내에서 활동도 하고…….”
전진석의 말투는 그의 기분을 대변하듯 불쾌함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특히 ‘독대’라는 단어를 사용할 땐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과 다름이 없잖아. 비선실센가?”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문민통제와, 민주주의의 절차, 그리고 법을 지키고 있는 대통령과 행정부의 관료들에겐 아영의 존재가 껄끄러움을 넘어 위험하게 비추어졌다.
“그 점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영의 대답에 전진석은 두 눈을 부릅떴다.
“알고 있다고? 언론이나 야당에서, 귀관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대통령님은 끝장인 거 모르는가? 대위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계획을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할 생각인 건가?”
“절대로 사심을 가지거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정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
“지금 귀관이 하는 일 자체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야.”
아영은 혹시 안보실장이 ‘다른 쪽’사람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의 대통령이 이름 없는 일개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사태가 터지고 힘든 시기까지, 온갖 고난과 역경을 함께 해온 사람이었다.
대통령을 배신할 사람은 아니었다.
“귀관이 사태 때 서울서 대통령님을 구하고 보호한 것으로 대통령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게 된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일이 만약 대통령님과 현 정부에 누가 되는 결과를 도출하게 된다면, 나는 절대로 귀관을 가만히 두지 않겠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안보실장의 집무실에서 쫓겨난 아영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녀의 위치와 권한, 그리고 존재는 대단히 민주적이지 못했고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간신, 비선실세와 다름이 없었다.
‘뭐라 불리든 간에 막강한 권한이긴 하지.’
아영은 그리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대통령을 구한 것은-그땐 대통령도 아니었지만- 매우 우연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런 자리에 오르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은 다 하늘의 뜻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권세가도 될 수 있겠지만, 진정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는 아영은 단 한 번도 불순한 생각을 품은 적 없었다.
이제야 서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
바로 다음 날, 아침 10시쯤.
석민은 자신의 집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잠에서 깼다.
일이 없을 땐 늘어지게 늦잠을 자던 그였기에 그제야 비몽사몽으로 눈을 뜬 석민은 자연스레 베게 안에 둔 권총을 꺼내고는 안전장치를 풀었다.
“누구세요?”
“접니다. 아영이요.”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석민은 경계를 풀지 않은 채 현관문 안전고리를 걸어 문을 살짝만 열었다.
그녀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매우 정석적인 정장 차림이었다.
“왜 갑자기 우리 집으로 찾아온 거지?”
잔뜩 날 선 눈초리에 아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와 부하장교 하나만 온 것이니까.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석민이 눈알을 굴려서 주변을 계속 살폈다.
몇 초 후 석민은 문을 다시 닫고 안전고리를 풀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아영은 신발장에만 들어오고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가서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준비하세요.”
“가장 좋은 옷?”
그는 권총에 안전장치를 걸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머리는 기름으로 번들거렸고, 찌든 냄새도 났기에 아영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겨났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다.
“가장 좋은 신발도요. 혹시 양복 있나요?”
그런 걸 가지고 있겠나? 석민은 어이를 상실했다.
“그런 거 없는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만나야 할 분이 있으니까. 씻고, 가장 좋은 옷으로 준비하세요.”
“…뭐, 그러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한 석민은 그대로 문을 닫고는 들어가 버렸다.
대략 10분 후, 다시 나타난 석민이 입고 나온 것은 베이지색 면바지 위에 짙은 회색의 패딩 잠바를 걸치고, 갈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패딩 안에 입고 있는 상의는 검정색 터틀넥 니트였다.
‘생각보다 괜찮게 입었군.’
아주 못 볼꼴은 아니라고 아영은 생각하며, 그를 자신이 타고 온 검정색 고급세단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지난번에 보았던 김현주 소위가 정장을 입은 채, 운전석 쪽 문 앞에서 흡연 중이었다.
그의 눈은 불안한 듯 사방을 훑고 있었는데, 아마 이 근방이 그다지 여유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거주구역이라 불안한 듯했다.
그의 걱정대로 주변엔 건달로 보이는 작자들-정확히 애들 삥이나 뜯는 양아치들-이 흉흉한 눈길로 차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이미 품속이나 주머니에 손을 넣는 자들도 있었다.
무기일 게 분명했다.
창백해진 소위 주변엔 줄담배의 흔적인 담배꽁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담배피지 말고 품속에 둔 SMG나 꺼내쇼.”
석민이 핀잔을 주며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보이자, 근처에 있던 자들이 뒤로 주춤거렸다.
“그놈이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현주 소위가 석민의 말에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품속에서 MP7 기관단총을 꺼내 견착대를 펼쳤다.
그러자 끊임없이 주변에 서성이던 남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골목 안으로 혹은 집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린 몇몇 사람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았지만, 석민이 그들을 겨누는 시늉을 하자 금세 물러났다.
“뒤쪽에 타세요.”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아영이 보조석에 타며 말했다.
석민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뒷좌석에 탔다. 좌석의 가죽이 너무 부드러워 딱 봐도 고급 같았다.
“누구를 만나는 거지?”
직접적으로 집에 찾아와서 그런지 석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짜증으로 가득했고 아영은 사전에 따로 전화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통화내역이자 정보가 남을 수 있기 때문에 전화걸기가 매우 껄끄러워 어쩔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매우 높은 분이라는 것만 미리 말씀드리죠.”
“그래, 딱 봐도 그래 보인다.”
그리고 아영이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이지? 그가 손바닥을 내려다보자, 아영이 입을 열었다.
“그분을 만나는데 권총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알았어.”
석민이 권총을 건넸다.
차량은 검문소의 검색도 받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마치 미리 언질을 받은 것처럼 차가 나타나기 무섭게 이동식 바리케이드가 치워지고 일부 경계병들은 경례까지 해댔다. 석민은 찜찜함과 동시에 마치 장성이 된 듯 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차는 30분을 내리 달렸다.
석민은 굳이 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려 하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주변 풍경만 살폈다.
자연스레 차 안은 적막감만 돌았다. 석민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고 아영과 현주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확하겐 현주는 지루한 나머지 뭔가 이야기 거리를 원했는데, 두 사람이 입을 열지 않으니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젠장, 하인 취급하는 것도 유분수지. 너무한 거 아냐?’
김현주 소위가 불만을 가지든 말든 차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어느 순간 따뜻한 햇볕이 석민에게 와 닿았다. 항상 구름으로 뒤덮인 경기도에선 느낄 수 없는 따뜻함과 눈부심에 그는 인상을 잔뜩 썼다.
갑작스러운 밝음에 그는 엄청난 고통을 느꼈고 눈이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데 경기도를 벗어난 거야?”
따뜻함은 곧 약간의 더위로 바뀌었다.
10월을 막 넘어가고 있는 지금, 경기도와 서울에선 패딩이 필수였으나, 그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에선 패딩을 입기엔 좋지 않은 날씨였다.
“내가 이렇게 쉽게 경기도를 벗어나도 되는 거야?”
그 말에 김현주 소위는 아영의 눈치를 보았다.
현 경기도 지역 주민들은 다른 지방들과 달리 무장이 허락되는 대신, 경기도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향할 경우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덧붙었다.
전과 기록이 없어야 하고, 발가락의 때마저도 검사할 정도로 꼼꼼한 짐과 몸수색을 받아야 하며, 사태 이후 확산된 좀비로 인해 비(非)좀비 건강증명서를 떼 제출해야만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좀비 전염에 대한 공포와 염려로 다른 지역주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정말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나가기 어려웠다.
석민 사태 이후로 태양과 햇빛을 제대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녹음이 가득한 나무를 본 적이 없었다.
“특별명령을 받았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영이 짧게 답했고, 석민은 창밖을 통해 고속도로 표지판을 보았다. 차는 대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기도 지역을 벗어나면서 요금소를 개조한 검문소가 나타났지만, 아영의 말대로 아까처럼 그들의 차량은 하이패스처럼 통과되었다.
“도착하였습니다.”
“소위, 수고했어.”
그들이 도착한 곳은 호텔이었다.
석민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호텔명을 확인했다.
호텔이름이 임페리얼이었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
사실 서울과 경기도 말고는 사태 때 피해를 입은 지역이 없었기 때문에, 밖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화려하게 장식된 호텔의 로비를 지나 2층으로 안내되었다.
2층은 라운지 겸 카페와, 호텔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그가 안내된 곳은 카페였다.
석민은 일어난 대로 끌려왔었기에 배가 고팠으므로 적잖게 실망했지만, 지금 시간은 오전 11시 40분, 딱 점심을 먹었거나 먹기 전 시간이었다.
라운지 입구로 다가가자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손을 들어서 막아섰다.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다들 군인인지 머리카락이 짧았고 2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검문이 있겠습니다. 대위님.”
그중 나이가 좀 있는 자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대충 중사나 상사쯤 되는 듯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는지 아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검문이라니? 저를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까, 김 상사님?”
“경비중대장님께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문 소령님이?”
아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는 저 남자입니다.”
‘씨…….’
석민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저자들의 손에 금속탐지기가 보였다.
“통제구역에 거주민들은 위험하다고….”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 말에 놀란 아영이 석민의 눈치를 보며 호들갑을 떨다가, 저도 모르게 반말까지 하고 말았다.
“군인이 그런 말을 하다니, 아니지 관저경비중대장님이 그런 말을 하시다니 도대체 무슨….”
‘관저? 대통령을 만나는 거군.’
석민은 한숨을 쉬었다.
“이해할 수 없군. 게다가 이분은….”
그의 오른손이 왼쪽 소매 안으로 들어갔고, 곧 거기서 단검하나가 튀어나왔다. 끝으로 향할수록 뾰족하게 생긴 모양새로, 오래된 단검인데 군용이었다.
그의 손에서 단검이 나오자 남자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K5권총과 MP5K 기관단총을 꺼내 들어 석민을 조준했다.
“위험한 사람 맞지. 니들 기준으론.”
그는 단검을 거꾸로 잡아 그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잘 가지고 있어. 5년 전 서울 수복 작전 때 영국 SAS대원한테서 카드내기로 딴 것 중 하나니까.”
아영은 마치 애인에게 배신당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지만, 석민은 어깨를 으쓱했다.